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홍결 - 그녀들은 예뻣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였나보다 지느러미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물속을 그렇게 유영하다가 낯선 바위틈에 몸을 누이고 뻐끔뻐끔 소리없이 세상을 부르네. 아가미 사이로 물방울들 내 뿜을 때마다 그 속에 갇히는 몸뚱아리 바라보며 그렇게 화석으로 굳어버린 물고기였나보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로 살아 깊은 잠, 깊은 어둠을 열고 이른 새벽 이슬처럼, 때론 안개처럼 슬며시 깨어나는구나. 지느러미 가득 세상을 품고 비늘에 부딪히는 아픔으로 흐느적거리며 취해가는 길, 취한 세상 속을 향하여 화덕 위의 뜨거운 불길에 온몸을 퍼득거리는구나
- 시 "길, 그렇게 살아가는구나"전문
그녀들은 예뻤다. 그렇다. 내 첫사랑은 복수였다. 첫사랑의 당혹감은 언제나 내 사랑을 늪에 빠뜨렸고, 그렇게 나의 사랑은 운명지워졌는지 모른다. 아마 철 지난 가을이었을 것이다. 이화여고 강당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공연을 단체로 관람하고 버스를 탔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만 음악감상실 구석에서 상념에 빠지며 시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 왠지 어색한 감정으로 일단의 여고생들 틈에 끼여 콩나물 시루처럼 버스에 뒤얽혔다. 얄궂은 설렘과 비릿한 냄새들, 그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그 틈바구니에서 무심결에 가방을 맡기고 이리저리 밀리며 봉긋하게 솟은 어느 여학생의 가슴을 느끼며 몇 정거장을 지나 한꺼번에 우리 남학생들이 내릴 때였다. 그때는 만원버스일 경우 창문으로 가방을 내려줄 때였으니까. 버스에 내려 가방을 건네받고 차는 출발하고, 우째 이런일이, 내 가방대신 남은 가방은 붉은 여학생 가방이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열고 확인할 수 밖에. 여학생의 가방을 열어보는 그 야릇한 감정이란. 무어랄까, 떨림보다는 황홀한 들킴이랄까. 가방속은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노트 몇 권, 도시락과 수건, 필기구와 한켠에 손수건에 말려져 있던 생리대. (이때의 추억이랄까 상처랄까 이후로 나는 생리대만 보면 자유를 휴대케 하는 성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수첩을 보았다. 그리고 연락,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하고 근처 제과점에서 나는 여학생 가방을 들고 그녀는 남학생 가방을 들고 우리는 그렇게 가방을 교환하기 위하여 만났다. 만남은 늘 그렇게 예측도 없이 예고편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시를 좋아하나 봐요." 그랬다. 당시 치기어린 문학소년의 가방에야 시집 몇 권과 책들뿐.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만났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작은 우산을 받쳐쓰며 빗물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던 날 왜 그리 가슴은 콩당거리는지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다시 쓰면서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하던 날들. 첫눈이 내리던 날, 수천 수만의 하얀 나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첫눈이 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만났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려 손을 맞잡고 구석으로 구석으로 사람들을 피해 우리들의 은밀한 공간을 찾아 배회했다. 문득 사랑의 공간을 찾아 헤매던 전후 독일의 연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내 청춘의 상상력은 그렇게 자라났다. 어둠에 쌓인 공원의 미끄럼틀 밑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그러다가 포옹과 짧았던 입맞춤. 입맞춤만으로도 세상은 그토록 눈부시게 나를 눈뜨게 했고, 그녀의 머리칼 위로 떨어지던 순백의 눈송이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사랑은 그 눈송이가 녹듯이 두 사란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어갔다.
추송웅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사보이 호텔 골목으로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돌아오던 겨울밤이었다. 열연하던 추송웅의 떨림을 가슴에 품고 걸어오던 밤길, 저며오는 기쁨에 쭈뼛거렸던 것은 비극을 향한 예감이었을까. 불현 듯 극장 입구에서 엄마의 치마끝자락을 잡고 칭얼대던 작은 계집아이(지금은 배우가 된 추상미이다.)와 봉숭아물을 들인 엄지발가락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렇다. 내 '복수의 첫사랑'은 그렇게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의 한켠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녀가 교복을 입고 다소곳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가방을 앞으로 모은 채 얼굴을 한쪽으로 향한 채 서있는 여학생의 모습. 아,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이제 중년의 나이에 서성이면서도 그런 정경과 마주칠 때면 술이 깬다. 아무튼 나는 그때 놀래켜줄 요량으로 슬쩍 뒤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세차게 감싸 안았다. 그런데 철썩, 불시에 따귀를 얻어맞은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할밖에. 더불어 경솔한 나의 행동이여! 그녀는 분명히 나의 첫사랑, 그리고 지난 몇 달간 나를 지탱해준 소영이였다.
"소영아, 나라구." "어머, 저는 미영이예요. 그런데 우리 언니를 어떻게 알아요?" "언니라니요?" "소영이는 내 쌍둥이 언니거든요." "뭐라구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당혹스러움으로 나는 미영이와 만났다. 밤길을 걸으며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그랬다. 어쨌든 나는 그녀와 똑같은 육체와 입맞춤까지 한 사이가 아니던가. 쌍둥이지만 미영이는 소영이보다 더 쾌활하고 재치가 있었다. 소영이가 수줍게 핀 패랭이꽃이라면 미영이는 코스모스 같았다. 그날밤, 명동성당 앞 언덕길을 몇 번이나 되풀이 오갔던가. 오랜 기다림의 만남처럼 우리는 그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비밀 하나를 만들었다.
"소영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일요일에 만나요."
성북역 대합실로 향하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자꾸 흘러내리는 배낭을 추스렸다. '처제와의 사랑'이랄까. 그런 상념으로 미영이와 나는 경춘선 열차에 올랐고, 객차 사이에서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부르고 어느 틈엔가 손을 맞잡고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사랑이 깊어갔다. 우리는 오랜 연인처럼 산을 올랐다. 함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면서 사랑은 그렇게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아니 같이 살기 위한 또는 같이 사는 것처럼 흉내내는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하고 느꼈다. 소주를 한 잔 마신 탓이었을까. 우리는 서로가 용기를 내어 나뭇등걸에 기대어 포옹을 하고, 길고 긴 입맞춤으로 서로의 만남이 불륜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었노라고 스스로에게 강변했다. 팔장을 끼고 걸어오면서 어깨 가득 쏟아지던 그녀 젖가슴의 체온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쌍둥이와의 사랑. 그 은밀한 날카로움의 끝에 서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었다. 몰래 훔쳐피는 담배처럼 두근거리는 떨림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방황해야 했다. 그리고 소영이에게는 '롯데', 미영이에게는 '테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 갈등의 바다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봐야 했고, 나누었던 말들과 약속들을 일기장에 적어가며 지속했던 만남은 운명처럼 짜릿했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예견되었던 파국, 나의 아련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었던 사랑의 넘침 때문이었을까. 전화를 걸 때에도 변성의 목소리를 사용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도 소영이에게는 펜으로 미영이에게는 타자로 쳐서 보내야 했고, 무엇 하나 작은 선물을 할 때에도 거의 비슷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소영이는 미영이에게 "내 남자친구 하고 니 남자친구는 취향이 비슷한가 봐. 그래서 우린 쌍둥이인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던 나날들 중 다음 해 겨울, 무려 1년이 넘는 줄타기 사랑의 끝은 미영이가 다니던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였다. 미영이의 권유로 나가던 교회. 철길 건너 언덕 위에 솟아오른 그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고등부 연극의 무대가 올랐다. 그랬다. 한편의 연극처럼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났다. 그야말로 연애를 하기 위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시간마다 곤혹스러웠던 나는 크리스마스 행사에 그 동안의 죄를 사하고자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하느님께 죄를 빌었다. '우리 구주의 힘과 주의 위로를 빌라.' 늘 이 소리를 읊조리며 어설픈 연극을 준비하고 드디어 막은 올랐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니 평생토록 (미영이의 교회 다니기 10여년 동안) 교회에 관심도 없던 소영이가 입시가 끝난 해방감과 그 지겹게도 많았던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작은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키우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을까. 소영이가 쌍둥이 언니의 무대출연을 축하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팸플릿과 교회 여기저기 붙어 있던 포스터에 박혀 있던 내 이름을 보았다. 그랬을 것이니 그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교회 한켠에 앉아 눈물로 그 연극을 보았을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으로 불행했던 아픔을 감싸려 했을 것이고 언니와 나를 용서해 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내가 미영이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다른 배우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연적들이 다정하게 맞잡은 손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격해졌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모두가 주의 찬양을 외치던 밤에 가출을 했다. 작은 메모를 남긴 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잊으려 합니다. 한때는 방금 전까지 사랑했던 사람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해야 할 미영에게' '그 여자는 이 한 마디 남겨두고 떠나갔다네, 무기들아 잘 있으라'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는 머리를 깍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싶었을까. 그녀가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친구에게 알렸고, 발칵 뒤집힌 그녀 부모의 집요한 탐문 끝에 그녀는 다시 집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대로 법당에서 의식으로 치르지 못했으나, 그녀의 완고한 아버지에 의해 머리를 잘렸다. 그랬다. 그 잘린 머리카락들처럼 우리들의 첫사랑은 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그날 밤 미영이는 나와의 짧은 통화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장난으로 시작했던 만남이 너무 큰 아픔이 되었어요.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소영이를 쳐다볼 수 조차 없어요."
그래 나 역시 어찌 더 만날 용기가 남아 있으리. 하지만 머리를 잘린 채 무너진 억장을 추스리고 있을 소영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진정코 내게는 사랑이었노라고. 다만 줄타기에 흔들렸던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그리고 언제 까지나 그 상처가 아물고 그래서 다시 나에 대한 사랑이 거듭날 수 있다면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진정이었다. 사랑의 경험이 없는 첫사랑의 실수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날을 기다리던 끝에 나는 소영이와 만났다. 그 제과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어색하게 물잔을 바라보며 곰보빵의 우둘투둘한 표면이 달이 아닐까, 저 달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렇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소영이를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나는 환영처럼 미영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에서 흔들리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이별의 말도 위로의 말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와 다시 실연의 아픔이야 있겠냐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그렇다. 이제 그녀들은 내 취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그렇게 남아 있다. 음치인 내가 최백호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들과 걸었던 길들, 그리고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그녀들의 입술 속에 나는 취한 몸을 이끌고 걸어간다. 그래서 언제나 내 사랑은 항상 흔들렸다.
홍결 - 196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학과를 다녔으며 '보는 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의 혁명'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