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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11
그쪽, 그러니까 남녘 땅을 지나서 꽃 소식이 비로소 여기 당도하였습니다. 엊그제부터 하나 둘씩 피어나던 매화들이 오늘 아침에는 한꺼번에 만개하였습니다. 홍매가 가장 빨리 흐드러졌고 청매가 뒤를 잇습니다. 백매는 아직 수더분한 모습으로 게으릅니다. 벌들도 잉잉댑니다. 코를 대고 그 은근한 암향에 젖어 보았습니다. 새삼 옛사람들이 아낀 이유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청매가 더 그렇습니다. 눈에 시원한 맛이 향에서도 짙습니다. 향기를 삼키면서 참으로 분에 넘는 호사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들어와 책을 펴도 눈길이 글자들 사이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꾸 미끄러집니다. 그러고는 이내 창으로 향합니다. 책이 오랜 옛날의 지혜를 향한 창이라면 저 봄꽃들은 지금 그대로의 기쁨의 창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창에 눈을 둬야 옳은 건지요. 다 소중한 것이고 무심히 지나고 싶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어 어두워도 매화는 그 향기로서 제 존재를 알립니다. 그러니 밤에도 책에만 눈을 두기 아깝습니다. 아무튼 대나무를 배경으로 청매 한 그루를 두었다는 것은 제게 최대의 사치임에 분명합니다. 속삭이듯 일렁이는 대바람 소리 속의 매화꽃과 향기를 올해는 좀 오래 즐겨 보고 싶습니다. 안대회 선생의 《정조의 비밀 편지》라는 책을 이리저리 펼치다가 이런 시를 발견했습니다. 이 책에 인용된 유일한 시가 지금 이 계절의 풍경과 맞으니 더 제 뇌리에 남습니다.
이 멋진 초가 정자 있기에 (有此茅亭好) 수풀 사이로 오솔길 나 있네 (綠林細逕通) 술 한 잔 하고 시를 읊조리면서 (微吟一杯後) 온갖 꽃 속에서 높다랗게 앉아 있네. (高座百花中) 산과 계곡은 언제 봐도 그대로건만 (丘壑長看在) 누대는 하나같이 비어 있구나. (樓臺盡覺空) 붉은 꽃잎 하나라도 흔들지 마라! (莫吹紅一點) 늙어 갈수록 봄바람이 안타깝구나. (老去惜春風) -〈六閣之下花園小亭帖韻〉
정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환지(沈煥之)가 봄날 지금의 종로구 필운동에 해당하는 필운대에 올라가 지은 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꽃구경의 명소로 알려진 육각봉 아래 화원에서 지은 시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가 심환지의 이 신작시를 이내 알아차리고 비밀 편지를 통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래 꽃구경 가서 경이 지은 시에, '숲과 골짜기는 언제나 그대로건만, 누대는 반나마 비었다'는 구절이 있다고 들었다. 전하는 말이 맞다면 '반나마 비었다'는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듣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시가 오간 과정도 흥미롭습니다만 이내 그 시의 여백에 대하여 임금이 궁금해하고 또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향기롭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정치 행위의 한 방편이었을지언정 시라는 것을 각각의 흉중을 오가는 매개로 삼은 것은 지금 당대 저 정치가들로서는 도저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정치의 계절이 오고 있네요.)
한가한 어느 봄날 술을 한 잔 마시고 소박한 초가 모정에 오릅니다. 모정에 오르는 오솔길이 호젓합니다. 호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 앉으니 갑자기 호기롭게도 자신이 높습니다. 온갖 꽃들이 발 아래 피었으니 가히 꽃들의 무동을 타고 있는 듯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연이지만 그만한 영광도 없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은 가난하니 높고 쓸쓸히 살아가도록 한 것이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 높다는 말의 깨끗함이 여기 이 '高座'에 겹쳐 읽혀졌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다만 노경으로 접어드는 쓸쓸한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정조는 심환지의 정치적 처지를 이 대목에서 읽었을 듯싶습니다. 시인이 임금의 질문에 답을 어떻게 했는지 책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해 볼 뿐입니다. 그 심정을 단박에 알아차린 군주의 안목에 우선 탄복했을지 모릅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입니다. 아름답고 흥분되고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꽃 시절은 그러나 아주 짧습니다. '늙어갈수록 봄바람이 안타깝다'는 이 시인의 심정은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만 사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더 쓸쓸하게 읽힙니다. 꽃에만 몸과 맘을 주기에 세월은 덧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책보다는 창으로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꽃 아래 낮게라도 앉아 무슨 사색에 잠겨야 할까요! 희덕 씨가 잊지 못하는, 손안의 그 따뜻한 달걀과 같은 화두를 궁리해 봅니다.
서울에서 장석남
장석남 / 1965년 인천에서 나서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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