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끝별 - 나는 그때 사랑 밖에 있었다, 텅 빈 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과 춘백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꾳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 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쯤 나를 비껴 서 있었던 것만 같던 당신 무릎과 내 겨드랑이가 이제사 둥그렇게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건만 두 가슴을 묻는 일이야 만장처럼 사라져가는 당신의 내 풀자국으로 인해 내 사난할 것입니다 모란 내음 선명한 하마 흔하디 흔한 세상 한 봄밤으로 인해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 시 "강진 편지" 전문
사랑은 욕망이고 욕망의 특이함이고 이미지이고 매혹이고 하나이고 선택이고 도취이고 흔들림이고 피로이고 실패이고 반복이다. 사랑은 욕망이 특별히 집착하는 그곳을 가리키고 싶어하지만 그곳은 결코 가리켜질 수 없다. 사랑은 잠시 스쳐갈 뿐 만져볼 수도 다시 돌이킬 수도 없다. 사랑은 언제나 불확실하고도 미완성인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늘 사랑 밖에 있었다. 내 사랑은 내가 없는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지나가버린 사랑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것도 첫사랑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나는 첫사랑의 푯대를 어디에다 꽂아야 할지부터 망설인다. 그러나 나는 짐작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열병과 함께 꿈꾸었던 그 그를 향한 열망이 표적이 될것임을. q년 반 동안 나는 그를 욕망했고, 꿈꾸었고, 그리고 고백했다. 그러나 고백하는 순간 나는 텅 비어버렸고 내 사랑은 사라져버렸다. 대학에 입학해 문학에 대한 막연한 느낌으로 가입했던 문학회는 내 생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허름한 중국집 뒷방에서 술과 담배, 젓가락 장단과 운동가로 치뤄졌던 신입생 환영회는 충격과 부정과 눈물과 일탈의 연속이었던 대학생활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그를 처음 만난건 1학년초, 3개대 연합 시합평회를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 또한 타 대학의 신입생이었다. 큰 키에 적당한 체격, 하얀 얼굴의 첫인상은 상큼하고 또 풋풋했다. 그후 3개대의 공식 만남에서마다 그를 보았다. 그 과정에서 외모보다는,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나 '북한강에서'를 불러제끼는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노래솜씨, '돌무덤'을 비롯해 간신히 보여주었던 신입생답지 않게 꽤 무르익었던 시 작품들, 그리고 대화중에 언뜻언뜻 내비치던 시적 감수성과 사회과학적 인식 등은 내게 부족한 부분들이었기에 더욱 커보였다.
그는 유난히 하얀색과 청색 티셔츠가 어울린다. 그의 웃음소리는 장난스럽게 끽끽거린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 공식적인 발언을 할 때는 의젓하고 당당하다. 깍듯한 예의와 분명한 태도, 빈틈없는 견고함이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한다. 정갈하면서도 은은하고 싫증나지 않는, 소담한 소국 같은 사내, 그는 붉은 자줏빛과 청색이다. 그러나 깊이 있게 아니 오붓하게라도 그와 말문을 터볼 기회는 좀체로 주어지지 않았고 그 에 대한 감정은 내 일기 속에서만 무르익어 갔다. 그 느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도, 잊고 지낼 만큼 밋밋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애틋하게고 질긴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고 문득문득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훌쩍 가을이 되었고 드디어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사건'이 터졌다. 그가 속한 대학의 행사가 있던 날, 나를 비롯해 몇 명이 축하해주러 쫑파티에 참석했고, 많이들 마셨고, 또 많이 늦었다. 문제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줄 기사로 그가 간택된 것이다. 12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오기는 왔지만 실상은 바래다줘야 할 사람은 그였다. 억병으로 취한 그의 귀가가 걱정이 되었으나 골목에 그를 버려둔 채 집으로 들어왔다. 세수를 하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골목을 나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쓰레기통(당시는 집집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들 갖고 있었다.)에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었다. 할 수 없이 한 살 위인 막내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빠는 그를 깨워 자기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튼날 아침 오빠 후배로 알고 차려주는 밥상을 함께 받았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전날 마시던 술집에 내 소지품을 놓고온 탓에 우리 둘은 다시 택시를 타고 그의 학교로 향했다. 술집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오전 내내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도 이 모든 상황에 당황해 있었고 다소 들떠 있었다. 그는 연신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봐"라고 중얼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내 안에 훨씬 더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 또한 가끔 보는 공식모임에서 종친 혹은 친척(우리는 동성동본이었다!)이라고 내 어깨를 치며 친근함을 내보였다. 그가 내 안에 깊게 자리잡으면 잡을수록 나는, 내 사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고민하게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감추고 묻어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했다. 그 욕망, 그 애잔함, 그 안타까움은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잦은 몽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충족되지 않은 체로 늘 비어 있기만 하는 그에 대한 내 사랑을 환상함으로써 나는 그를 비현실화시키고 있었고 이미지화시키고 있었다. 그 사랑은 도취적이었고 환영처럼 떠돌 뿐이었다. 이 비가 나를 깨우듯, 내 마음의 비가 그의 창가를 두드려 그를 깨울 수 있었으면 한다. 다른 일들을 생각할 수 없다. 온종일 그의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내 그만을 생각하기를 지루해 하지 않는다. 나의 허상 혹은 실체일 수도 있는 이 숱한 잔영들, 현기증들. 모든 사랑의 플롯은 욕망, 상상, 고백으로 짜여져 있다. 드디어 고백의 기회가 왔다. 겨울 방학이 다가왔고 3개대 시낭송회 준비를 위한 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그도 나도 각각 회장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백마(지금의 일산)의 한 카페였다. 나, 총무였던 내 동료, 그, 또 다른 대학의 회장 A,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사건의 발단을 마련해준 건 A였다. A는 이미 그가 속한 대학의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 입상을 한 터였고 그 기세로 그는 벌써 소설가 였고 벌써 투사였다. 저돌적인 관심의 메시지를 내게 몇 차례 퍼부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 반응은 냉담했었다. 만나자마자 A는 들이붓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횡설수설했고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유행했던 ' 지식인'과 '지식인기사"라는 개념을 빌어, 내 문학적 운동성에 대해 지식인 기사로서의 한계를 공격했던 것 같다. 함께했던 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앞이라 나는 더욱 화가 났고 급기야 A의 얼굴에 술을 끼얹고 자리를 일어서버렸다.
백마역에 도착하니 신촌행 기차가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합실 의자에서 불쾌한 감정을 삭이고 있자니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함께 기차를 탔고, 화물칸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덜컹거리는 화물칸에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초저녁의 기찻길은 너무 고적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 걸까. 나는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을 발설하고 말았다. 아니 들켜버렸다. 이에 용기를 얻었던 것이었을까. 신촌역에 내리자 그가 먼저 술도 깰 겸 차 한 잔 하고 가자고 제안했고 이번에는 그가 나를 향해 진지하게 고백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바래다준 날부터다, 네 긴 머리칼을 만지고 싶었다, 이젠 내가 먼저 전화할 거다, 네가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훨씬 크고 깊다. 1985년 1월 13일이었고, 일요일이었다. 그날의 모든 것들은 늘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의 표정과 말투, 옷매무새, 지금은 없어졌지만 레스토랑의 이름과 자리, 소파의 색깔, 배경음악, 그때 마셨던 커피 맛과 향기. 그리고 우리는 보다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동인천의 자유공원, 삼청공원과 춘천 등지를 걸으면서 강창민(그도 동성동본인 강경화 시인과 결혼했다.)의 '손 내밀어 서로를 쥐면 '칡넝쿨에 매달린 겨울 풀잎처럼' 우리는 서로의 손아귀에서 함께 부수러진다'라는 시구절을 가슴에 되새기곤 했다. 한 행씩 서로 번갈아가며 시 비슷한 낙서를 하기도 하고, 그의 생일을 맞아 꽃과 카드, 뭔가를(책이었을까 만년필이었을까 라이터이었을까) 선물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대 후문에서 만나 맥주와 커피를 마시고 나오니 눈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연대 동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연대 청송대쯤 이르렀을 때 쌓인 눈에 내가 넘어질 뻔 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전인미답의 백설은 온통 환하기만 했다.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눈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나는 이효석의 메밀꽃밭과 달빛을 생각했다. 또 한번은 그가 자신의 어떤 모습이 가장 좋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꼬고 앉은 긴 다리위에 팔꿈치를 놓고 긴 손가락 안에 작은 문고판을 감싸듯 쥐고 읽으면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많이 실망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자신이 죽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대화는 불길한 예시와도 같았다.
그를 만났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 단지 보이는 것의 거리만으로 가까워지기를 원했었는지. 그가 멀게 느껴지면 내가 다가서려 하고 그가 가까이 오면 나는 밀쳐내고 물러서고. 그와의 만남이 습관화되는 건 아닐까. 사랑이란 딱 들어맞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하거나 지나치다. 제때에 공급되지 않는 결핍이거나 제때에 소비되지 않는 과잉인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먼저 그를 요망했고 그 욕망을 먼저 발설했다는 사실은 내게 묘한 열패감으로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고, 그 확인으로 나의 오랜 사랑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서 나는 그를 놓쳐버리고 있었다. 간섭하며 침번하고 , 조르고 협박하고, 의심하는 내가 있었다. 사랑에도 자질이 있다면 겁 많고, 자존심 세고, 의심 많고, 앞서 생각하는 내 천성은 사랑과는 멀리 있을 터였다. 나는 회의했다. 그 긴 시간동안 그의 첫인상은, 술과 담배와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죄악시되던 대학문화의 풍토 속에서 꺼칠해 있었으며,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이라는 당면과제 앞에서 수척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을 뿐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불확실하다는 것에 갈급해했고,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당신이 언제나 피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까워지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들 흩뿌리는 밤비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휘번뜩이는 거리를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소곡' 내가 썼던 것인지 누군가의 시를 옮겨놓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이 시는, 내 사랑의 결별을 예고하고 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의 출발점에서 내가 매혹되었던 환상과 이미지의 장례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든 연인들처럼,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해야 하고 걱정을 해야 하고 질투를 해야 하고 의심을 해야 하고 욕구불만을 느끼면서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사랑의 상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었을 뿐이며 그는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칼을 들이민 것도 나였다. 그만 만나자는 말에 그는 어이없어 했다. 너이기 때문에, 지금의 너보다 그렇게 오래 꿈꾸던 네가 더욱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이유였다. 그는,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의지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라고 응수하며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고집 센 당나귀와 같았다. 1985년 6월 23일 이었고, 역시 일요일 이었고, 그 카페도 지금은 없다. 영원한 꿈일지도 모르는 관계에 대한 일련의 환상들,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 타협치 않음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돌아서는 법까지도 짧은 견고함! 분별 있게 헤어지고 말았구나.
그것으로 우리는 끝이 났다. 6개월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를 잃었을 때 나는 사랑을 되찾은 것 같은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분별있게 헤어진 데는 2학기 개강과 함께 그가 군에 입대하게 된 요인도 있다.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의 입대가 나 때문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것이 오비이락이었든 아니든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헌데, 그때 내가 선언한 결별은 하나의 미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했기 때문에 이기적이었고 두려웠다. 그에게 대책 없이 빠져든다는 것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도망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더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함정에 빠뜨렸고 그는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도망가 버렸다. 너무 세게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다. 그 상실의 대가로 그는 지금껏 내게,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내가 꿈꾸었던 완벽한 남자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흰색 혹은 청색의 이미지다.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디메뇨" 지그시 눈을 감고 부르던, 결기 있되 울림 좋은 서정적인 바이브레이션이다. 그는 여전히 미소년에 가깝고 여전히 상큼하고 풋풋하다.
나는 그가 모 경제신문의 기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커피숍이나 호프집 같은 데서도,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마주친 적이 없다. '닥터 지바고'나 '폴링 인 러브'와 같은 만남 혹은 해후는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아이 둘쯤은 거느린 채 중년의 가장이 되어가고 있을 그를 상상하는 일이란 잔인하되 감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나의 첫말은, 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지금도 사랑의 형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첫사랑은 특히 설익어 벌어져 버린 석류와도 같은 상처이고, 이동하고 방황하는 하나의 기표처럼 더더욱 모순투성이고 모호하기 짝이없다. 지금껏 나는 그 첫사랑의 형상을 찾아 망설이고 더듬었을 뿐이며, 결국은 이 남루한 말밖에는 주워담지 못했다. 이 텅 빈 말들밖에는.
-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시가 당선되었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이 있고, 시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