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살아있는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란 무엇인가
시라고 말하는 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일하는 동안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감동)을 싱싱한 우리말로 나타낸 글이다. 이렇게 시의 뜻을 밝혀 놓고 볼 때, 시가 되는 조건을 세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살아간다 는 것이고, 둘째는 감동 이고, 셋째는 싱싱한 우리말 이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첫째는 무엇을 썼는가 하는 글감(소재)의 문제가 되고, 둘째는 시의 알맹이가 되고, 셋째는 시의 형식, 또는 시가 담겨 있는 그릇 아니면 시가 입고 있는 옷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둘째에 들어가 있는 감동 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시가 감동이 없이 쓰일 수 없고, 감동이 시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첫째(삶)와 셋째(말)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감동 은 삶 과 말 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저절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제목에서 삶 이란 말을 넣지 않은 까닭은 말 의 문제가 그대로 삶 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에서 삶이 빠지면
삶, 곧 살아간다(생활한다)는 것은 넓게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동안에 하는 모든 행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일하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싸우거나 먹거나 무슨 흉내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잠자고 꿈꾸는 것도 삶이고, 방안에 앉아 공상을 하는 것도,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 것도 다 삶이다. 이렇게 보면 무엇을 쓰든지 삶 아닌 것이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글에는 삶이 없다 고 할 때 그 삶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삶이 아니고, 적어도 시의 알맹이가 생겨날 만한 삶이다. 병들지 않은 삶이요, 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따라가기만 하는 삶이 아닌 삶,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을 말한다.
바윗돌 위에서나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는 씨앗이 싹터날 도리가 없다. 잡초가 나 있더라도 적어도 흙이 있고 햇빛이 죄는 땅이라야 씨앗이 싹틀 수 있으니까. 그럼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 미친 짓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는데, 내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다. 미치거나 잠꼬대를 한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대체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이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볼 수 없다. 시인들이 써 놓은 시를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고 다 병든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어느 땅에서고 진리다. 아이들도 일을 하면서 배워야 (일하는 것이 그대로 배움이 되어야) 참 배움이 된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고 쓰고 외우는 공부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만 해야 할 대 사람의 성격은 병들고 비뚤어져 버린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는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 사람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글을 쓰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방안에 혼자 앉아서 생각만 하거나, 글만 쓴다면 그런 삶도 좋지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게 되면 그 생각이 병든다.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 글만 자꾸 쓴다면 그 글이 제대로 쓰일 수가 없다. 그래도 시인과 소설가들은 글만 잘 쓰고 있더라. 그렇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글만 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나는 글만 쓰고 있는 이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제시대고 오늘날이고 많은 문인들이 글만 써 왔는데, 그래도 지난날에는 그 폐단이 좀 덜했지만 오늘날에는 글만 쓰고 있는 사람들이 글의 공해, 문학의 공해를 아주 크게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지난날에 폐단이 덜했다는 것은, 일제시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시인들이 글만 쓰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라난 과정에서는 삶이 있었고, 대체로 일을 하면서 자라났기에 시가 될 만한 땅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물론 지난날에는 삶이 있었더라도 지금 삶에서 떠나 있으면 제대로 쓰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가 아주 병들 정도로까지는 되지 않을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연과 일하는 삶을 떠나서 방안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또 방안에 앉아 생각만 하고 시만 쓰고 있으니, 이런 시가 어떤 알맹이를 담고 어떤 말고 되어 있을 것인가는 그것을 바로 읽어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를 검토하기에 앞서 일제시대부터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시인들의 시를 몇 편 들어서 시와 삶의 문제, 시와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 명시를 모아 놓은 책들의 맨 앞머리에는 흔히 새로운 우리 시의 첫 작품이라고 해서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가 실려 있는데, 그 첫 연이 이렇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1908년에 나온 소년 창간호에 실린 이 시를 두고 오늘날까지 우리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의 역사를 열어 놓은 시라고 하고, 또 너무 생각을 드려내려고 한 까닭으로 현대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 본다. 무엇보다도 이 시를 보면 말이 깨끗하다. 살아 있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이 시인들이 써 놓은 시와 견주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로 쓰여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아주 잘못되었다. 해에게서.. 가 뭔가? 해 란 하늘의 해가 아니고 한문글자인 바다 해 자의 해 다. 그 무렵에는 한문글자를 섞어서 쓸 때라, 요즘 같이 한글만으로 쓰는 시대에 와서는 마땅히 바다에게서.. 로 바꾸어서(번역해서) 써야 하는데, 모든 책에서 이렇게 해에게서.. 라 써 놓았다. 사실은 이렇게 바꿔서 쓰기조차 어럽게 되어 있다. 아직도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들이고 해에게서 꼴로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또 바다에게서.. 라고 써 보았자 우리말이 안 된다. 바다에게서 소년에게 란 우리말은 그때고 지금이고 없다. 바다가 소년에게 라 해야 말이 되지. 시의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는가? 이 시의 제목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시의 제목을 이렇게 우리말일 수 없는 괴상한 말로 붙였다.(물론 소설도 그랬다.) 일본글을 그대로 직역해 놓은 꼴로 쓴 것이다. 이것은 시인들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글로 공부를 하고, 우리 글로 시를 썼지만 언제나 일본말로 된 책만 읽고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지난날의 시인들은 어렸을 때 삶이 있었고, 그 삶 속에서 제대로 우리말을 익혔기에 시를 쓸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었는데, 시의 제목에서는 병든 지식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 썼다는 정지용 시인의 시 제목은, 한문글자로 쓸 수 없는 바다 별 달 나무 같은 말만 한글로 쓰고, 그밖에 한문글자로 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한문글자로 썼다. 심지어 유리창 기차 까지 한문으로 써 놓았다. 또 우리말로 쓰면 될 것을 일부러 한문으로 써서, 배 멀미 라 할 것을 선취 라 쓰고, 봄눈 이라면 될 것을 춘설 이라 했다. 그리고 보통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한문글자를 시의 제목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마구잡이로 섰다. 우리말을 그렇게 구슬같이 다듬어 썼다는 시인이 어째서 이토록 우리말일 수 없고 우리 글일 수가 없는 글로 시를 썼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용 시의 이 모순된 비밀은 시인의 삶과 말의 관계를 생각할 때 쉽게 풀어진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삶이 없이 시만 썼던 식민지 시인의 비극이었으니,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겠는가. 이들은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제 겨레의 말로 쓸 수밖에 없었고 우리말로 버리지 못하고,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을 쓰지만,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로 쓰지만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문글자를 섞어서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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