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소아마비 어린이와 매스 게임 - 권도희
수정처럼 파란 5월의 하늘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교정에 푸르름이 짙던 몇 해 전 어느 날 오후, 나는 2, 3학년 여학생 이백여 명을 데리고 매스 게임을 지도하고 있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학교에서 마련한 체육대회 준비였던 것이다. 나는 몸이 부자연스런 아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도록 했다. 그중 소안마비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저는 애가 유난히 열심히 구경하는 게 눈에 띄었다. 드디어 체육대회날이 되었다. 학부모들이 반별로 모여 선 가운데 갖가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매스 게임을 얼마나 잘 치러낼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매스 게임 차례가 왔다. 아이들에게 잘하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한 뒤, 구령대 위에 올라가 입장 대열을 바라보던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스 게임을 갖추어 입지 않은 학생 하나가 우측 2열 가운뎃줄에 끼여 다리를 절면서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옆의 아이들을 보며 겨우겨우 매스 게임을 따라하는 그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매스 게임을 하는 그 몇 분 간이 지겹도록 길게만 느껴졌다.
"너는 하지 말랬는데 옷도 안 입고 끼어 들면 어떡하니?"
나는 모처럼 정성들인 매스 게임이 엉망으로 되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그 아이에게 심한 꾸중을 했다.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 애 엄마가 와서 억지로 넣고 가더군요."
순간 나는 온몸을 엄습해 오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기 자식이 단체 행동에서 빠지는 게 오죽 가슴이 아팠으면 그랬을까. 성한 애들 가운데 유독 부자유스러운 자기 애를 보는 게 괴로웠을 터인데도 끝내 참여 정신을 가르치고 싶었던 그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서 그 애 어머니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어머니들을 기쁘게 하자고 마련한 체육대회인데, 그 애 어머니의 마음을 다소라도 흐뭇하게 했다면 까짓 매스 게임이 잘되고 못되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해마다 어버이날이 오면 그 일이 생각난다. 그토록 꿋꿋한 어머니가 있는 한 그 아이는 어느 건강한 애 못지않게 밝고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경북 산동초등학교 교사)
사랑의핏줄 - 연관흠
"3락년 2반 담임 선생님 계십니까?"
점심을 막 들고 교무실에 앉아 있는데 누가나를 찾아왔다. 자녀의 성적을 알아보러 온 학부모려니 생각하며 맞아들였다.
"저, 심기학의 집안네 형뻘 되는 사람인데, 선생님께 죄송한 부탁을 좀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 듯이 꺼내 놓는 부탁은 과연 어려운 문제였다. 기학의 어머니가 심장병과 복막염이 겹쳐 스물네 시간 이내에 수술을 받아야 될 처지인데 피가 보족하니 도와 달라는 거이었다. 여러 곳으로 뛰어다니며 AB형 피를 구했으나 갑자기 그렇게 많은 혈액을 구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착하고 성실한 한 학생의 어머니가 죽어 간다고 하는데 어찌 모른 체할 수가 있는가. 나는 힘껏 노력해 보겠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스물네 시간 이냉에 4천cc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방송실로 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늘 학교이 방송 일을 도맡다시피 했으면서도 이번엔 흥분한 탓인지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 친구의 어머니께서 지금 이 순간 무서운 병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고귀한 피로 그 생명을 수해 드립시다."
3분 남짓 방송을 한 후 고뮤실로 들어왔다. 정말 초조했다. 부탁하러 온 그분도 마음이 조이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잠시 후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조그마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잠시 후 또 한 명, 또 한 명, 무려 백삼십이 명의 학생이 들어왔다. 나는 하나씩 손을 잡아 주며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중 체격이 크고 건장한 학생 스무 명을 추리고 나머지 학생은 돌려보냈다. 아쉬운 눈빛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는 스무 명과 함께 43야전병원으로 갔다. 정밀 검사 결과 적당한 학생은 아홉 명밖에 없었다. 붉은 피가 뽑히는 팔뚝을 바라보며 태연히 웃는 꼬마들. 나는 그들의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해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경기도 의정부시 경문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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