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전광용편"
전광용(1919~1988)
소설가. 국문학자. 함남 북청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문학 박사. 서울 대학 교수 역임. 동화로 출발했다가 소설로 옮긴 전광용은 냉철한 사실적 필치로 한국적인 여러 상황을 추구하는 것이 된 작품 경향이다. 감각적 요소를 곁들인 간결 정확한 문장과 현장 확인을 내세우는 소재의 소화는 그의 작가적 성실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의 고향
1
나의 고향을 함경도 북청이다. 북청이란 지명이 사람들의 귀에 익게 된 것은 아마도 '북청 물장수' 때문인 것 같다. 수도 시설이 아직 변변하지 않았던 8.15 전의 서울에는 물장수가 많았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북청 사람이었던 까닭으로 '물장수' 하면 북청, '북청 사람' 하면 물장수를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청 사람이 물장수를 시작한 것은 개화 이후, 신학문 공부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북청 물장수치고 치부를 하기 위해서 장사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머리 좋은 조카나 사촌을 위해서까지도 그들은 서슴지 않고, 희망과 기대 속에 물장수의 고역을 감내했던 것이다. 여기에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삼청동 일대에다 물을 공급하는 사람 중에, 중늙은이 북청 물장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중 무휴로,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물지게를 지고는 물 쓰는 집에서 돌아가며 해 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그들의 합숙소인 '물방'에서 잤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물지게를 지고 어느 부잣집엘 들어갔더니, 그 집 마나님이 방금 배달된 등기 우편물을 받아들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건지를 몰라 어찌할 바랄 모르고 있었다. 마나님의 하도 안타까워하는 양을 보다못해, 그는 그 편지를 비스듬히 넘겨보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일러 주었다. 판무식쟁이로만 알았던 물장수의 식견에 감탄한 마나님은, 그 후부터 그 물장수를 대하는 품이 달라졌다. 다음해 3월 상순, 어느 해질 무렵이었다. 그제야 겨우 물지게를 지고 그 부잣집 대문 안에 들어선 그 물장수는 이미 얼근히 취해서, 물통에는 물이 반도 안 남았고 바지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아들의 경성 제대 예과 수석 합격의 보도가 실린... 문득 파인의 시, "북청 물장수"가 입 속에 맴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2
우리집에는 어른의 생일을 차리는 법이 없다. 부모의 생사도 모르고 사는 불효 자식이 저 먹자고 제 손으로 생일을 차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고향 생각이 가장 절실한 것은 추석을 맞을 때다. 이 날 우리는, 차례를 지낼 대상이 없으므로 일찌감치 등산복 차림을 하고 우이동이나 도봉산으로 간다. 거기서 달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들국화의 향기를 맡는다. 개울의 돌을 들추고 가재를 잡는다 하며 신명나게 놀지만,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북녘 하늘 한끝에 시선을 막은 채 끝없는 추억과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뭉쳐진 덩어리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날 밤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아이들은 흥겹게 합창을 하지만, 나와 아내는 어느새 착잡한 심정에 잠기고야 마는 것이다. 이럴 땐 사진첩이라도 펼쳐 보면 좀 나으련만, 고향의 사진은 한 장도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결혼 사진만이라도..."하고 아쉬운 푸념을 되뇐다. 그러니, 차라리 눈이라도 감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명멸하는 것이다. 8.15 직후 서울에 온 나는, 고향이 그립고 궁금하여 그 해 겨울 방학과 이듬해 여름 방학, 두 번을 고향에 다녀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집에 닿아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보안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당일로 60리가 넘는 군청소재지의 보안서에 연행되어 1개월 간의 교화소 신세를 졌다. 그 때의 죄명은 우습게도 '하경자'라는 것이었다. 서울서 내려왔다고 해서 그런 해괴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출감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나의 절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이며 그 쪽에서 열성적으로 깃발을 날리던 Y가, "너를 감옥에 집어 넣은 것도 나고, 나오게 한 것도 나다." 하고 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등골을 스쳐 내리는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 서울로 돌아온 후 얼마 동안은, 고향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고향 꿈을 꾸면 꼭 붙잡혀 가서 욕을 보는 장면만 나타나고, 빨리 서울에 가야겠는데 하고 신음하다가 깨는 것이다. 그 그리운 고향이 왜 무서운 꿈으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어머니가 그립다. 나는 어릴 때, 수양버들이 서 있는 우리집 앞 높직한 돌각담에 올라가 아득히 먼 수평선가를 스쳐 가는 기선을 바라보면서, 외국으로 유학간 아씨들을 그려 보곤 했었다. 이젠 80이 넘으셨을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면, 지금쯤 그 돌각담 위에 홀로 서시어, 터널 속으로 사라지는 남행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시며, 흩어져 가는 기차 연기 저 너머로 안타깝게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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