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독을 덜어 주는 고독한 황제
헐렁한 바지와 어눌한 동작으로 희극계의 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채플린, 그러나 그의 불행한 성장처럼 언뜻언뜻 보이는 고독과 외로움의 정체. 둘레가 높은 모자, 다 떨어진 저고리에 헐렁한 바지, 질질 끌리는 큼지막한 구두의 대나무 단장으로 분장한 채플린의 어릿광대 모습을 볼 때면 웃음보다 먼저 무언지 모를 고독과 외로움을 떠올립니다.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 고독과 외로움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희극왕 찰리 채플린은 1889 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어머니와 네 살 위의 의붓형밖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처자를 버리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으니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삯바느질을 하여 끼니를 때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마저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다 쓰러져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빈민구제원에, 여섯 살 된 채플린과 형은 고아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플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면서도 어머니를 기다렸으나 2 년 동안 어머니는 면회 한번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배우였고, 가수 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그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채플린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고독과 외로움을 벗삼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원이 아이들에 대한 양육을 아버지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으며, 그 여자는 형제를 길거리로 내쫓는 등 구박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퇴원하고 방 한 칸을 빌어 아이들을 데려와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가자 차츰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형은 뱃사람이 되고 채플린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가끔 무대에 서서 어린아이 역을 맡아 배우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채플린은 고아원에 가기 싫어 한때 자취를 감추었다가 학교는 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빈민가의 부랑아가 되었습니다. 부랑아 생활을 하면서도 간혹 무대에 선 덕에 21세 때 극단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헐리우드에 진출, 31세 때는 최초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4 년 후에는 자기 프로덕션을 세우면서 미래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겁많고 외로운 부랑아가 심술궂은 상대방의 술책에 애를 먹다가 아차, 하는 순간 요절복통한 묘수로 위기를 모면하는 연기는 전세계인의 박수갈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 년간 되풀이해 읽기도 한 채플린은 히틀러를 '독재자'로 비판하고, '모던타임즈'로 현대문명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살인광 시대'로 군비확장을 규탄했습니다. 미국 보수층으로부터 반발을 사 한때 국외추방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1972 년 아카데미상을 받음으로써 이에 대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은막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
오선지를 사용할 줄도 모른 어빙 벌린이 미국 음악에 영향을 끼친 작곡가가 된 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하는 생활을 하는 동안 가슴속 깊이 울리는 멜로디를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 2천 년이 되면 미국 음악의 탄생일과 어빙 벌린의 탄생일은 같은 날이었다고 반드시 음악비평가가 말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 최고의 작곡가인 카펜터가 한 말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부활절 행진'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ad bless America)' 등의 곡을 작사 작곡해 지금까지도 미국을 감동시키고 있는 어빙 벌린은 미국 유행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1888 년에 태어난 벌린은 가족들과 함께 1892 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컴컴한 선창 속에 처박혀 윗칸에서 떨어진 칼을 맞아 상처를 입으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빈손으로 미국에 도착한 일가는 편물 수공업, 공장일, 정육점 등에서 일을 하며 어두운 지하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의 끔찍했던 생활에 비교하면 마치 천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감사의 기도와 함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벌린은 어머니의 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래의 내용은 어머님의 입을 통해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다. 노랫말은 가슴속 깊은 데에서 떠오른다."
1939 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벌린은 이 곡을 발표했습니다. "또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 큰일이다. 정말로 온 미국이 일치 단결해서 일어서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 곡이 크게 히트하자 그는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돈을 벌려 한다고 비난을 받을까봐 인세를 모두 미국의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에 기부했습니다. 이듬해 이 곡은 전미 음악감상회로부터 그 해의 최우수 작곡상을 받았고, 순식간에 퍼져 나가 이젠 미국 제1의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빙 벌린은 학교를 2 년밖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책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마 자신의 전기 정도일 것입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올코트가 그의 전기를 벌린의 나이 35세 때 썼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선지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곡은 멜로디를 그가 흥얼거리면 음악을 아는 비서가 악보로 작성했고, 음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젊었을 적에 확실히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해 주면서 그 악사가 연극하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발견하곤 했던 것입니다.
1920 년 벌린은 뉴욕 사교계의 우두머리를 아버지로 둔 엘린 메케이와 사귀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손님이 던져 주는 푼돈을 바닥의 톱밥에서 주워 싸구려 하숙비를 지불하는 벌린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벌린이 결혼 전 아내에게 준 생일 축하 선물에는 오직 한마디 '올웨이즈(Always)'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가사 중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라는 대목의 악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