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서석화 -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기억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넘겨야 할 페이지의 끝자락을 말아올리며 눈물을 참는 일은 더 어렵다 구름 흐르는 소리만 추운 하늘 일몰엔 노을도 앓아 눕는데 기억 속으로의 침몰은 찬 서리 말아 하늘로 올리며 자학의 불꽃을 피운다 언제부터 내 안엔 수천 개의 화산이 있어 용암의 불줄기 살을 태우나 시간은 불길 속에서 위태로운 살풀이를 추지만 열리고 또 열렸던 내 안의 타는 골짜기 화상 입은 그리움의 다리 하나 오늘도 그대 태울 준비를 한다 기억은 자꾸만 커진다
- 시 'in my memory' 전문
첫사랑을 말하라 한다. 나에게. 코스모스와 가을하늘과 그 아래서 찰랑거리던 귀밑 2센티 단발머리를 가졌던 여고 2학년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해내라고 한다. 아아!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을 붙잡아 20년 전의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길게 화살표를 긋고 있는 지금 오래 된 일기장 속에서 그날의 나를 본다. 그 사람을 본다.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세상 여러 곳을 흐르던 물이 저마다의 삶을 마치고 끝내 귀향하는 곳, 절망조차 합쳐지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수평선을 만드는 곳, 한 방울의 물이라도 결코 밖으로는 새나가지 않는 곳, 하늘과 맞닿아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내 몸이 수증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던 곳, 내게 있어 바다란, 원시를 그리는 태아의 꿈 같은 곳이었다.
"이런 느낌 알아? 처음 본 순간 찾아오는 어떤 영감 같은 거. 눈물 맺힌 두 눈망울을 가진 단발머리 여고 2년생이 헤어나지 못할 운명으로 나를 흔들었다는 거."
그는 내게 그렇게 왔다. 요란하지 않게, 늘 두눈이 젖어 있어 울었냐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내게 그는 착한 사람이 돼주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조용히 왔다. 로망로랑이 말한 '산다는 것, 그건 아픔이고 슬픔이며 거짓이다'라는 상황에 오래 잠겨 있던 나에게 모든걸 뒤집으며 다가온 사람. 1978년 9월 23일, 차갑고 무너지고 있던 가슴에 이슬보다 맑게 솟아오르던 그 기쁨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교정에 있던 성모상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사랑. 사랑은 정갈하게 올리는 기도의 첫 번째 자리에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하늘과 땅을 덮으며 흩어지던 그 가을의 낙엽을 태우며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아세요? 하느님! 이것이 사랑이란 걸요.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 날 당일치기로 그와 함께 다녀온 겨울 바다를 우린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곤 한다. 그는 내게 첫 선물로 고운 털로 만든, 강아지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는 인형과 시를 쓰라면서 노트 한 권을 줬다. 그때 받은 강아지 인형은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한참 자랄 때까지 우리 집에서 그와 나의 긴 역사를 증명해주는 소중함으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우리 아이의 생애 첫 친구 노릇을 톡톡이 해냈다. 겨울바다에서 그는 나에게 조병화의 시 '남남'을 낭송해줬고 나는 그에게 당시 유행하던 오정선의 '님을 위한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불러줬다. 치약거품이 일어나듯 하얗게 번져나가던 파도, 손만 대면 찬물이 주르륵 쏟아져내릴 것 같던 시린 하늘 위로 갈매기가 우리들의 겨울바다 여행을 반기듯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하늘색 두꺼운 스웨터에 파란 모직 머플러를 두르고 있던 내모습을 차마 바라보기도 아까운 듯 그는 다가서지도 못한 채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우리 화야는." 그 말만 되풀이했고, 그때 나는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처음으로 정면에서 시선을 그에게 똑바로 향한 당돌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 2년 후면 어떤 여자가 될 것 같아요? 2년 후면 전 스무살 숙녀가 되는데." "2년 후의 석화 모습, 청순한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숙녀가 될 거야. 그리고 누구에겐가 큰 사랑을 받게 될 거야 아주 큰 사랑을 말이야." "그럼 다시 2년 후엔요?" "보자, 그럼 스물 둘인가? 아마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 다음 또 2년 후엔요?" "석화가 스물 네 살 때, 그래. 결혼을 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왜 그런 질문을 하고 그는 또 왜 그렇게 충실한 대답을 했을까? 그의 예언대로 난 스물 두 살에 그와 결혼을 약속했고 그리고 스물네 살 4월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서울 S대로, 나는 그대로 대구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남들이 그렇게 맺어지기 어렵다는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은 그때 겨울바다에서의 그의 예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리칠 수 있는 보통의 남학생이 아닌,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예감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흔히 말하는 '첫사랑'이라는 새콤달콤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앞으로 나의 긴 시간을 끌고 가는 그의 모습이 그를 처음 본 날,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레임과 함께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와의 만남을 숨김없이 이야기했고 대구 Y대학에 입학했다가 서울 S대학으로 가기 위해 휴학한 뒤, 서울로 재수하러 간 그가 보내준 편지도 어머니와 같이 읽으면서 지내는 동안 그는 어느새 어머니와 내겐 식구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내가 고3이 되면서 둘 다 수험생인 우리를 위해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남매를 위해 정성을 들이듯 절에서 기도를 올리셨고, 입학시험일이 가까워서는 둘 중에 한 사람만 합격해야 하는 운세라면 딸인 나보다는 그가 합격하게 해달라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도 안되는 기도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비셨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공부하던 힘든 재수기간도 내 생일날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를 보며 어머니는 그의 성실함을 믿게 되었고, 입시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걸르는 법 없이 배달되던 그의 편지 속에서 나이답지 않은 한결같은 사랑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내 딸이 고른 사람인데, 누구의 딸이라고 아무나 만나겠어?"
어머니는 그렇게 딸의 선택을 믿으셨고 우리는 어머니의 지켜보심 아래서 각자 대학생이 되었으며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입학식을 치르고 첫 주말, 서울에서 내려온 그가 S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우리 집 대문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장한 아들이라도 맞는 양 감격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나는 그의 가슴속에 빛나던 S대학 배지와 그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형편없는 대학에 들어가 오로지 오기로 달아놓은 내 가슴위의 학교배지를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같은 해에 대학생이 된 우리에게 다니는 학교란 곧 두 사람의 그 동안의 모든걸 뜻한다고 할 만큼,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표면화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여고시절 내내 꿈꿔왔던 초겨울 새벽 같은 지성을 가진 당당한 여자로서의 희망은, 허약한 건강으로 재수는 절대 안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모든 걸 포기하는 심정으로 들어간 대학에 입학한 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겉으로 드러난 내 외양만 보시고 디자이너가 되면 어울리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들어간 의상학과는 당연히 나로선 재미없는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수업 마치고 친구들이 데이트한다고 바쁠 때 나는 혼자 학교 앞 다방이나 캠퍼스 내 잔디밭에 앉아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스프링 노트에 글을 썼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평화로울 수 있었고 외롭지도 않았으며 그런 감정 속에서 나 자신이 정화되고 있음을 글 쓰는 동안은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대학시절을 거쳐 결혼 전까지 수백 통의 편지가 서울과 대구를 속달등기로 오고 갔다. 여고 졸업 때까진 어머니랑 같이 읽곤 했던 그의 편지를 대학생이 된 이후 차츰 혼자만 읽게 되었고, 그런 나를 어머니는 대견함과 딸 가진 부모로서의 조심스러움으로 지켜보셨다. 지금도 남편이랑 이 다음에 가보로 남겨주자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그때의 편지 슼랩 속엔, 봉투에 '속달등기'라는 붉은 색 도장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로 찍혀 있음을 본다. 학교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그의 사랑 안에서 차츰 치유될 수 있었으며, 그의 학교 축제나 하숙집 오픈 하우스 같은 행사 때마다 대구에까지 내려와 어머니께 허락받은 뒤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던 그의 자상한 배려는 어머니에게는 그를 만점짜리 예비 사윗감으로, 나에겐 그의 아내가 된 내 모습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초만 해도 시외전화를 걸 수 있는 공중전화는 특별히 정해진 장소 외에는 없었으므로, 그는 내게 전화하기 위해 하숙집이 있던 신림동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전화를 걸었으며, 그가 교수 연구실 조교한테 산정해서 몰래 건 전화로 "내일 오후에 전화할게" 라고 짧게 말하고 끊으면 다음날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종일 집에서 꼼짝 않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남원에는 성춘향, 대구에는 서춘향"이라고 친구들이 놀려도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주에 한 번은 나를 보러 대구에 내려오는 그를 기다렸던 세월이었다.
그 동안 그의 시골집에도 그를 따라 몇 차례 인사를 다녀온 우리는 누가 보기에도 결혼이 약속된 연인이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은 탓이었는지 긴 연애기간 동안 흔히 겪게 된다는 권태도 우리에겐 남의 일이었으며 그는 부족한 나의 학벌대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문학에 대한 꿈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정성과 지조라면 하버드대학이라도 갈 수 있으며 신춘문예도 통과할 수 있다고, 출신대학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의 전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는 될 수 없다고 나의 숨은 능력을 캐내어 주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그 당시 오고간 편지를 보면 우리의 미래엔 원고지와 책이 가득한 방이 꼭 있었다. 그가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 나만의 글 쓰는 방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와 만난 지 꼭 20년째되는 오늘, 1998년 9월 23일을 맞는 새벽에 그가 만들어준 나의 글 쓰는 방에서 '첫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사랑이란 반추하는 데 그 값짐이 매겨진다고 할 수 있다. 반추하고 싶지 않은 사랑은 먼 훗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려질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아무리 다른 기억들과 섞어놓아도 부르면 제일 먼저 달려나오는 게 사랑의 기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숨차면서도 나직한 두 개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더욱이 '첫사랑을 말하라'하는 지금 첫사랑과 결혼하여 15년째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슴 저미는 헤어짐을 말할 나직한 목소리는 갖지 못했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새하얀 교복 칼라의 여고 2년생으로 돌아가는 길만으로도 숨이 차 글을 쓰는 내내 가슴에선 기적소리가 울렸다.
다시 20년이 흘러 어떤이가 내게 '마지막 사랑'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운명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슬까? 시간은 나를 어디에 붙들어 놓을까? 헤르만 헤세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즐기는 힘과 기억하는 힘은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늘 설레일 수 있는 즐거움이 생을 풍요롭게 하고 귀하게 한다는데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라.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황금빛의 후광은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미세한 울림에도 상대의 기척을 감지해내는 초고속 레이다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24시간 맹렬하게 작동하는 행복한 불면의 밤에 그는 초대받은 손님인 것이다. 첫사랑이란 태어나서 처음 느낀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그 의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덜 자란 여자아이의 속살처럼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애매한 기호 같은 것, 천진성이 내포된 마알간 시냇물 같은 투명한 시절에 찾아온 설레임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자아가 그리는 첫 그림인 것이다.
나는 첫사랑과 살고 있다. 때문에 이루지 못한 첫사랑처럼 먼 옛날 사랑에 대한 동경이나 아련한 그리움 같은 건 간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별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실체를 다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다. 완전한 사랑이란 이별까지도 포함된 것이라는 말에 공연히 주눅들 때도 많다. 하지만 나를 보듯 들여다볼 수 있는, 그래서 참 오래 된 친구 같은 첫사랑과의 결혼생활은 많은 느낌의 공유라는 정신적 안정을 주고 있다. 어쩌다 마음이 비어 쓸쓸한 날, 오래된 사랑 하나 불러보고 싶은 날, 나는 남편에게 공연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우리가 만약에 헤어졌다면 절절하게 그리운 이름을 갖게 됐을 텐데 난 이게 뭐야? 열여덟 살 때 만난 남자와 지금껏 살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알아?" "아직도 내가 병적으로 좋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일기장 보여줘요?" "무기야 무기. 당신 일기장은."
1981년 4월 12일 햇빛 조금, 구름 많이, 바람 살살. 흐느적거린다. 전신에 기운이 없다. 차라리 죽어버렸음 하고 느낄만치 지금 난 아프다. 바다가 왔다. 낮에 학교에서 우리집으로 전화했을 때 엄마로부터 내가 아프다는 말씀을 듣고 그는 내게로 암표를 끊어 달려온 것이다.
"난 말야. 석화를 너무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애." "그럼 안 되는데? 병이 나으면 안 좋아할 것 아녜요?" "그럼 건강적으로 좋아해." "치, 그런 게 어딨어?"
아!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이토록 내게 따스한 빛으로만 몰려오는가? 첫사랑이란 내게는 환상이 아니다. 목메이게 부르고 싶은 이름도 아니다.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 거리를 헤메이게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다. '바다'라고 호명했던 20년 전의 그날부터.
- 서석화 1961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92년 '현대시사상' 신인상에 '수평선의 울음'외 8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아침'이 있고, 산문집으로 '죄가 아닌 사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