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고마운 내 친구, 고통이여 - 양병건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처음 뵙는 감독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책상을 밀고 휠체어에서 내려와 시험지를 교실 바닥에 놓고 굽은 손으로 문제를 풀고 있으니 놀라신 것도 당연했다.
"선생님, 저는 장애가 심해서 엎드려서 시험을 봐야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렇게 속시원히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입술을 내밀어 "우, 우, 우..." 라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1973년 5월, 파란 바닷물이 춤추는 충청남도 홍성의 작은 어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난 굉장히 튼튼한 아이였다. 겨울엔 신발도 신지 않고 지녔으며 사시 사철 산자락을 누비고 다녔다. 여름이면 바닷가, 겨울이면 산이 내 놀이터요, 친구요, 안식처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말고는 내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시샘이라도 하듯 갑자기 병마가 들이닥쳤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였다. 학교가 끝난 뒤 40분이나 되는 길을 걸어 집에 오니 식구들은 모두 학교로 일터로 가고, 마당 멍석 위에 빨간 고추들만 널려 있었다. 평소 낮잠 자는 버릇이 없는데 웬일인지 몸이 나른해서 낮잠을 잤다. 두 시간 정도 자고 나니 오른쪽 허리가 딱딱한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몹시 아팠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마침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 밖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내 울음 소리를 듣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 병건아! 왜 그러니?"
어머니는 한 손으로 날 안으시고 한 손으로는 내 이마를 짚으셨다.
"어휴! 이 열 좀 봐! 안되겠다. 빨리 업혀라."
어머니는 나를 업고 40분이나 뛰어서 홍성군 서부면 보건소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엔 치료 기구도 없고 고칠 수도 없다고 해서 나는 곧바로 홍성의료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치료가 아닌 얼음 찜질만 했기 때문에 열도 떨어지지 않고 혼수 상태는 계속되었다. 오히려 악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이틀 만에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기셨다. 수많은 검사와 방사선 촬영 결과 내 병명은 뇌염으로 밝혀졌다. 이제 더 이상의 치유는 바라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그냥 주저앉으셨다. 그때 난 처음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서울대학병원에서 한 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의 차도가 없었다. 병의 차도는 둘째치고, 우리 가정이 감당하기에는 병원비가 너무 엄청났다. 인심을 잃지 않은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끌어 쓸 수 있는 빚은 모두 끌어 모았지만 병원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우리 다섯 식구의 생명줄이었는데, 면회 온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 속에서 그것마저 처분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어린 심정에도 괜히 살아서 가족들 고생만 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내 몸은 다시 홍성의료원으로 옮겨졌다.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어머니는 간절하게 매달리셨다. 혼자 되신 어머니는 신앙적으로는 절대자에게 매달리셨고, 병원에서는 의사 선생님에게, 나와 단둘일 때는 내게 매달리셨다. 난 아직 철이 없었지만 옆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웃으려고 노력했다.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면 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물론 어머니가 내 옆에서 간병을 하시는 동안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형과 동생, 부실한 반찬과 메마른 밥, 차가운 국, 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죄인이었다. 내 병원비 때문에 가정 형편은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홍성의료원에서 1년 정도 버티다가 어머니는 날 퇴원시키고는 끝까지 해보자며 당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날 업고 경상도 영천, 전라도 여수 등 전국의 한약방, 병원, 심지어 두메산골의 용하다는 침쟁이에게까지 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남편 없이 혼자인 어머니의 뼈를 깎는 간병에도 불구하고 나의 뇌성마비 증세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결국 눈덩이처럼 커진 빚 때문에 객지 방문은 끝나고 어머니가 직접 집에서 물리치료를 시작하셨다. 내 몸은 낙지같이 흐물흐물해서 앉혀 놓으면 좌우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석 달 동안 꾸준히 물리치료를 하자, 손에 힘이 오르기 시작했고 겨우 짚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1년 만에 손발에 힘이 붙고 몸에도 차츰 힘이 생겼다. 우리 모자는 기뻐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난 어머니의 눈에서 쏟아지는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을 보았다. 그때까지의 모든 회한을 씻어 내려는 눈물이었으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오히려 광채가 났다. 그만큼 우리 어머니의 정성과 자식을 향한 헌신은 평범한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었다.
내가 힘을 얻고 방안에서 기어다니기라도 하게 되자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조그만 횟집을 시작하셨다. 횟집이라고 해봐야 두 평짜리 홀에 탁자 몇 개 놓고, 남자들이 만지기 힘들다는 생선회를 떠서 파는 곳이었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손을 보면 칼에 베어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그 상처는 아물 날이 없이 흉터로 남았으며, 나중에는 손의 지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횟집 덕택에 누나, 형 ,남동생의 학비 조달이 가능해지고, 내 병원비 때문에 빌린 돈도 조금씩 갚아 갈 수 있었다. 우리 가정에서도 가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은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지만 죽는 순서는 없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뜨니, 내가 죽더라도 병건이 살아갈 최소한의 돈은 마련해야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도다리, 광어, 붕장어의 뼈들을 추스리셨다. 몸은 조금씩 힘이 올라 가눌 수 있었지만 열서너 살이 되자 갈수록 신경이 바늘 끝처럼 예민해져 가고 육신 역시 야윈 얼굴에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왔다. 두 눈은 쑥 들어갔으며 목은 건들거렸다. 눈만 감으면 영락없는 송장이었다. 간혹 방송이나 신문에서 신병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면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그러나 내겐 그런 용기도 없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처참함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면 항상 누가 나를 끌어당겨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내 생각들을 돌려놓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신앙이었다. 나보다 한 발 앞서서 나의 길을 예비해 두신 절대자와의 오묘한 만남이었다. 그래서 난 죽기를 포기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고, 고통의 밀림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그 고통을 참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고통은 고마운 내 친구, 먼 훗날 영광의 빛으로 틀림없이 인도해 줄 길잡이였다. 기쁘게 고통을 덥석 끌어안으니 고통의 과정을 뛰어넘는 놀라운 변화가 왔다. 평생을 고통의 감방에 갇혀 살도록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이지만, 무엇이 문제랴!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지만, 감히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집에 누워 있으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늘 아른거렸다. 또한 될 수 있으면 가족들 곁을 떠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거칠어지고 칼에 베인 상처뿐인 손, 움푹 패인 눈, 굵어진 주름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곳 저곳 수소문해 보니, 대전에 있는 지체부자유 특수학교인 성세재활학교가 있었다. 열 여섯 살에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어머니는 펑펑 우시면서 날 보내셨다. 그리고 힘들고 어렵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라고 하시면서 애처롭기 그지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집에서 세 시간이나 떨어진 대전까지 보내셨다. 학교 생활과 기숙사 생활은, 갇혀 산 지 7년 만의 외출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들이 생소하고 적응이 힘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방 청소하고 세수, 이불 정리, 등교 준비, 교재 챙기는 것, 과제물 정리, 화장실 사용 등은 내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독한 마음을 품고 왔다지만 집에 가고 싶어서 우는 날이 훨씬 많았다. 더군다나 혼자 휠체어를 끌지 못하니, 같은 반 친구들이 밀어 주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휠체어를 좀 밀어 달라는 소리가 입 속에서는 나왔지만 상대방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바지에 대소변을 쌌고, 토요일마다 빨래와 목욕 때문에 학교에 오시는 어머니에게 내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한 번만 그따위 소릴 하면 절대 내 아들이 아니다. 한 달 안에 대소변 처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찾아오지도 않겠다!"
이렇게 소리치신 어머니가 훌쩍 집으로 가버리시자, 나는 무척이나 서럽고 한편으론 겁도 났다.
'엄마가 정말로 날 버리면 어떡하지?'
처음 학교 왔을 때의 각오를 되새기며 한 달 동안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흐물거리는 몸으로 베개를 굴리고, 입으로 이불 자락을 물어서 같은 방의 친구들과 방 정리를 하고, 한 발로 바닥을 디디며 휠체어를 끌고 화장실을 다녔다. 마음을 고쳐 먹으니 모든 것들이 그토록 변해 갔으며 적응 속도도 무척 빨랐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았다.
사감 선생님은 특히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작곡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자원 봉사자인 그 대학생으로부터 기초 지식도 배우고 작곡에 대한 개념도 조금씩 정립해 갔다. 또 나는 필기 능력이 떨어지므로 작곡 공부를 컴퓨터로 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그 대학생이 내 시에다 멋지게 곡을 붙여 불러 주었을 때는 황홀 그 자체였다. 아직 중학생이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또 대학 작곡과에 입학해 보란 듯이 작곡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각도로 모색한 결과 성세재활학교 중등부 졸업생들이 가장 많이 진학한 경기도 안산의 명혜재활학교 고등부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명혜학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사감 선생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용기를 내어 원고를 냈고 합격했다. 내 나이 이제 20대 초반의 문턱에 서 있다. 그런데 한 200년 가량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건 웬일일까? 매일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삶 위에서 곡예사처럼 가슴 조이며, 하루하루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신기할 정도로 까마득하기만 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벅차도록 숱한 사건과 고통의 연속, 험한 고개란 고개는 모두 내 앞에만 와 있는 듯싶었다. 의사도 포기했고, 그 누구 하나 따뜻한 눈길을 던져 준 이 없던 내가 이렇게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쉰다. 그리고 잠시 이렇게 학창 시절의 쉼터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볼 여유도 갖는다. 진정 고맙고 기쁜 일이다. 눈물겹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국 인간이 되돌아오는 종착역은 신 앞에 무릎 꿇고 겸허하게 머리 숙이는 그곳이다. 그 모습으로 난 숙연히 20대를 받아들이고 싶다.
(카톨릭 사회복지국 200주년 장학회 전국 학생수기 금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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