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향녕편"
법학자. 소설가. 충남 아산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역임. 30년대에 '금성'에 단편 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 이향녕은 춘원 이광수에 사사하기도 했다. 1959년 장편 소설"교육 가족"을 발표했고, 뒤이어 장편 "창산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로서보다는 법학 교수로, 변호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다.
깨어진 그릇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 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의 평교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국민 학교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청에서는, 차라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는 한사코 국민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격 없는 사람을 발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장은 관리직이므로 나의 경력을 참작하여 발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동래군의 어느 국민 학교 교장이 되었다.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것은 1945년 12월 초순, 날씨가 퍽 쌀쌀했다. 광복을 맞은 지 4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장이 온다는 바람에 무척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이삿짐을 운동장가에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을 사서 짐을 나를 작정이었다. 그랬더니, 상급반 아이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모두 사택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궤짝을 열어 보니 사기 그릇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의 소중한 그릇을 다 깨어 놓았는가? 나는 아이들을 몹시 미웠다. 그리고, 이 철부지들을 어떻게 상대하며 살아갈까, 차라리 중학교로 갈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 날, 나는 깨어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우울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사택을 나왔다. 사택을 막 나오는데 꼬마들이 달려와,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며 매달렸다. 남루한 옷,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손, 그들은 나의 모처럼의 새 단장을 마구 더럽혔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버릇 없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국민 학교에 온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정중한 어조로 일장 훈시를 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나의 위엄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줄이 엉망인데다가 제멋대로 떠들고 주저앉고 옆 사람을 쿡쿡 찌르고, 무질서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질까, 교육의 길은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서글픈 생각이 가슴 속에 꽉 차 왔다. 나는 조회가 끝나자 산길을 혼자 걸었다. 잠시도 학교에 있기가 싫었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어느새 범어사 경내에 들어섰다. 갑자기 청정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나의 과거가 회상되었다. 동족을 괴롭힌 죄 많은 인생, 나는 큰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서되어 새로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에게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길이 험난하면 할수록 나의 속죄의 길은 넓혀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삿짐을 굴리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릇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부임하는 마당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겠는가? 천진 무구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들의 호의가 뼈아프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또 내 새 단장을 더럽힌 꼬마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의 새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내가 결코 제외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때낀 얼굴과 손, 나는 갑자기 달려가 그들을 덥석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의 훈시를 듣는 어린이들이 만일 일사 불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나를 무섭게 알고 경계하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무질서를 탓한 건, 나에게 대한 그들의 친근감의 표현을 내가 오독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정답게 다가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또, 코를 흘리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 중 한 놈을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 후 나는, 나의 그릇을 깬 그 어린 손, 나의 옷을 더럽힌 그 코흘리개들의 때 낀 손, 그리고 무질서로써 나를 따르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만족과 사랑을 느끼었고, 날마다 희열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매, 이제 내가 교육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나는 때때로 그 깨어진 그릇, 그 때 낀 어린 손들을 생각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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