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알같이 생긴 연적
조선 시대 자기 중에 그 생김새의 종류가 많기로는 아마 연적을 두고 달리 당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원형, 그 둥근 가운데도 떡 모양이 있고, 또 중심이 뚫린 환형, 곧 또아리 모양이 있다. 물형으론 복숭아 모양, 고기 모양, 새 모양, 두꺼비 모양, 그 밖에도 지붕 모양, 초롱 모양, 부채 모양, 무릎 모양 등,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골동을 수집함에 있어서도 벽이 있어, 어느 분은 병만을 모으고, 어느 분은 사발이나 대적 같은 주방 그릇들을 모으고, 또 어느 분은 문방구, 그 문방구 중에도 필통이나 연적만을 따로 모으는 기호가들이 더러 있다. 내게도 네모꼴에 청화로 보상화문을 그린 것이 하나 있고, 원형에 호접 한 쌍을 역시 청화로 그린 것이 있다. 이들 둘이 다 연대도 얕고, 그나마 네모 꼴은 입이 깨어져 도무지 실용으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미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마침내 조그만, 신라의 도금불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올려놓았더니 아주 안성맞춤 잘 어울린다. 이제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연적이 불상 받침으로서 더욱 값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쇠붙이와 조선 시대의 질그릇! 이것이 천여 년을 격한 오늘, 외로운 문인의 서실에 와서 그 연분의 기나긴 실끝이 이토록 맺어질 줄이야! 이리하여 이 신라불은 조선조의 꽃무늬를 깔고 나의 방 안을 항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호접 무늬 있는 것은 빛깔은 그리 좋지 않지만, 금 간 데 하나 없이 완전하다. 이것은 몇 해 전 어느 골동 가게에서 거저 얻은 것인데, 노상 책상에 놓였다가 벼루에 물방울을 떨구는 제 본디의 타고난 구실을 아직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요 며칠 전, 어느 고물 가게를 지나다가 나는 또 담청을 곁들인 무릎 모양의 백자 연적을 하나 샀다. 그러나 이도 입이 깨어졌다. 이것을 때우려는데 그 조그마한 입을 때우는 품삯이 이 몸뚱이 전체를 산 값보다 더하다. 얼른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도 만약 입이 없고 몸만 있다면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니, 연적 또한 이와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때우는 데는 먼저 몸에 밴 때를 뽑아야 한다 하기에, 때를 뽑으려고 탈지면에 과산화수소를 묻혀 환부를 온통 싸 두었었다. 과산화수소는 환부를 소독하는 약이지만, 자기의 상처에서 때를 뽑는 데도 그만이다. 나의 이러한 거동을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웃는다. 꼬마놈은 방 안에서 병원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지면을 들어 보고 마음을 죄어도 때는 좀처럼 빠지지 않더니 하루는 거짓말같이 말갛게 때가 빠졌다. 이것을 맑은 물에 헹구어 내어 화대로 쓰는 소반 위에 올려놓았었다. 소반의 검은 칠 빛과 이 담백의 연적 빛이 서로 대조되어 더욱 희고 더욱 검게 보인다. 더구나 형광등 불빛 아래 이 볼록한 무릎 모양의 연적을 보고 있노라면, 홀연히 어느 끝없는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윽고 곁에 앉았던 딸애가,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아니한 어느 먼 심산 유곡, 그 깊숙한 숲 속에 이름 모를 백조가 있어, 그가 품었다가 놓아두고 간 신비한 알과 같다.'고 하며, 제법 그럴싸한 환상의 날개를 펼쳐, 그 비경에 혼자 찾아든 양 조용히 경이의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내는 독백으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뇌며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환상에 또한 딸애처럼 경이의 눈빛으로 못내 흐뭇해했다. 사실, 이 연적은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저 대붕의 알은 아니라 해도, 거위나 백조의 알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의 알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물을 머금고 물을 배앝는 두 개의 구멍이 있을 뿐, 이 수수께끼 같은 단순한 형태,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닌 지난날의 어느 도공이 그 천명에 순종하던 마음을 태반으로 하여 낳은 한 개 무념의 알, 백자 연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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