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산 너머로 가는 길 - 유행두
어머니, 당신을 불러 본 지도 벌써 12년이나 지났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육남매를 귀까지 어두운,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맡기신 채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 버리셨지요. 불과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로. 하지만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신 어머니의 모습은 할머니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살투성이였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했기에 언제나 학교 공납금을 꼴찌로 내는 학생은 저였고, 여름 방학을 열흘 앞둔 제헌절 날 저는 어머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긴 편지를 남기고 옷가지를 챙겨 가출을 하고 말았지요. 곧 발각돼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제게 어머니께선 조용히 왜 학교에 안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제 입에서는 돈 얘기가 줄줄 나와 버렸지요. 어머니의 쓰린 마음을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한 채. 그때 어머니께선 눈물을 훔치시며 보리 매상한 돈으로 학교 공납금도 실습비도 다 주신다고 하셨지만 전 고집을 부렸지요. 일주일 동안을 10리 길 학교 앞까지 가방을 들어 주시며 저를 달래고 또 달래고......
방학을 하루 앞둔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 당신께선 마루에 누워 계셨습니다. 보리 매상을 했더니 피곤하다며 제게 머리 비듬을 죽여 달라 하셨지요. 싫다고 짜증 부리는 제게 어머니께서는 두 번 다시 이런 부탁하지 않겠다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달라고 그러셨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어머니의 비듬이 더러워 투덜대며 성의 없이 비듬을 죽이고서는 저녁밥을 먹고 교회당으로 공부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왠지 집에 오기가 싫어 친구 집에서 시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남아 있는데 누가 절 찾아왔더군요. 우리 옆집에 사는 한 살 위인 오빠였습니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일부러 산을 넘어 찾아온 것이 이상해 저는 서둘러 따라 나섰습니다. 친구 집을 나서며 엄마가 많이 아프냐는 저의 물음에 옆집 오빠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골목에 들어서자 우리 집 마당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머니는 꼼짝도 않고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웃 동네에서 오신 약국 사람은 뇌출혈이라면서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 근심거리가 있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에 그런 일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갓집으로 뛰어가 외삼촌과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옆집 오빠에게서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 염을 준비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의 때묻은 지갑 속에는 제 공납금이 시커먼 고무줄에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지난 장날 외숙모 몰래 외할머니께서 주신 쌀 포대는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고, 몇 번 입지도 않은 좋은 옷들이 옷장 속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상여가 떠나갈 때 언니들은 어머니의 상여를 끌어안고 목이 쉬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나 전 얼마 울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상여를 에워싼 찬송가 가사처럼 어머니는 며칠 후 꼭 살아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일부러 죽은 척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빨래를 널고 계시는 어머니를 그려 보기도 하고 마루를 닦고 계시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습니다. 가을 추수 때 어머니께서 뿌려 놓으신 곡식들이 얼마나 풍성히 열매 맺었는지, 일요일마다 언니들이 그 곡식들을 거두러 시골로 내려왔지만 어머니께서 혼자 하셨던 그 많은 곡식들을 다 거두지도 못하고 겨울이 왔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혼자 산속에 모셔 둔 채 우리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며 절대 내 아이들에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돈을 쪼개 쓸 때면 자식들에게 돈이 없어 사주고 싶은 걸 사주지 못하신 어머니의 쓰린 마음을 십 분의 일쯤은 알 것 같습니다.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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