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고향처럼 푸근하고 정다워 - 안삼환
형과 내가 도청 소재지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당시 우리는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도회지로 나가곤 했는데, 그날따라 밤새 눈이 수북이 내려 있었다. 나는 앞장 선 형의 발자국을 따라 강가까지는 무사히 왔다. 그러나 돌 징검다리가 얼어서 미끄러울 뿐 아니라 강물도 꽤 불어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아랫도리를 걷어 붙이고 얕은 곳을 가려 강물을 건너야 할 판이었다. 당시 열다섯 살의 심약한 소년이었던 나도 사태는 이미 파악했으나 찬 강물을 건너려니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였다. 형은 자신의 책가방과 보퉁이(우리 형제가 일주일 동안의 자취 생활에 필요한 밑반찬 따위를 싼 꽤 큼지막한 짐이었다)를 그대로 둔 채 나를 덥석 업고 강물을 건너는 것이었다. 아랫도리를 걷은 채 겨울의 찬 아침 강물을 건너보지 못한 사람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형은 한 번 건너가기도 힘든 그 강물을 나를 위해 두 번이나 더 건넜던 것이다. 형이 다시 건너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강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형, 발 시리지?" 하고 미안해 하며 물었다. 이에 형은 "응, 하지만 이제 양말을 신으면 후끈후끈해 질 거야!" 하고 대답하면서 한 번씩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형은 고향의 눈길에서처럼 언제나 푸근하고 정다웠다.
형이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우리들은 나란히 대학에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대소가를 포함한 우리 일가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 격이 되었다. 때마침 방학이어서 우리 형제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가서 간병도 해드리고 농삿일도 거들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병석의 아버님께서는 "집안 걱정일랑 말고 너희들 갈 곳으로 어서 돌아가라"고 성화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형제 중 하나는 고향에 남아야 했다. 그것은 20여 년 전 아버님께서 낙향하셔야 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로서, 집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쩌면 좌절과 회한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서로 고향에 남겠다는 눈물겨운 주장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건 결국 고향에 남은 쪽은 형님이고 보면, 여기에는 나에 대한 형님의 한량없는 신뢰, 사랑 그리고 자기 희생이 숨어 있는 것이었다.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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