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윤택 -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다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 헤드폰 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네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 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랭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 이라든지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 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1종 생활보호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 날밤 3백 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 새워 20원 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 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 졸 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값은 얼마쯤 할까 철 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 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 지난 사림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 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기억들로 밤치장하고 불 밝힌 강변로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
- 시 '수자의 편지'전문
왜 시를 쓰려 하는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질 때 나는 심심해서 시를 쓴다고 대답한다. 이런 시시한 인간 같으니! 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그 말 그대로 시인은 참 시시한 인간이라고 답해 준다. 시인이 위대하다는 말은 유아독존적인 과대망상의 소산이다. 시인은 참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시집이 읽히는 이유는 이 세상에 시시하고 한심한 인간들이 그만큼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바다 위를 나는 새, 알바트로스를 시인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높이 떠서 공중을 나는 새,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자유와 해방의 황홀경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새가 나는 데 지쳐 선박 갑판 위에 내려앉았을 때, 그 멋없는 몰골에 당황해 하는 모습은 곧 선원들의 경멸 대상이 되고 만다. 멋쩍게 크기만 한 새가 갑판 위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선원들의 발에 채이고 얻어맞으면서 지상에서의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이게 시인의 모습입니다'는 말에 나는 동의 한다. 시인은 지상에서 결코 자신의 삶을 증거하지 못한다. 하릴없이 걸기적거리는 모습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디엔가 구석진 곳에 처박혀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나의 문학청년 시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의 보금자리는 행안통 번화가를 비껴 앉은 낡은 클래식 다방이었다. 커피 한잔 값 80원만 있으면 하루종일 구겨박혀 꿈꿀 수 있는 '오아시스'. 바깥 세상은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 데 나는 느릿한 속도로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숨어 살았다. 음악 속에 나의 집을 짓고 시를 꿈꾸었다. 그때 유일한 행위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가장 노동력이 적게 드는 행위였고, 무엇보다 내게는 풍부한 어휘가 자산이었다. '아, 나도 이 세상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건 사랑이었다!'라는 눈뜸. 내 사랑은 작고 이쁜 새 같은 여자였다. 너무 작고 등이 굽어서 멀리서 보면 곱추처럼 보였다. 2년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기약 없이 발령을 기다리던 그녀는 그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을 '오아시스'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커피값밖에 없어서 온종일 음악과 함께 보내야 했던 처지였으므로 나와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었다. 낡고 침침한 찻집에서 온종일 않아 있어야 했던 우리는 어느 날 서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 그날 이후 내가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말들은 몇트럭 분으로 실려 나갔으리라. 나는 끊임 없이 말을 쏟아붓는 아구통이었고 그녀는 끈질기게 내말을 들어 주는 귀였다. 혓바늘이 서고 목젖이 퉁퉁 붓도록 쏟아놓았던 말들에는 분명 그녀의 무료함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 정이 들고 나의 만만찮은 관념의 분량을 인정하는 그녀였지만, 손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녀의 또 다른 태도였다. 깨끗한 몸으로 남자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그녀의 순결성을 나는 이해했다. 그녀에게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온 학력과 언젠가 주어질 교사라는 직책, 그리고 그녀의 깨끗한 몸이 삶의 무기였던 것이다.그녀는 대학도 못 다니고 머리통만 멋쩍게 큰 문학청년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주체할 수 없이 큰 머리통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 그녀의 생활의 위안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삶의 식량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문득 내게 키스 한번 해주고, 사랑해, 낮은 목소리를 내뱉고는 사라졌다. 한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고, 나는 내 관념을 먹고 떠난 그녀의 편지가 이미 한편의 시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시집을 갔고 현실 속에 무사하게 안착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몸 속에 나의 사랑은 암세포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삶의 평화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시집은 갔는데 맹숭맹숭하고 그렇게 고이 간직했던 순결의 문을 열면서 쿡, 웃어 버렸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것이 그렇게 귀중한 삶의 무기였던가? 무제한 방출되는 시간 속에서 거의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어떤 삶의 위안이 되어주고 있는 가.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힘차게 기어를 밟으며 한강을 넘는다. 그 시간 그녀는 잠옷까지 그러듯하게 걸쳐 입고 얼음 채운 술잔을 들고 있다? 그녀는 아마 이런 인생이 얼마나 지겨운 삶의 무게인가를 느끼기 시작했으리라.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쁘게 밤치장을 하고 불 밝은 강변로를 걸으면서 나를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녀는 비로소 내가 토해 놓은 그 무진장한 사랑의 관념들을 되씹기 시작했을 것이고, 자신을 데려갈 능력조차 없었던 남자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찔금거리다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편지는 찻집으로 왔고, 나는 한 해 꼬박 그녀를 줄기차게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았다. 그때의 느낌은 무엇이랄까, 내게는 작은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인신매매당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고 무사하게 현실 속에 안주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편지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그녀와의 사랑은 편지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나의 관념이기도 했고 나와 그녀가 보내었던 시간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편지는 몇 년 후 나의 시로 둔갑하여 발표되었다. 최소한 그녀의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짓눌려 살아갈 위인이므로 내가 발표한 시를 읽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스런 두근거림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극적 갈등도 전개도 없이 끝났다. 한 편의 소박한 멜로드라바처럼 끝이 난 사랑이기에 세상에서 시비를 걸 이유도 없다. 나는 그녀의 남편과 소줏잔을 기울일 수도 있고, 그녀가 낳은 자식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 그녀가 나타난다면 다시 그 무진장한 말을 애무처럼 쏟아줄 의사도 있다.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그 어떤 현실적인 권리가 우리를 이별시킬 것인가.
이윤택 -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작품집으로 시집'시민', '춤꾼이야기',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밥의 사랑', 비평집' 해체, 실천, 그 이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정부가 있다', 희곡집 '웃다 북치다 죽다', '문제적 인간 연산', 연극이론서 '이윤택의 연기훈련', '이윤택의 극작실습',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TV드라마 '행복어사전'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하며, 극단 '연희단 거리패'와 우리극연구소 '가마골 소극장'을 이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