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낯선 대문 틈으로 엿본 아버지의 구두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애수의 소야곡'을 즐겨 부르시던 멋쟁이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마흔 두 살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늘 마흔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살아 계신다. 내가 은발의 할머니가 된 뒤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살아 계실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선글라스를 통하여 바라본 이 세상은 참으로 신비로운 파랑이었다.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앉아 지붕 위의 호박을 딸 때 세상은 그 얼마나 경이로운 것이었던가. 크고 넓고 따스한 세상을 나는 아버지의 창문을 통하여 내다보곤 하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향하여 활짝 열린 내 창문이었다. 영화 흥행업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와 인연이 많았다. 내가 살던 광주 시내의 영화관은 언제나 나를 위하여 활짝 열려 있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 덕분에 어릴 적부터 내 머리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고, 그것이 내 문학 수업의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놓으신 시나리오를 읽으며, 극장에서 아버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영화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웃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화는 화려하지만 그 뒷면에는 어둡고 고단한 인생의 그늘이 짙기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삶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유난히 자식 사랑이 깊으셨던 아버지는 아들뿐 아니라 다섯이나 되는 딸자식들을 소중히 여기셨는데, 첫딸인 나에게 가장 많은 정을 베풀어 주셨다. 여학생이 된 나를 위하여 연두색 이층 필통과 얼굴에 바르는 크림, 멋진 만년필, 하얀 레이스가 고운 속치마를 사 들고 오시기도 하였다. 어쩌다 내 종아리에 상처라도 나면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한다며 빨간 약을 예쁘게 바르시고는 호호 불어주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감한 성격의 아버지는 때때로 연애 사건을 일으켜 나를 미움과 혼란의 늪에 빠져들게도 하였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낯선 골목의 막막한 어둠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작은 가슴을 떨곤 하였다. 낯선 대문 틈으로 엿본 그 마당에 쌓이던 차가운 달빛, 그리고 댓돌 위에 놓여 있던 아버지의 구두, 내 어깨를 어루만지던 서글픈 바람마저도 이제는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사건으로 크게 싸우셨을 때 내가 누구의 편을 들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슬그머니 아버지 곁에 서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움의 사랑의 깊이를 감히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병석이 누우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6.25의 상처가 깊이 남아 있었다. 육군소위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시체 더미에 묻혀 있던 아버지를 지나가는 군의관이 발견하여 간신히 살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자리에 누우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가슴이 탁 트이는 콜라 한 모금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겨울에 콜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온 가족이 콜라를 구하기 위하여 광주 시내를 샅샅이 찾아다녔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대전 국립묘지 장교 묘역에 '육군 소위 노용기'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갈 때 우리 가족은 언제나 콜라부터 챙긴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콜라광이 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창문을 통하여 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배웠다. 그리고 삶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이고. 화려하면서도 서럽고 감동적인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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