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하재봉 - 단풍잎 속에는 내 피가 들어 있다
나는 피가 없다
밤이 되면 내 피는 모두 어디로 가는가 가슴을 쓰러내리면 하얀 버즘
마르고 마른 눈물, 별이 뜨고
저녁과 함께 나는 가고 싶다 너의 금 간 벽, 파랗게 떠는 돌들의 이마 내 몸을 빠져나가는 눈부신
빛이, 나무의 끝에 닿는 순간 나의 세계는 변화할 것이다. 어쩌다 무덤 위로 차가운 태양이 솟구치고 다시 또 몇몇 사람은 누울 자리 찾아 땅 밑으로 내려갈 것이지만 빛의 허리를 부여잡고
그래, 울지 말자 꽃다운 내 나이 봄이 오고 있으니
죽어도, 너의 문 앞에서 죽자
- 시 ' 빈혈' 전문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운전하다 보면 트렁크 뒤쪽에 캐나다 국기가 인쇄된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있다. 붉은 단풍잎이 들어 있는 캐나다 국기를 볼 때마다, 어쩌면 그 단풍잎 속에 내 핏방울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불교예요?"
내가 그녀에게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개의 혓바닥이 아스팔트에 닿을 것처럼 축 늘어진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 생일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나는, 방학중이었지만 고3 이었기 때문에 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날 나는 우체국에서 생일축하 전보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너무 더웠다. 팥빙수를 먹기 위해 들어간 간이음식점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명이 앉아 있었다. 팥빙수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들을 훔쳐보았다. 배지를 보니까 2학년이었다. 내 귀는 예민하게 움직여서 그녀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채집하고 있었다. 두달 전 있었던 여학교 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통 있는 그 여학교 축제는 유명했다. 전교생이 각 반 별로 세계 각국의 민속의상을 입고 춤추며 그 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일종의 가장무도회였는데, 모든 남학생들이 가보고 싶어했지만 그곳은 금남의 구역이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었다. 두 달 전, 나와 내 단짝 악동은, 그 페스티벌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날, 승복과 삿갓과 고무신을 구해서 스님으로 가장을 했다. 학교 정문에는 훈육주임 선생님이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를 수상하게 생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학생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춤구는 것을 삿갓 아래로 즐겁게 바라보았다. 천막 아래 차려놓은 음식들도 집어 먹었고, 세계 각국의 민속생활을 소개 한 전시관도 훑어보았다. 우리가 가장 즐거워했던 것은 금남의 구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여학생들을 가까이서 마음놓고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70년대였다. 남녀 학생들의 만남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여학생들의 하얀 종아리만 봐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시간도 안되어서 쫓겨나야만 했다. 학교를 순찰하던 훈육주임 선생님 눈에 발각되어 삿갓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용담은 다음날 학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장황하게 우리가 본 것들을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남학생 두 명이 스님으로 변장해서 들어왔었잖아. 룸비니에서 그 남학교로 정식으로 항의를 했대."
그녀들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룸비니'가 불교학생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학교에 항의를 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팥빙수 집을 나가는 그녀들을 뒤따라갔다. 집도 같은 방향이었다. 학교 앞 큰길에서 두 여학생은 갈라져서 따로따로 걸어갔다. 나는 그중 눈여겨본 한 여학생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물었다.
"불교예요?"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가 그날 페스티벌에서 승복을 입고 들어간 학생이라고 자수를 했다. 그녀는 나에게 광명을 찾아주었다. 친구들이 대입시험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막바지 총정리를 하던 그 무렵,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잘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녀였으며,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책만 들고 다니는 친구들을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의종교는 시였다.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의 근원은 그녀였다. 그녀는 나에게 무수히 많은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며, 내 영혼의 동굴에 피리를 불어주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쓴 시들을 읽어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대입 본고사 한 달 전부터 서울로 올라가서, 독서실에서 합숙하며 시험준비를 할 때도, 나는 시험 이틀 전까지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던 것이다. 결국 나는, 전기 입시에 실패했다. 1,2교시 시험은 괜찮게 보았었다. 이런 페이스라면 충분히 합격할 것 같았다. 그런데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지원했던 과의 수험생 중에 그녀와 이름이 같은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그 때부터 시험 도중에 자꾸만 그녀가 생각났다. 정신은 혼란스러워졌다. 시험보러 올라 올 때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가 숨쉬는 것은 그녀가 숨쉬다 남은 공기였으며, 내가 바라본 태양은 그녀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태양이었다. 후기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그 도시로 내려갔다. 그녀는 겨울 방학중이었고, 곧 고3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곧 바로 전화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님은 교육자이셨고, 매우 엄 한 분이셨다. 남학생이 전화를 해서 그녀를 찾으면 큰일나는 것이다. 대신, 그 여름날 팥빙수집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단짝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그녀에게 연락이 되곤 했다. 나는 약속장소로 나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돌체'라는 음악 다방이었다. 생맥주와 청바지와 통기타의 청년문화가 꽃피던 시절이기도 했다. '돌체다방'은 동굴 내부처럼 인공암벽이 만들어져 있고, 암벽사이로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 있으며 담배연기가 홀 안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구석에 그녀와 그녀 친구, 그리고 모르는 여자가 두 사람 더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 두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멈칫거리며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그 여자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보다는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 미리의 언니되는 사람인데, 잠깐 같이 가줘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나는 조금 저항을 했다. 그러자 그녀 언니는 얼굴이 변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책임을 져야지 타요."
택시 문이 열리자, 그녀의 언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먼저 안쪽에 탔다. 그리고는 나보고 타라고 했다. 내가 그 옆에 앉자, 그녀의 언니가 내 옆에 탔다. 즉, 나는 택시 뒷자리에서 두 여자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거죠?" "우리집에요.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택시가 멈추고 그녀의 언니가 먼저 내렸다. 언니는 내리면서 내 한쪽 팔을 꼭 끼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아날 수도 없었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렸던 것이다. 차 안에서 나는, 내가 책임질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키스만 한 여자의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면, 모든 연인들이 키스를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평생 책임지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풋사랑이 아니라, 떨리는 가슴으로 데이트 신청을 해서, 같이 포도밭에도 가고, 시와 예술, 종교를 이야기했으며, 슬쩍 스치는 손등의 감촉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눈을 뜨던,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우린 아직 18,17 세였다. 온갖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그녀의 집 정원으로 내가 들어갔을 때, 모두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청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그녀의 부모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편히 앉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감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가 없었다. 내 가족사항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 아버님도 중.고교 교장회의 같은 데서 서로 얼굴은 마주치는 사이였다.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휠씬 더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님은 사과를 깎아 쟁반에 담아오셨다. 겨울이었지만, 내 등에서는 축축 하게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학생이니까 공부하는 데 열중해야 하므로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라는 말씀이 최종적으로 떨어졌다. 나는 대답하지 앉았다.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그녀와는 연락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나를 택시에 태워 납치해 갔던 여자들은, 그녀의 언니와 올케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접선 시간과 장소를 언니에게 들킨 것은, 순전히 친구의 잘못이었다. 어젯밤, 친구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 나를 만나는 것 잊지 않았냐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던 그녀는 잘 생각이 안 난다는 듯이, 언제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지? 묻더라는 것이 다. 그 친구는 다시 한번 시간과 장소를 말해 주었는데, 다음날 그녀의 언니가 올케와 함께 우리들의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친구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다. 세 살 터울인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식구들도 혼동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언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모른 체하면서, 우리들의 접선시간과 장소를 알아내고 급습 했던 것이다. 그녀의 언니가 나를 납치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고3이 되는 그녀를 수험공부에 전념케 하려는 것 이외에는 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최근 그녀의 집에 한밤중이나 새벽에 느닷없이 괴전화가 걸려온다는 것이다. 수화를 들면 아무 말도 안하거나, 아니면 곧바로 끊어버린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나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언니는 범인이 나일 것이라고 단정을 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전화를 하지 않았다. 후에 그녀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그 괴전화의 범인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같은 동네 남학생일 것이라는 거였다.
그 납치사건 이후 한동안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입학식 이전까지 무한대의 자유를 즐기기에 바빴다. 그녀는 집과 학교를 오고 가는 일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3월이 되면 나는 서울로 가고 그녀는 그 도시에 남는다.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했다. 1년 뒤 그녀가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지방대학을 권하고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그러나 스무 살 젊은 영혼에게는 오히려 따뜻한 것이었다. 나는 그 한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숨을 쉬었다. 그것은 노예해방과 비슷한 것이었다. 술집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술을 마시고, 디스코텍에서 춤을 춘 뒤 친구 집에서 잠을 잤다. 그때도 나의 더듬이는 항상 그녀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3이 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부보님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겨울밤, 오랜만에 우리는 만났다. 그러나 곧 말다툼을 하였고, 차가운 강바람이 부는 다리 위에서 나는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사라졌다. 나는 곧 후회했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던 그날밤, 12시 통금시간이 가까워졌지만,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방이 어느쪽인지도 휜히 알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방법들의 호루라기 소리를 피해, 나는 그녀의 집 담장에 낮게 엎드렸다. 근처에서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지만, 정원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몸 하나를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몸은 긴장되어서 땀으로 번들거렸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담을 넘었다. 날카로운 나무 모서리에 손등이 찢겨져 피가 흘러나왔다. 마당에는 나뭇잎들이 쌓여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그녀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전통 한옥구조였기 때문에 방문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그러나 차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못을 박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지고 있던 러시아 시집을 넘기다가 당시의 내 마음과 똑같은 상황을 묘사한 뚜르게네프 시인의 시를 한 장 찢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 틈으로 살며시 밀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담을 넘어, 머물고 있던 친구 집으로 돌아왔다. 통금 해제 사이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지방대에 진학했고 우리는 그 뒤에도 몇 년 동안 소식을 주고받다가 서로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우연히 그녀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국제결혼을 해서 지금은 캐나다에 살로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 뱅쿠버 교외에서 그녀는, 아직도 그 옛날의 일들을 추억하고 있을까? 단풍잎 속에는 아직도 내 핏방울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하재봉 - 중악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으며, 1991년 문에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었고, 1980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1990까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작품집으로 시집 '안개와 불','비디오/천국', '발전소' 장편소설 '콜랙트 콜', '블루스 하우스','쿨재즈', '황금동굴', '컬트시대', 영화평론집 '하재봉의 비디오 천국', '하재봉의 영화읽기', 에세이집 '트라이앵글이 은빛으로 우는 이유', 번역시집 '수잔과 함께 강가에 앉아 '등이 있고, 동아TV 드라마 '블루스 하우스'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집필활동과 함께 영화평론, 방송 MC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