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바가지 도시락 - 이은구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으니까 벌써 40여 년이 지난 일이다. 입학한 지 얼마 안되는 저학년 학생들은 마을의 공회당을 빌려 교실로 이용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해야만 했다. 점심은 주로 찐 고구마나 보리 누룽지를 가져와 뒷동산에서 먹곤 했다. 점심을 양은 도시락에 싸오는 학생은 가정이 매우 부유한 편에 속하는 몇몇에 불과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분이셨는데, 하루는 점심 시간에 둥그런 보따리 한 개를 들고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점심을 나와 함께 교실에서 먹어야 한다. 가정방문을 하니 도시락이 없어 점심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이 많더구나. 오늘부터 나도 이 바가지 도시락에 점심을 싸 오기로 했으니 너희들도 바가지에 밥을 싸오도록 해라. 이 바가지 도시락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너희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선생님은 교탁에 그 바가지 도시락을 풀어 놓고 식사를 하셨다. 그후부터 우리 반 학생들은 둥그런 바가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덕분에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뽀송뽀송한 점심밥에 생마늘 몇 조각과 풋고추를 곁들여 맛있는 점심을 나눠 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우리 반에는 예상치 못했던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울퉁불퉁한 교실 바닥에 놓여 있던 바가지 도시락은 살짝만 건드려도 곧잘 대굴대굴 굴러 흙이 묻곤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점심 거르는 것을 염려해 스스로 바가지 도시락을 들고 다니셨던 그 인정 많으신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거주)
총장에서 걸인들의 친구로 - 안치열
꼭 10년 전이었다. 친구가 사는 청주로 가는 길에 꽃동네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는데 순간 나는 운명의 손에 이끌리듯 발을 멈추게 되었다.
"뒤를 닦을 신문지조차 없어 화장실을 사용하기 힘듭니다."
한 수녀의 그 말 한 마디는 주는 것보다 받기에 더 길들여졌던 나의 이기적인 삶을 뒤돌아보게 했다. 그후 시간을 내어 꽃동네를 찾게 되었고, 서울로 돌아올 때면 부족한 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대학 총장으로 장년을 앞두고 주위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가 적지 않았지만 미련과 유혹을 벗어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40년 넘게 총장이니 박사니 하는 직함을 달고 다녔으면 충분하다 싶었다. 퇴임 직후 곧바로 짐을 꾸려 꽃동네로 내려갔다. 단 한 명도 성한 사람이 없는 꽃동네, 우선 급한 것은 그들이 와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병실은 고사하고 변변한 의료 시설 하나 없었다. 폐업하는 병원에서 내다 버린 의료장비를 모으고 못 쓰게 된 커튼과 내의 공장에서 내다 버린 면조각으로 기저귀를 만들면서 병원 꼴을 갖춰 갔다. 절대 속을 내보일 것 같지 않던 사람들도 차차 말을 걸어 오기 시작했다. 그건 나를 꽃동네에 받아들인다는 신호였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휘황찬란하게 차려 입은 중년 여자가 다니러 왔다. 그이는 요양소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나서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모으며 말했다.
"왜 기저귀를 안 쓰는지 모르겠군요. 기저귀를 쓰면 훨씬 편하고 좋을 텐데..."
분명 오물로 뒤범벅이 된 세탁실을 보고 왔을 터였다. 내가 말했다.
"그럼 부인께서 매일 두 트럭씩 실어다 주시지요."
그러자 단번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오백 명이 넘는 식구들이 먹고 입으려면 많은 식량과 물품이 필요하다. 종이 기저귀를 하루 세 번만 갈아 준다고 해도 두 트럭은 족히 든다. 꽃동네는 열 트럭의 선심보다는 한 수레의 신문지가 더 필요한 곳이다. 음성 꽃동네에서 지내던 이태 전이었다. 하루는 오웅진 신부가 나를 찾았다. 신부님을 보는 순간 다른 말은 들을 요량도 없이 불쑥 말했다.
"가평 꽃동네에 제 방 하나 내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게 무섭게 신부님이 말했다.
"총장님이 함께 가주신다면 저희들로서야 고마운 일이지요."
나의 가평 꽃동네 편입은 그런 식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드디어 올 3월 15일, 가평에 노체 안드리아 자애병원이 생겼다. 자그마치 5년 동안의 긴 공사와 300억 원의 거금이 드는 대공사였다. 그 공사를 단 한 포대의 시멘트 값도 받지 않고 맡아 해준 회사는 진로그룹이었다. 무너진 백화점을 짓고, 끊어진 다리로 아까운 목숨을 잃게 했던 기업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요즘도 매일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그들은 힘들다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진종일 묵묵히 일만 하다가 저녁이면 소리 없이 떠난다. 그들은 자원봉사 나왔네 하고 생색내는 법도 없다. 그저 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는 환자들에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다. 속옷 한 번 제대로 빨지 않았을 손으로 환자의 욕창 부위를 닦아 내는 모습을 볼 때면 절로 감탄하게 된다.
무보수로 일하는 열 명의 의사들 역시 대단하다. 그들은 떼쓰기에 신경질, 가끔은 우악스럽게 덤벼드는 노인네들을 어린애 달래듯 한다. 이들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나라는 건강하고 미래가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이에는 버려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루에도 사오십 명이 병자라는 이유로, 무능하다는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니 말이다. 이곳에서도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번번이 버려진 노인네 한두 명쯤은 발견된다.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은 이도 있고 고급 휠체어에 실려 있는 이도 있다. 누군가 - 설마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 일부러 먼길까지 데려와 버리고 간 것이다. 마치 더 이상 못쓰게 된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말이다. 벌건 대낮에 공공연히 벌어지는 '현대판 고려장'.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겠지 하고 자신을 달래 보지만 그래도 뒷끝이 씁쓸하다.
한 번쯤 죽음 앞에 불려 나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곳에서는 1년이면 삼백 명에 가까운 이들이 죽음을 맞는다. 이제 죽음에 초연할 나이인데도 매번 당혹스럽다. 누구처럼 부귀영화를 누려 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제 밥그릇을 위해 칼을 들이댄 적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 단지 약삭빠르지 못해 사는 일에 무능하고 서툴렀던 그들의 죽음이기에 더욱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장' 달린 직위에서 벗어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가평으로 옮겨 앉으면서 덜컥 '의무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더 큰 짐을 통해 더욱 낮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몸이 부자연스럽고 제 밥그릇 챙기는 데 조금 무능하다고 해서 그들이 나와 다를 게 뭐 있는가? 한 번쯤 손을 잡았던 이, 아니면 복도에서 어깨라도 한 번 부딪친 어떤 이가 나의 마지막 길에 따뜻한 동행이 되어 준다면 그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경희대 총장 역임, 가평 꽃동네에서 무료봉사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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