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깊고도 깊은 가슴 - 김영지
때로 아빠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지나치시거나 워낙 깊으신 탓에 가족들에게 곧잘 원성을 들으신다. 전화가 짜증나도록 잘못 걸려 와도 너무나 공손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응답을 하셔서 귀한 분의 전화인 줄을 알고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들을 웃게 만들기도 하신다. 아빠는 회사 전 직원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챙겨 아끼시는 명상 테이프를 선물하시기 때문에 우리 집 카세트 앞에는 녹음하기 위한 공 테이프가 산만큼 쌓여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빠가 도시락을 갖다 주러 학교에 오셨다가 한 시간 남짓한 아침 자율 학습 시간 내내 교실 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추운 복도에서 서성이신 일도 있었다. 뒷문만 빠끔히 열고 전해 달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됐을 텐데 아빠로서는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교실 문을 도저히 열 수 없으셨던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 챙겨 주느라 바쁘시고 꾀를 모르고 진실되게 살아오신 아빠의 웃음은 그 누구보다도 해맑다.
지금도 가끔 아빠는 여기저기에서 모은 명언들을 복사해서 자식들에게 하나씩 보내신다. 결코 명필이 아닌, 꾹꾹 눌러쓴 까만 볼펜 글씨와 함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위인들의 철학이 담긴 글에는 아빠의 살아가시는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아빠는 '청소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자료만 보면 당장 작은딸에게 부치시는데, 얼마 전에는 달력의 날짜 부분을 오려서 노란 봉투에 보내 오셨다.
"필요하면 이용해라."
날짜 사이의 여백을 이용해서 월중 계획표로 쓰라는 아빠의 자상한 배려를 보는 순간... 왜 갑자기 울음이 북받쳐 올랐을까. (청소년 개발원 근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