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눈물 밥
난 아이들에게 늘 자상하고 능력있는 아버지였다. 가난 때문에 겪는 설움을 내 아이들에게는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늘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 학교에 보냈다. 아이들이 워낙 심성이 고운 탓인지 무분별한 내 사랑에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순하게 자랐다. 그렇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원만하던 나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삼 년 전 일이다. 의류회사의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경기 침체와 자금 압박, 그리고 업친 데 덮친 격으로 공장에 불이나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부자가 망하면 삼 년은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집을 팔아 빚을 갚았는데도 부족해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나이 오십줄에, 이제는 웬만큼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어야 할 시기에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 이곳 저곳을 비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불과 일 년 전이다. 초췌한 몰골로 돌아온 나를 아내와 아이들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아내의 두 눈가엔 깊은 공이 패여 있었고, 두 딸아이와 아들녀석은 꽤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술을 자주 입에 댔고 아이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비로서 참 못 볼 꼴 보여 줬다 싶지만 그때는 내 현실이 너무나 싫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다 싶어 몹시 괴로웠다.
내가 다시 삶의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내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술에 곤죽이 되어 집에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두 딸아이는 아비의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한참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아이였는데..... 또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데 이번엔 작은딸이 아랫목에 겹겹이 덮어 놓은 이불 밑에서 밥 한 그릇을 내 놓았다. 아랫목 이불 밑에 밥을 넣어 두면 식지 않는다는 것을 철부지들이 어떻게 배웠을까. 아리들은 이불 밑에 밥을 넣어 놓고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날 난 눈물 밥을 먹었다. 어린 것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못난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려 주다니.....
지금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동네 아줌마들과 실랑이를 벌일라치면 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난 '눈물 밥'을 떠올리곤 한다. 어찌 생각해 보면 내 불행은 오히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순철 님/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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