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온실꽃과 야생화 - 이창건
몇 해 전인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유럽의 어느 비행장에서 몇 시간 기다린 적이 있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마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든 승객들의 시선을 끈 것은 남달리 귀엽게 생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혼자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의 앞가슴과 잔등에는 커다랗게 써 붙인 글귀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잔등에는 출발지, 경유지,행선지 그리고 비행기마다의 번호와 이착륙 시간 등이 적혀 있었고, 앞가슴에는 부모와 도착지의 보호자 이름, 전화 번호,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그 개구쟁이는 호주의 부모 곁을 떠나 영국 학교에 유학가는 길이었다. 꼬마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역시 세계를 제패했던 앵글로 색슨족은 다른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린이들을 너무도 과잉 보호하는 우리 나라 엄마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10여 년 전 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카메라 셔트를 눌러 달라고 부탁하는 일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다음엔 네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그 일본 사람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데 교통순경이 뛰어 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 내용인즉 길 건너에 서 있는 저 동양인이 손짓 발짓으로 묻고 있는데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으니 통역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야팡, 야팡!" 하면서 교통순경에게 떠들어댄 사람은, 자기는 세계 일주 무전 여행중인 일본인인데 어디 공짜로 먹고 잘 곳이 없느냐는 사연이었다. 거지 같은 꼴의 그는 자전거를 타고 인도 봄베이에서 비엔나까지 두 달 반 걸려 달려왔다는 것이고, 자기와 함께 떠난 또 다른 일본인 두 명은 뒤에 쳐졌다고 했다. 우리 셋은 약속이나 한 듯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실컷 먹고 마시며 흥미진진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던 일본인은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자기 나라의 어느 지방 신문에 유렵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자유 기고가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인 해외 관광단이 별로 없었던 때라 그의 글은 주목을 받았고, 또 다리가 불편한 그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가볼 수 있다는 식으로 글을 써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에너지 연구소 원자력 연수실장)
부처님 모습 - 석지현
1985년, 나는 인도의 켈커타에 있었다. 이 세상의 끝, 인간의 온갓 더러운 모습이 다 있는 곳, 그리고 극도의 무질서와 무더위가 우글거리는 곳 켈커타... 벵갈리 마켓 부근의 빈민촌에 인도 절이 있길래 거길 찾아갔다. 반기는 것은 오직 무더위뿐. 사방이 벽으로 막혀 버린 이 수용소 같은 방에 머물 생각을 하니 기가 찼다. 모기떼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날이 새었다. 가는 햇살이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와 밭에 꽂혔다. 또 고생이 시작되는구나... 나는 아득한 생각에 젖어 얼마 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누가 열려진 문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거지가 돈 달라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지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요?"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었다. 거지는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산티니케탄에서 산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거지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의 청소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시인 타골이 세웠다는 오두막집 대학 산티니케탄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티니케탄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부근의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그곳은 마치 쓰레기와 세균의 집합장 같았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골목길들을 이리 돌고 저리 휘어 가면서 그는 차이나타운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인도에서 27년째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는 손국수를 사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손국수를 파는 곳은 없었다. 이렇게 찾아 헤매이길 무려 세 시간, 나는 지치고 화가 났다. 느닻없이 나타난 웬 일본 거지가 손국수 하나로 나를 이렇게 골탕먹이고 있는가 싶어 울화가 치밀었다. 겨우 손국수 파는 곳을 발견하자 그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드디어 손국수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 몫의 손국수를 사들고 그는 나와 헤어졌다. 내일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이튿날 나는 어렵게어렵게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을 찾아갔다. 마키노(그의 이름)를 찾자 인도 여학생들은 대번에 마키노라는 이름 뒤에 '교수님'을 붙였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교의 일본어과 주임교수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나 옷은 역시 짝짝이인 어제 그 옷이었다. 그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인도의 밤. 먼 곳에서는 그리움처럼 불이 켜지고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탁(조그만 앉은뱅이 나무 책상) 에 앉은 나는 놀랐다. 어제 그가 그토록 사려고 헤맸던 손국수는 바로 오늘 자기 집 손님으로 오는 나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무엇엔가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발 씻을 물을 주고 잘 자리를 준비해 주는 그들 부부의 정성 어린 태도는 집 나간 아들을 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침. 마키노 교수는 조그만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렸다. 부인은 작은 소꿉놀이 그릇에 다섯 알쯤 되는 밥풀을 담아 가지고 와서 신상 앞에 놓았다. 나는 뒤에 앉아서 마키노 선생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그에게는 전혀 꾸밈이 없었다. 교수라는 권위도 지식인의 오만도 그에게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여기 오직 간절하고 조그만 한 인간이 지금 내 앞에서 기도를 드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바로 저것이었구나,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모습은 바로 저것이었구나. 바로 저 겸허하고 절실한 한 인간의 모습이었구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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