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안병욱편" (1920~2013)
철학자. 수필가. 평남 용강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졸업.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역임. 삶의 길잡이로 또는 사상의 안내자로 많은 젊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인물이다. "현대 사상" "사색인의 향연" "철학 노트" "알파와 오메가"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생을 위한 사색
우리는 사색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색은 언제나 무엇에 관한 사색이다. 무를 사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용이 없는 사색은 공허하다. 젊은 생명은 무엇을 위해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의 시절이다. 청년의 눈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남에게서 나에게로 향하고 외적 대상에서 내적 자아로 향해야 한다. 청년의 사색의 초점은 주체적 자아의 자각과 확립에 있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하는 것이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충실은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중심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22세의 젊은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이가 주위에서 자기를 구별하여 자아에 각성하게 되려면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거니와 높은 정신 생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야말로 참된 의미에 있어서 자아에 각성하고 깊은 의미에서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신은 바라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내가 죽고, 또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야말로 자아의 눈이 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행동하련다.' 고독과 성실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사색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어린아이가 '이것은 나의 집이다. 나의 손이다'하고 '나'라는 말을 쓰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와 타아의 구별은 어린애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신적 사건이다. 높은 정신 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자각에서부터 '나는 나다'하고 자아에 각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탄생은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의 탄생이다. 그것은 나다운 '나'가 태어나는 것이요, 본래적 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옮기어 '그노티 세아우톤'이라고 일기에 썼다. 영어로 옮기면 'Knowtheself'다. 옛날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대리석 벽에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생의 금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청년들의 사색의 목표는 자각에 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의지해서 설명하면 내가 그 때문에 살고 또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인생의 이념을 발견하는 일이요, 신 또는 하늘이 나에게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인간은 사명을 느끼는 존재요, 사명을 위해서 사는 존재다. 인간은 사명을 자각할 때 위대해진다. 일간은 사명적 존재다. 우리는 이 역사적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내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 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야 하고, 또 던질 수 있는 존재다. 인생은 가치를 창조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저마다 자기다운 천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고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아를 실현하고자 자기의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헌신 몰두할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곧 창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상 사회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 나의 피땀과 노력으로 인해서 사회의 한구석이 밝아지고 역사의 한 모퉁이가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인생을 성실한 창조의 일터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할 때가 곧 청년 시절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다운 방식으로 천분을 갖고 있다. 둥근 돌멩이는 둥글어서 쓸데가 있고 모난 돌멩이는 모가 나서 쓸데가 있듯이 사람은 각자 개성적 천분을 지닌다. 우리의 할 일은 그것을 올바로 발견하고 꾸준히 키우고 보람 있게 발휘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보낸 명령이요 목숨이다. 그것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인간은 높은 사명을 자각할 때 생활에 일관한 목표가 생기고 정신의 확고한 자세가 선다. 행동의 뚜렷한 원칙이 생기고 튼튼한 신념이 박힌다. 인간은 높은 사명에 살 때 비로소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불의의 타락 속에 전락되지 않는다. 진실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인생에 보람을 주는 것은 높은 사명의 자각과 실천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너 자신의 사명을 알라'는 뜻이다. 자아의 자각은 자기의 사명의 자각이다. 젊은이의 사색은 오로지 여기에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간은 사색한다. 그러나 사색은 사색을 위해서 사색하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행동을 위한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한다. 옳게 행동하려면 옳게 사색해야 한다.
사색이 없는 행동은 혼돈과 방향 상실의 행동이 되기 쉽고 행동이 없는 사색은 공허와 현실 유리의 사색이 되기 쉽다. 모두가 불완전함을 면치 못한다. 중국의 저명한 유가 사상가 왕양명이 이미 갈파한 바와 같이 지는 행의 시초요, 행은 지의 이루어진 것으로서 지행은 합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색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고 행동은 사색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 옳은 사색에서 옳은 행동이 나오고, 옳은 행동은 사색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저마다 옳게 살기 위해서 옳게 사색하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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