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그놈을 잡으려
나처럼 글재주가 무딘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번역을 한 줄 하는 데도 민망할 정도로 연방 우리말 사전을 뒤적인다. 그럴 것이 목적한 단어를 찾다가 낯선 낱말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에 정신이 팔리다가는 또 다른 어휘를 발견하면 그것에로 달아난다. 이처럼 '도리기'란 말을 찾다가 '되리'란 말에 눈을 팔듯이 연줄연줄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버리곤 한다. 이렇게 흘러 버린 시간이 수없으리라. 이 수없는 시간을 나는 아깝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노라면 우리말 사전과 싸우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가 당장에는 용처가 없지만 앞날을 위해서 눈에 띄는 낯선 말이면 무작정 적어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적고 적어 둔 것이 어느새 두툼한 노트로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무료한 때면 이 노트를 꺼내 가지고, 어허 이런 어휘도 있었던가, 저런 말도 있었던가고 사뭇 감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겉장이 낡고 닳아 새것으로 씌우고 모자라진 데는 손질을 하느라고 화초를 가꾸듯이 매만지기도 했다. 이렇듯 노트는 거의 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고 손땟국이 흐르게 되었다. 몇 번이나 겉장을 갈았는지 모른다. 이런 노트를 나는 잃어버렸다. 사변 때 모든 책과 함께. 잃은 책은 그때그때 사정이 닿는 대로 제일 필요한 것부터 다시 사들일 수 있지만 노트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다시는 노트를 만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를 일이다. 무던히나 열을 쏟았고 정을 부었던 때문인지 모르겠고 이제는 그럴 겨를과 일이 없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변으로부터 거의 2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노트다. 번역을 하다 우리말이 막힐 때가 더욱 그렇다. 그것이 지금 곁에 있어도 별도움은 안 될 것이지만, 정확히 따지고 보면 거기 적힌 어휘들이라야 대개는 지금에는 눈에 익은 것이 많고 나머지는 별로 쓰이지 않는 말들이다. 거기에는 놀란흙, 자드락, 어리, 버덩, 도리기, 좀 쑥스런 말이지만 '되리'등이 있을 것이고 번역에 필요한 거의 같은 성질의 낱말들을 정리해 놓은-대번, 문득, 별안간, 갑자기, 대뜸, 금세, 고대, 퍼뜩. 또 다른 종류의 계열로는-결국, 필경, 종당, 필시, 나중에, 결말에, 종국에. 그리고--종종, 가끔, 때때로, 어쩌다 등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후자에 속하는 이러한 일상적 용어들의 집합은 같은 뜻의 '결국'이라는 낱말이라도 다양성 있게 쓰이는 영어에 대처하는 데 편의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취해진, 동의어를 모은 소사전의 구실을 해 주는 것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노트이건만 그것은 날이 갈수록 눈앞에 자꾸 확대되어 오곤 한다. 무료할 때가 더욱 그렇다. 그리고 2,3월 이맘때면 더더구나 거기 적혀 있었던 낱말 하나가 머리를 뱅뱅 돌면서도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아서다. 겨울철 삼림 속에, 내린 눈이 쌓이고 쌓였다가 봄이 되어 낮에 볕을 받아 오후엔 건등이 녹아 내리며 물이 돈다. 하지만 밤에 접어들어 다시 기온이 내려가 물이 돌던 눈의 건등은 얼음으로 변한다. 발로 짚으면 물 위의 살얼음처럼 바삭 하고 꺼져 내린다. 영어로는 crust라고 한다. 이 눈 건등의 얼음진 것을 한 마디의 낱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분명히 노트에는 적혀 있었다. 한 5, 6년 전 어떤 수기를 번역하다가 이 crust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애를 쓰고 사전을 뒤적여 보았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눈얼음이라고 번역했다. 말이면 다 말은 아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넋두리에 불과하다. 나는 얼마 전부터 하루에 단 1분씩이라도 "우리말 큰사전"을 샅샅이 잡아 나가기로 했다. 저 노트에 적었던 그놈을 잡기 위해서다. 그놈을 잡으려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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