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안도현 - 첫사랑,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주러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시 '저물 무렵'전문
나는 나의 첫사랑을 모른다. 그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단 한폭의 그림으로 저장되었는, 유일무이한, 딱히 첫사랑이라고 정의할 만한 사랑을 나는 모른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말을 내가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말은 이 세상의 어떤 잠언보다도 아름다운 게 사실이지만, 데체로 바람둥이들의 자기 변명을 위한 허사로 쓰이기 일쑤여서 엄격하고 안전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의 귀에는 매우 불온하게 들릴 수도있다. 또 첫사랑은 실패한다는, 상당한 경험이 깃들어 있는 듯한 인생파적인 잠언도 볼온하기는 마찬가지다. 미리 실패를 상정하고 만나는 사랑은 그 어떤 위험한 불장난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두려움으로 인산 가슴 두근거림이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고, 더구나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자 사람으로 하여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한번도 없었던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그때만 해도 6학년들이 졸업을 하기 전에 선생님들을 모시는 사은회라는 게 있었다. 학예발표회를 겸하여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행사에 나는 여자 아이들과 짝을 맞추어 무용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산토끼 같은 분장을 하고 학교의 숙직실에서 무용 연습을 했는데...... 비좁은 숙직실에서 줄을 맞추어 내가 등장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한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하고 짝을 지어 같은 연습을 하는 여자 아이의 몸이 내 등에 바짝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저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아이의 양쪽 가슴에 뭔가 말랑말랑한 정구공만한 게 달려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너무 조숙했기 때문일까. 그후로 나는 돌이 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그 아이의 커다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2학년 때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고 부임한 담임 선생님은 누가 봐도 곱고 예쁜 처녀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장터 근방에 있는 선생님의 자취방으로 가서 무엇을 좀 가져오라고, 밤톨만한 자물쇠를 열고 선생님의 자취 방을 들어가는 순간, 나는 가슴이 콱 막힐 뻔하였다.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화장품 향기가 내 온몸을 얼얼하도록 적셨기 때문이었다. 거울이 달린 선생님의 화장대 위에는 크고 작은 화장품들이 꼬마병정들처럼 도열해 있었는데, 그것들이 풍기는 향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의 비밀을 엿본 듯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그 동안 여자 사람이 내 가슴을 두드린 일들이 어디 그뿐이랴. 중학교 다닐 때 학교 벤치에서 '라면땅'이라는 과자를 건네주던 같은 학년 여자 아이의 가느다란 손끝이며, 고등학교 시절 수 십통의 편지를 주고 받던 여학생의 작은 키며, 시화전 같은 데서 만나 내 이야기에 자주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던 여학생의 단발머리며 모두 내 가슴에 북소리를 나게 했던 기억들이 아니던가. 또 있다. 얼마 전에 출간한 어른을 위한 동화 '사진첩'에서 아련한 추억으로 다시 만난 봉자 누나였다. 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손수건을 사 준 사람이 종자 누나였다. 봉자 누나는 우리 옆집 양장점에서 일을 거들던 처녀였다. 어른들이 양장점 시다라고 불렀지만, 누나가 자신을 시다라고 말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축하한다." 어느 날 누나는 내 손에 신문지로 정성스럽게 싼 물건을 쥐어주었다. "이게 뭔데?" "입학선물이야" 파란 물방울 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나는 그때 적잖이 감격하여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 였는데, 그것은 축하와 선물이라는 낯선 말을 생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해마다 생일을 맞이했지만 누구한테서 정식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선물을 받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적세계 속에 머물러 있다가, 뭔가 인간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는 공적세계로 편입하는 순간의 감격이 그런 것인지 몰랐다. 나는 매일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한번도 거기에다 코를 닦지 않았다. 처음 받은 선물에다 더러운 코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 봉자 누나가 보고 싶을때면 혹시나 누나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 손수건을 코 가까이에다 대어 볼 뿐이었다. 봉자누나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봉자 누나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가 내 옆에 있다가 어쩌다 그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길 때면 향기로운 누나의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느껴지곤 했다. 봉자 누나의 냄새를 기억하고부터 나는 누나의 모든 게 좋았다. 고무 슬리퍼를 끄는 소리도 싫지 않았고, 딱딱 소리 내어 껌을 씹는 볼도 보기 좋았으며, 선반에 있는 옷감을 내리기 위해 팔을 쳐들었을 때 겨드랑이 사이에 거뭇거뭇 드러나던, 그 윤기 나는 털도 보기 좋았다. 덕구네 큰형이 봉자 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도 봉자 누나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학 교에 입학해 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어느 날 나는 양장점 주인 이모에게 식혜를 한 주전자 갖다주러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다. 양장점 주인 이모는 내가 왔는지도 모르고 봉자 누나를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니 신세 니가 알아서 하겠지만, 다시 한 번 극장을 갔다가는 다리 몽테이가 뿌러질 줄 알아라." 그 전날밤 봉자 누나는 덕구네 큰형과 함께 몰래 영화를 봤던 모양이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풍산면민 여러분, 오늘 밤 개봉할 영화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순애보 중의 순애보,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하는 에로티크 러브......'매일 저녁 무렵이면 확성기를 통해 드려오는 극장의 영화 선전 방송은 열아홉 살 봉자 누나의 가슴을 흔들기에 족했으리라. "극장 들락거리다가 신세 조진 년들 많다는 거, 니 아나?" "나도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요..... 딱 한 번만 가자고 해서......" "이 가시나가 시상 무서운 줄 모르네. 그라만 남자가 딱 하번만 자자고 하면 니 잘래?" 봉자 누나의 고개가 더 아래로 숙여졌다. 나는 위기에 빠진 봉자 누나를 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으흠, 하며 염소 콧김 빠져나오는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양장점 이모는 봉자 누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봉자 누나가 직접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봉자 누나가 덕구네 큰형보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다. "니 얼굴은 배호를 빼닮은 것 같애." 누나가 좋아하는 배호의 둥그런 얼굴과 내 얼굴이 닮았다는 것은 결국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어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 안고울고만 있을까.....' 그러니 나도 배호의 낮게 깔리는 굵은 목소리를 그때부터 흉내낼 수밖에. '다아-씨 한번 어루마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어쨌든 나는 봉자 누나와 덕구네 큰형 사이를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정보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누나, 덕구네 큰형이 올 겨울에 군에 간다고 하드라." 내말을 들은 봉자 누나의 눈빛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낙엽송 고목처럼 쓸쓸해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첫사랑들은 나도 모르게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첫사랑을 모른다. 그것을 구태여 따져 가려낼 생각도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세월을 더 산뒤에, 머리 위에 허옇게 서리가 내리더라도, 늙은 아내의 주름진 눈가를 들여다보며 가슴 두근거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 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비록 짧다고 해도 나는 둥둥둥둥 가슴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말을 이렇게 바꾸려고 한다.
'당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면, 언제 어느 때든 그게 바로 첫사랑이라고'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애일신문 신춘 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 되었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그리우 여우'가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로 '연어','관계','사진첩'들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