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낚시의 즐거움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아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나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닦고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루에 한동안이나마 생활의 실무에서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무료를 끄며 일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이야말로 하루하루가 흐뭇해진다. 즐거움은 반드시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즐거움은 크면 클수록 오히려 지속이 안 되거나 반비례되는 일이 따를 가능성이 짙다. 조그만 은은한 즐거움이야말로 영속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 낚시에는 은근한 정미와 조그만 즐거움이 있는 대신 큰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영속적인 의미가 내재하고 있어서이리라. 언젠가 어느 낚시인의 글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낚시 시즌이 지나고 한참 지루한 겨울 한밤중의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고이 잠든 방 안에서 주인공은 낚싯대를 꺼내 홀연히 휘둘러 고기를 낚아 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이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낚시의 즐거움이고 낚시꾼의 즐거움의 표현일 것이다.
2
낚시꾼에겐 물은 향수와도 같다. 물만 보아도 낚시꾼에겐 저절로 미소가 안겨 온다. 이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그리는 마음에서이리라. 논바닥에 고인 하잘것없는 물이건, 벌판 한구석에 웅크린 웅덩이건 물이면 그저 좋다. 하물며 호연한 물바다를 보았을 땐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오고 속이 후련해진다. 이건 낚시꾼이면 누구나 느껴지는 감회이고 또 낚시꾼만이 누릴 수 있는 흥취일 것이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물이 그립다는 그 자체는 물과 불가분의 사이인 물고기를 그리는 심정일 것이다.
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나무 없는 산처럼 낚시꾼에겐 무의미하니까.
해발 1천 미터 이상 높이의 고원에 가로놓인 장진호는 묘묘한 바다나 다름없다. 추운 지대이고 워낙 물이 깊어서인지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 물빛이 짙다못해 검다. 고기가 놀지 않는 물은 사수나 다름없이 매력이 없고 그 검은 물은 두렵기만 하다. 바라보이는 물은 다 아름답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낚시꾼이라도 붉은 불이나 더러운 물보다는 물의 본연의 자세인 맑은 운치를 아쉬워하게 된다. 고름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듯한 물이야말로 눈을 감으면 낚시꾼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음의 소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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