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안병욱편" (1920~2013)
철학자. 수필가. 평남 용강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졸업.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역임. 삶의 길잡이로 또는 사상의 안내자로 많은 젊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인물이다. "현대 사상" "사색인의 향연" "철학 노트" "알파와 오메가"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생각하는 갈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의 근대 합리론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낸 명언이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자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간다. '먹고 자고 생식하고 죽는다.' 동물의 생은 이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러나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요, 양식의 기능이다. 이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의 빛이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되어 있다.' 데카르트 철학의 명저 "방법 서설"의 제일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말하는 양식, 즉 봉상스란 곧 이성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이성이라는 자연의 빛이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성이란 '사물을 바로 판단하고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해서 옳고 그른 판단을 똑똑히 가져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머리는 머리가 아니다. 바로 사색하고 옳게 판단할 줄 모르는 이성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의 이성다운 속성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 진리와 허위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이성의 생명이다. 사색하는 능력과 이성의 빛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호모사피엔스의 인간관은 분명히 인간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코키토 에르고 숨'은 인간이 인간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우리는 파스칼에서 본다. 파스칼은 데카르트보다 27년 후에 출생해서 12년 후에 별세하였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간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지극히 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생각하는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인간의 품위는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게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사색에 관한 유명한 단장을 몇 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사색이 인간의 위대성을 이룬다.'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돌멩이나 짐승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품위는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기로 힘쓰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다.'
분명히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성과 위대성은 인간이 이성을 갖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파스칼이나 데카르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강조하고 선언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인의 사색에 관해서 하나의 위기를 지적하고 싶다. 현대인은 매스컴의 위력에 눌려서 자기 머리로 끈기 있게 생각하는 자주적 사고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스컴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어 보아야 하고 라디오를 들어야 하고, 또 TV와 마주 앉고 영화를 보게 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는다. 사물에 의해서 나의 사색을 정리하고 나의 판단을 갖기 전에 남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남의 의견을 읽게 된다. 우리의 머리는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기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전략하기 쉽다. 생각하는 갈대에서 감각하고 수용하는 갈대로 변질한다.
현대인은 자기의 머리로 줄기차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의식의 과잉'과 '예지의 빈곤'이것이 현대의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결합이다. 남의 판단과 의견을 비판과 사고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의 노예요 사상의 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가져야 한다. 옛날의 철학자들처럼 스스로의 머리로 줄기차고 끈기있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에 철인 칸트는 청년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자기 발로 서라.' 이것은 사색에 관한 귀중한 헌장이요, 계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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