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꽃을 퍼뜨리는 기쁨 - 오윤현
세상 보기를 시인보다 더 평화롭게 살펴보고, 꽃을 자식만큼 사랑하는 노인이 바로 '꽃씨 할아버지', 최영만 씨(66세, 강원도 태백시)이다. 1968년부터 22년 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족두리꽃, 접시꽃, 분꽃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 물기가 차오르는 꽃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나누어 온 최영만 할아버지.
"어머님께서도 꽃 가꾸기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초가집 앞 허술한 화단에 모란이나 도라지꽃, 봉선화 등을 가꾸셨는데, 꽃이 필 때쯤이면 내게 늘 '너도 남의 앞에 꽃이 되어라. 그리고 꽃을 사랑하거라'고 일러주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최영만 할아버지는 꽃이 지닌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라든가, 요염한 빛깔과 꽃에서 묻어나는 향취의 참맛을 몰랐다. 고향인 진천에서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는 1966년 가을 가까스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태백시 광산 보안지도소 수위로 취직했다. 낯선 곳으로의 첫 이주였다. 그런데 그가 태백에 와서 처음 본 것은 앞뒤로 꽉 막힌 검은 산과 새까만 시냇물, 그리고 공터에서 맘껏 자란 쑥대와 잡초뿐이었다. 마음의 쓸쓸함과 황량함을 뭐라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지도소 안을 청소하던 그의 눈에 싱싱하게 피어난 한 무더기 나팔꽃 넝쿨이 강렬하게 들어왔다. 나팔꽃은 그 진한 싱싱함으로 주위의 황량함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꽃 가꾸기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검게만 보이는 공터에 채소와 화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지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는 고향의 어머니 생각도 간절하고, 또 억쎈 들꽃이라면 이 정도 땅에서도 굳세게 자라 줄 것 같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씨를 심어 보았다.
그해 가을 그는 처음 자기 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심은 작은 씨앗에서 저렇게 곱고 탐스러운 여러 송이의 꽃들이 피어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마치 마술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그해 가을 그는 자신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혜안을 키워 준 어머니에게 사랑의 보답으로 몇 가지 꽃씨를 보내 드렸다. 그후에도 몇 년 간 계속해서 많은 양의 꽃씨를 어머니께 보내 드렸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맙게도 마을 어귀에 그 꽃씨를 심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내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어요. 꽃씨를 수확했는데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나서도 많은 양이 남았어요. 며칠을 궁리하다가,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해서 가까운 관공서로 무조건 보내 주었지요."
겨울이 물러가고 한참 지나서 민원 서류 한 통을 떼기 위해 면사무소에 들렀던 그는 우연히 인부들이 사루비아와 코스모스 씨앗을 정성들여 땅 속에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씨앗의 출처를 물어 자신이 보낸 것임을 확인한 그는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됐다. 청와대를 비롯한 전국의 관공서로 자신이 모은 코스모스며 맨드라미, 봉선화, 해바라기 등속의 씨앗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꽃씨를 보내는 소박한 그의 일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러자 봇물 터진 듯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해 왔다.
(샘터 기자)
일본을 다시 생각한다 - 김승한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한국인 자녀를 위한 학교엔 빈자리가 없었다. 도쿄의 경우엔 한국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한국 학교가 단 한 군데밖에 없다. 따라서 정원에서 한 명이 빠져 나가면 대기 신청 순위에 따라 전학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전학 첫날 아이는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아이를 수용하게 된 학교측은 아마 내심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 걱정하시지 말라, 최선을 다해 교육할 터이니 긴밀하게 상의하자, 이웃나라 어린이를 학생으로 받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까지 덧붙였다. 그리곤 아이에게 일본 단어 세 가지를 외우게 했다. 오미즈(물), 오테아라이(화장실), 이타이(아파요). 수업중에 목이 마르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그 말을 선생님께 하라고 가르쳤다.
교장 선생님은 한국 어린이를 책임지게 된 만큼, 자신과 담임 선생님도 한국어를 배워서 아이와 교류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쪽이 송구스럽기도 했고 의례적인 인사치레려니 하며 흘려 버리고 말았다. 전학했을 때는 여름이었다. 별탈 없이 그 해를 보내고 이듬해 정월이 되었다. 한겨울에도 거의 영상의 기온이던 도쿄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영하로 급강하했던 1월 중순, 새벽 출근길에 그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툼한 방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빗자루로 등교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스크를 썼는데 낯이 익었다. 가가이 다가가자 노인은 마스크를 풀었다. 그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행여 미끄러져 다칠까 봐 선생님이나 관리인들보다 일찍 나와 눈을 치우는 게 분명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일본어로 아침 인사를 하자 교장은 한국어로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한국어를 배운 지 일곱 달 만에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일순, 놀라움보다는 전율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였다. 아이가 별탈 없이 학교에 다녔던 배경에는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철저함과 집요함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MBC 주일 특파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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