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대를 잇는 배움의 등불 - 서원섭
1968년, 외국어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할 무렵 나는 유난히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대학에 몸담은 것만도 7년여에, 30여 년 동안이나 교단을 지켰던 나로서는 당장 강의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나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나는 주로 서울 외곽의 산들만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그리고는 막상 얼마간의 퇴직금을 받아 든 날 가족들 앞에서 내 포부를 밝혔다.
"이 돈으로 저그만 학교를 만들어야겠어. 배움에 굶주린 가난한 마을을 찾아..."
아이들도 물론 놀라움이 컸겠지만, 청천벽력쯤으로 받아들인 것은 나이보다 더 주름살이 늘어 보이는 아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다 초년 고생도 접고 편안해진다는 사십 줄에 덜렁 세 아이를 맡겨 놓고, 미국에 공부한답시고 건너가 좋은 시절을 다 놓치게 해놓고는, 이제 적잖은 퇴직금으로 조용히 살아보나 했더니 밑도끝도없이 다시 학교라니! 그러나 내 생각은 딴 데 있었다. 평생을 거의 분필가루와 함께 산 셈이지만, 학교 문을 나서는 마당에 나는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아쉬움을 되씹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도 교육의 틀 안에서만 맴돌아야 했던 내가 과연 진정으로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을 만나 봤는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비싼 납부금 때문에 학교 문을 기웃거리다 돌아선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또 진리가 전부인 것을 믿고 강단에 서 왔으면서도 막상 사랑하는 제자가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야 했을 때에도, 경영진측의 텃세로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참다운 학교를 내 손으로 꾸려 보리라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우, 정흥, 정황 삼형제와 함께 곳곳을 쏘다니다가 이곳 군포에서 제자인 성낙일 군(현 상명여대 교수)을 만나 탄생한 것이 지금 군포사회학교의 전신인 군포고등학교이다. 처음에는 찬바람 몰아치는 산밭에 닭장을 개조하여 교실로 꾸미고 그곳에서 중학 과정을 가르친다고 하자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 삼형제, 성군을 비롯한 자원 봉사자들은 역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이들에게 영어로 된 구두약 상표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데려왔고, 아직 채 뼈가 굵지도 않은 딸아이를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공장으로 보내는 아줌마에게는 배움은 반드시 현재의 배고픔을 보상해 준다고 설득해서 학교로 데려왔다. 그렇게 해서 모인 학생들이 남자 열아홉 명, 여자 열한 명, 합해서 모두 서른 명. 이들로부터 받은 수업료는 한 달에 950원밖에 안되어 전원이 다 낸다 해도 1970년 당시 대졸 초임 수준밖에 안되었지만 우리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개중에는 성군처럼 대학교수도 있었고, 유학을 다녀온 이도 있었지만 닭장 대신 우리들의 60평 남짓한 교실을 지을 때는 모두들 비지땀을 흘리며 학생들과 더불어 벽돌을 찍고 흙을 져 날랐다. 선생님들의 그런 모습을 접한 학생들은 생활이 어렵고 공부가 지겨워 학교를 떠났다가도 피붙이라도 된 듯 다시 찾아오곤 했다.
내 아들 삼형제도 애당초 3년만 돕기로 약속했다가 그 배가 넘는 기간을 머물다가 제 길을 찾아갔다. 아내는 학교 운영비를 충당하느라 서울 삼청동 집을 처분하고 이곳 관사로 오기까지 2년 동안이나 도시락을 싸 날랐다. 3년 만에 가진 첫 졸업식에는 여섯 명의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 결실에 우리는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생들은 선생님들이 각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간곡히 부탁한 끝에 모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막상 졸업생들을 내기는 했지만 대부분 생활에 쫓기는 처지인 데다 일터를 찾아 외지로 떠나는 통에 만남의 끈을 오래 붙들고 있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추운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를 이 학교에서 일하도록 해주십시오."
초창기의 졸업생인 이상수 군이었다. 교정을 떠난 뒤로 죽 소식이 없더니 그는 이곳에서의 배움을 인연으로 남들처럼 대학을 마쳤노라고 했다. 충분한 대우는 약속하지 못했지만 이 선생은 후배들 앞에 한 좌표처럼 되었다. 흑판 앞에 선 지 몇 년이 되는 지금, 그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결석한 아이들 집을 찾아 다니고 또 어려운 사정으로 공부를 계속하기 힘든 제자들을 데리고 기업체 취직 창구를 두드리기에 바쁘다. 얼마 저에는 부서진 계단을 시멘트로 바르고 있던 내 팔을 붙잡는 젊은이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된다며, 조행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선생님, 그 흙손 제게 주십시오. 후배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튼튼히 해놓겠습니다."
조군은 어느 선생님께서 책과 연필을 사주며 공부를 계속하도록 시켰는데 어머니 병구완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졸업을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익힌 영어와 한문으로 이름자라도 쓸 수 있게 된 것이 기술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 했다. 일류 기술자가 된 그는 다시는 그처럼 잠시의 어려움으로 배움을 포기하는 후배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며, 다시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 금이 간 벽이며 낡은 배선을 열심히 손보고 있다. 나는 이들을 통해 아직 소식이 없는 나의 많은 아들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음을 느낀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얼굴을 맞대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서 하나씩의 등불을 켜고 있는 것이 환히 보이는 것이다.
(군포사회학교 교장)
커피 한 잔 - 권은주
지난 겨울 어느 금요일, 그날은 몹시 추웠다. 복잡한 거리에서 나는 남루한 옷을 걸친 한 여자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장애인이었다. 그녀의 하체는 검은 고무판으로 짧게 가려져 있었고 두 손도 지저분한 천에 감춰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몸을 끌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그녀 앞에는 동전이 담긴 플라스틱 광주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안스러운 표정을 한 사람이 그녀를 한 번 바라보는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그녀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눈동자는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의 입에선 구슬픈 노래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낯선 다리가 그녀 앞에 멈추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보지도 않은 채 연신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 남자가 으레 동전을 광주리에 던지겠거니 하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놀랍게도 종이컵을 내미는 것이었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그를 바라다 보았다. 그녀에게는 컵을 받아 들 손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자 그는 흡사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리는 엄마처럼 그녀의 입에 컵을 가져갔다. 짧은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커피를 주고 나서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라진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그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경북 예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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