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용택 - 그 여자네 집, 그리고 그 여자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떨 때 노란 산국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흥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 나라 가을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습니다. 산도 젖고 강도 젖고 풀잎들도 젖고 내 마음도 젖습니다. 가을비 내리면 추워지고 봄비 내리면 따뜻해집니다. 이 비 그치면 들판의 곡식들은 더욱 더 깊이 고개 숙이며 익어가도, 강가에 풀잎들은 노랗게 말라가리. 아, 가을의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는 지고 억새들이 바람에 하얗게 나부끼는 가을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맑은 햇살 속에 마른 풀잎들이 사각이는 가을 강가에 서서 저무는 물을 보았는지. 외로움처럼 키 큰 포플러 마른 잎이 다 지고 마른 풀섶에 샛노란 산국이 지고, 단풍 지면 산산이 빈 산이 되어 저 강에는 겨울이 오고 저 강물로 하얀 눈송이들이 겁도 없이 하얗게내리리라. 그러면 나는 강가에 서서 강물로 사라지는 눈송이들을 보리. 내게 사랑은 늘 그렇게 왔다네. 계절처럼 소리없이 왔다가 계절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먼서 잎 피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비가 왔다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 윗동네에 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벼가 익고 개구리 울고 감나무가 있고 보리가 겨울 달빛 속에 자랐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하얀 감자꽃이 피고 들국화가 피고 구절초가 피고 산벚꽃이 피고 강가에는, 강가에는 검은 바위들이 달밤에 번쩍거렸습니다. 풀벌레 울고 밤산에서 소쩍새 울고 부엉새가 부엉부엉 울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굽이굽이 하얗게 살아가던 길, 달이 뜨면 뽀얗게 떠보이는 적막하고 다정한 길이 늘 펼쳐져, 해 저물고 바람 불면 바람 따라 길 따라 하얗게 춤을 추던 개망초꽃, 그리고 해맑은 풀잎들. 그 길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정다운 길입니다. 아버지들이 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락을 져 나르던 길이며, 어머니들이 아기 업고 머리에 곡식을 여 나르던 길입니다. 내 누이들이 돈 벌러 가던 길이며, 동무들이 밤도망을 치던 길입니다.어머니들이 울면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눈물로 자식들을 기다리던 길입니다. 꽃길입니다. 서러운 눈물 뿌리던 길입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내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한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앞에는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들 끝에는 언제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들 끝에 그 여자네 무밭이었습니다. 그 무밭에는 늘 곡식들이 다 떠난 들판에 파란 무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따금 그 무밭에서 파란 무나 배추를 뽑아 머리에 이고 빈 들을 가기도 했습니 다. 그 느티나무 부근에는 또 여자네 밭이 있고 그 밭에는 그 여자 네 어머니가 하얀 수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밭가에는 토란잎이 넓적하게 자라기도하고 가지가 열리기도 하고 오이가 열리기도 하고 그 여자가 그 여자 어머니와 함꼐 콩밭을 매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감이 붉게 익고 그 여자가 감망으로 감을 따다가 내가 지나가도 못 본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네 나이 든 할아버지는 뻣뻣하게 풀 먹인 삼베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해 저문 논두렁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그 밭에서 그 여자네 아버지가 큰 암소로 느릿느릿 쟁기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 여자가 밭가에 앉아서 내가 지나가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제비꽃을 꺾고 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는 참으로 크고 의젓하고 당당합니다 봄이 오면 그 느티나무에 잎이 피어납니다. 그 추운 겨울 그 잔가지로 어떻게 그 매서운 강바람 들바람을 이겼는지, 봄만 되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수많은 새 잎들을 피워냅니다. 나는 설레입니다 잎 피어나는 그 나무 밑을 지나면 나는 그 나뭇잎들의 수런거림으로 내맘은 설렙니다. 멀리에서도 나는 그 나무만 보면 늘 가슴이 뜁니다. 잎이 피면 그 주위에 수많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하얀 꽃, 노란꽃, 보라색 꽃들이 피어나고 그 나무 아래는 환하게 밫납니다. 그 여자, 꽃같이 고운 열아홉, 그 여자는 어머니랑 같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나를 못 본 척 눈을 내리깔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디만큼 가서는 얼른 뒤를 돌아다봅니다.뒤태가 이뻤던 그 여자는 그때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힐끗 뒤돌아본 날 밤이면 그 느티나무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달빛을 받으며 그 길을 걸어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달빛을 밟으며, 먼 산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차며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검정 우산같이 달 그늘을 거느린 그 느티나무를 보면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여자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달 쪽으로 기대어 서서 달을 보며 나를 기다렸습니다. 스웨터를 여미며 나를 보고 웃는 그 여자는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박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밤이면 그 느티나무 등뒤에서 만났습니다. 어쩌다가 밤 늦게 사람이 지나가면 우리 둘이는 그 나무 등에 딱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너무 가슴이 뛰고 그리고 너무 좋았습니다. 어찌나 가슴이 쿵쿵 뛰던지 느티나무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의 숨소리, 따뜻해져 오는 몸, 그리고 어색하게 더듬어 찾던 손과 맞주치던 눈길들. 길 가던 사람이 지나가도 우린 한참을 그렇게 오래 느티나무 등뒤에 서 있었답니다. 그 여자는 운동회날이면 양산을 쓰고 학교에 왔습니다. 나는 선생이었고, 스물셋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늘 느지막하게 학교에 동무들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코스모스가 핀 운동장가에 그 여자는 동무들과 어깨를 마주 대고 오불오불 꽃처럼 모여는 부락 대항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졸업생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늘 나를 훔쳐보면서 나에게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가고 산그늘이 운동장을 덮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소고놀이가 끝나면 그 여자는 또 동무들과 집엘 갔습니다. 운동장가에 코스모스 꽃 속에서 그 여자는 웃고 있어습니다. 운동회가 가 끝나고 해가 다 진 뒤 나는 그 여자네 동네를 지나 집에 갑니다. 그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니 보이거나 내가 그 여자네 집 앞쯤 지날 떄, 얼른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면 우린 그날밤에 만났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날이 가면서 겨울이 왔습니다. 어떤 날 밤은 그 여자가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동무들과 같이 와서 내 방문에 밤톨만한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뒷문으로 얼른 들어온 그 여자는, 동무들과 같이 있으면 늘 내게 무심 한 듯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야 내게 닿는 애매한 말 했지만 나는 그말이 내게 한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어떨 때는 평소 우리둘의 뜻과는 너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은 따뜻 했고 우리들은 이불 속에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놀았습니다. 나는 그여자의 발을 찾다가 다른 여자의 발을 잘못 건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둘이 발이 닿으면 우리만 아는 눈웃음을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님이 감도 내오고 고구마도 가져왔습니다. 그릇 하나를 치워도 안 그런 척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도 해서, 자기가 이 집과 특별한 관계임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꼭 그렇게 티를 냈습니다.
그 여자들이 가면 나는 밤길을 걸어 그 느티나무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타박타박 걸어왔습니다. 먼 산을 지나는 밤바람 소리, 발 끝에 채이는 물소리. 우리는 늘 만나 놀았습니다. 이웃마을에 사는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나 놀때도 있었고 삼삼동네 젊은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난 밤을 세워 강가에서 놀았습니다. 달 뜬 밤 우리들의 젊음을 견디지 못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장소에서 마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친구들이 군대 갈 때 헤어짐이 슬퍼서 놀았고, 이웃마을 처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강가에서 만나 밤이슬이 내리 때까지 놀았습니다. 콩쿨 대회 때도 만났습니다 그 여자네 오빠가 어찌나 감시와 단속이 심하던지 그 여자는 그 여자네 작은 언니 방에 나들이옷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감시가 심해도 어떻게든지 그 여자는 다른 동무들과 가설극장 불빛 아래 곱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우리 둘은 어떻게든 또 따로 만났습니다. 넓은 바위위에서 나는 눕고 그 여자는 내 곁에 앉아 달을 보며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먼데서 사람들의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달빛은 강물에 부서지고 풀밭에 이슬들은 반짝였습니다. 까마득하게 높은 달, 먼 산의 서늘한 어둠, 그리고 아스라한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같고, 노랫소리도 같은 산울음 소리, 그리고 멈춘 시간들, 그렇게 밤이 깊어졌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린 우리 둘이라는 게 그렇게 실감나고 호젓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사랑도 흘렀습니다.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길이면 나는 그 여자네 뒤꼍으로 담을 넘어 그 여자가 있는 그 여자 골방에 들어가 놀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 바로 옆방에는 나이든 할아버지가 계셔서 우리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며 놀았습니다. 민화투도 치고 그 여자가 가져다준 감도 먹으며 놀다가 집에 갔습니다. 그럴 때 그 여자친구들과 그 여자가 그 느티나무까지 나를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눈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졌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사이에 우리들은 풀잎처럼 만나고 바람처럼 헤어졌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여자네 집만 떠올리면 이 세상이 따뜻해져 오던 그 여자네 집엔 살구꽃이 있고, 은행나무가 있고, 감나무가 있고, 그리고 노란 초가집이었습니다. 저녁 연기가 오르고 그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부산하게 마을길을 걸어 그여자네 집 대문으로 얼른 사라질 때면 나는 늘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디 갔다가 올 때면 그 여자가 무밭으로 무를 뽑으러 나가기를, 그 여자가 감을 따러 가기를 나는 간절히 빌곤 했습니다. 어떨 때는 그 여자가 소쿠리를 들고 얼른 대문을 나서서 멀찍이 떨어져 내 뒤를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그 여자네 밭으로 그 여자는 감을 따러 갔습니다. 어떨 때 나도 그 여자가 감을 따는 감나무 밑에 가서 감을 얻어먹기도 하며 올라가서 감을 따는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쯤이면 산국이 노랗게 피어 있어서 나는 산구구을 꺾어 그 여자 감 바구니에 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수줍어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고 어떨 때는 너무나 의외로 거리낌없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 두 모습이 다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 여자가 스물한 살 먹을 때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무들도, 여자 동무들도 하나하나 그 아름답고 즐거웠던 고향의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떠나갔습니다. 그 강, 그 산, 그 강변, 그 풀꽃들, 그 감나무와 밭의 넓적한 토란잎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자를 위해 두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여자네 집'이고 또 한 편이 '애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보던 그 느티나무에도 단풍이 들고 가을이 가겠지요.
김용택 -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섬진강','맑은 날','꽃산 가는 길','그리운 꽃편지','그대, 거침없는 사랑','강 같은 사랑'이 있으며 최근 '그 여자네 집'을 냈다. 산문집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그리운 것들은 산뒤에 있다','작은 마을' 들이 있고, 장편동화로 '옥이야 진메야'가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김소월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섬진강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