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친절한 사람들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을 느낀 데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 때문이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그 나라의 말을 잘 할 수 있거나 혹은 비교적 널리 쓰이는 외국어를 한둘쯤 알아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텐데, 나는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연히 벙어리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기후와 음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한 달 이상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잘 앓는 병약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안락한 호텔에 들고, 영양 많은 음식을 사 먹으며 여행할 만큼 충분한 여비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헐한 호텔과 값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40일 동안이나 낯선 여러 나라와 도시를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대해 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 구역에 들어가,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 회사측에 로마의 호텔 예약을 부탁했었는데, 내가 홍콩을 떠날 때, 아직 로마에서 연락이 없으니 호텔 예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의 호텔 걱정은 퍽 큰 것이었다. 그 때, 내 앞에 와서 '미스터 조'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세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우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로마에 사는 사람이 인편으로 보낸 것인 듯한데,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이국 땅,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필시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뜯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 회사의 로마 지사로부터 나에게 온 것으로, 호텔이 예약되었으니 그리 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홍콩을 떠난 후에 호텔이 예약되었기 때문에, 내가 로마에 내려 비행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것을 알리려고 비행기 회사측에서 온갖 비상수단을 다 썼을 것으로 추축되었다. 비행장의 출입국 수속이 진행되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는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찾아온 한 외국인에게 편지 한 통을 전하기 위하여 회사측과 세관측이 합동 작전을 벌인 셈이다.
다음은 그 호텔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아까 그 세관원에게 떠듬떠듬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어디서 로마 시내의 지도를 한 장 가지고 오더니, 내가 가야 할 호텔의 위치에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는 1. 비행장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아라, 2.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라, 3. 테르미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라 하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영어를 퍽 잘 하는 것 같은데도, '택시를 타지 말아라' 같은 말은 '노 택시'와 같은 식으로 적었다. 이는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잘 짐작할 수 있도록만 적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준 지도와 쪽지를 가지고 호텔까지 잘 갈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면 호텔까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세관원은 택시를 못 타게 했을까? 나는 그 까닭을 곧 알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내까지는 거리가 퍽 멀고, 택시 요금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세관원은 나에게, 호텔까지 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일로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영상이 선명하다. 이러한 친절은 물론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장에서는 통역해 주는 분도 있고, 우리 대표 중에 외국어를 썩 잘하는 분도 있고 해서 별 불편이 없었으나, 혼자 거리에 나가거나 또는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할 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땐 어디선가 학생들이 몰려와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 사는 일까지도 도와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블린의 그 친절한 학생들을 생각한다.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더블린은 언제나, 명랑한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던 그 어린 학생들의 모습으로 꾸며질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혼자 비행장에 내렸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마중 나오기로 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전보 연락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나는 낯선 비행장 한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때었다. 은발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쉬운 말로 사정을 묻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자고 하면서 목적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노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었다. 나는 아마도 시카고란 말을 들으면 그 은발의 노신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미국의 어느 은발의 노신사를 만나면 시카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파리에서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아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리의 시민들은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좀 허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목적지를 못 찾아 크게 낭패를 본 일은 없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늘 앞선다. 이 밖에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한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관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했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했다. 그들의 조그만 호의나 친절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해 주었고, 그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우리말을 못 하고 우리 나라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리한 조건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름없이 외국인에게 친절히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을 친절히 대하자는 말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정의 아름다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민 외교의 한 구실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에 대한 친절은 경우에 따라선 나라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친절은 외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우리 모두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세계에 우리 나라의 인상을 감명 깊은 것으로 심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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