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남편의 입술 쪽지 - 김옥자
"따르릉!"
자명종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리고 부엌으로 가서 쌀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여는데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종이에 쓰인 글을 읽기 위해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을 부볐다.
<사랑하는 옥이! 가난한 내게 시집와서 고생이 많구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오. 결혼 전에 당신을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을 꼭 지키리다. 그리고 번거롭지만 내일부터 도시락을 좀 싸주시오. 식당 밥을 도저히 먹기가 싫소.>
아니, 진작 말을 하지! 반찬은 없지만 갓 시집온 새댁의 음식 솜씨가 엉망이라는 소리는 듣기가 싫었다. 나는 당장 가게에 달려가 계란과 멸치를 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내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계란찜과 멸치볶음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멸치를 손질한 다음 갖은양념에다 붉은 고추, 풋고추, 깨소금을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설탕을 넣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처음 싸보는 도시락인데 남편은 물론 남편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 쌀집으로 달려가서 팥을 샀다. 언젠가 책에서 본 것을 나도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시간은 가는데 팥이 빨리 익지를 않았다. 다행히 그이 친구가 선물한 가스 레인지 덕택에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난 네모난 도시락에 흰 쌀밥을 담고 빨간 팥으로 하트 모양을 새겼다. 그래도 허전한 느낌. 그때 계란찜에 넣었던 깨가 눈에 띄었다. 난 까만 깨로 빨간 하트 안에 작고 까만 하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어. 그의 사랑을 훔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던 날, 하루가 지리하도록 길게만 느껴졌다.
"띵동 띵동!"
힘차게 울리는 벨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다. 감격한 모습의 그를 기대하며 달려나간 내게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얼굴로 도시락 가방을 내 손에 넘겨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간 섭섭하고도 분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방을 들여다보니 잠이 들었는지 남편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까짓 도시락 한 번 싸준 게 뭐 그리 대단하다구'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빈 도시락을 꺼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쪽지를 폈다. 쪽지를 펴는 순간 웬 입술 자국이? 쪽지에는 빨간색 입술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옆에는 눈에 낯익은 남편의 글씨.
<나의 사랑 옥이에게 보낸다.>
그 순간 벅차 오르는 감동에 난 소리 내어 엉엉 울었고, 놀란 남편이 잠에서 깨어 달려나왔다. 남편은 덜 지워진 입술의 루주 자국을 문지르며 쑥스럽게 웃었다.
"여보, 고마워. 난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든지 덕분에 술 사고 저녁 사고..."
지금도 빨간 루주를 사와 화장실에서 종이에다 입술 자국을 찍고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면 웃음과 눈물이 한꺼번에 난다. 도시락을 다섯 개씩이나 싸는 요즘, 깜빡하고 큰애한테 빈 도시락을 넣어서 까마귀 고기라는 별명이 붙은 나에게 그이는 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할까? (미용실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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