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류달영편" 류달영(1911~2004)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경기도 이천 출생. 수원 고농 졸업. 미네소타 대학 수학. 서울 농대 교수.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 역임. 그는 수필 "신문 망국론" "흙과 사랑"에서는 경세가로서의 풍모와 자연 찬미를 보여 주었다. 담백하고 진지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철학적인 필치로 정평이 높다.
겨울 정원에서
정원에 흰 눈이 가득하게 덮였다. 연인을 안으려고 벌린 두 팔처럼 광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겨울철에는 우리 평화 농장 좌우편에서 유난스레 푸르르다. 우리 농장도 광교산의 한 줄기로 완만하게 뻗어내린 경사지이다. 왼편으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리고 바른편으로 제법 노송의 티가 도는 수령 백 년 안팎의 송림이 길게 둘러 있어 우리 농장의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다. 농막 주위에는 십여 년 전, 내가 이 땅을 개간하던 무렵에 심어서 가꾸어온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크게 자라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해마다 땅을 파고 거름을 묻고, 가지를 간추려 주고, 벌레를 잡고 병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하면서 지성스럽게 가꾸어 온 나무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그루 정들지 않은 것이 없다.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심어 가꾼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고 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그대로 우리집 가족들이다. 이제는 서리 맞아 낙엽이 져서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들이 못가에도 언덕 위에도 잔디밭가에도 정자 주위에도 을씨년스럽게 찬 바람에 떨고 서 있다. 각종의 산새들이 몰려와 앙상한 가지 위에 앉아서 재재거릴 때에는 잎사귀 하나 꽃 한 송이 없는 나무들은 더욱 살벌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라보면 어느 나무 어느 가지 하나도 오달진 눈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
목련. 라일락. 산수유 가지에는 탐스러운 꽃을 잉태한 야무진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의 수피 속에는 강인한 생병이 충만해 있다. 손으로 나무 줄기를 어루만져 보노라면 나무와 나의 생명이 서로 하나가 되어 흐르는 듯한 삶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버드나무, 벚나무, 백양나무, 자작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박태기나무, 아기씨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백인의 용기를 가진 도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싹틔울 때와 꽃 피울 때와 잎을 떨어 버릴 때를 올바로 아는 선지자처럼 느껴진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축이라고 할 것이다. 차원이 높을수록 소박하고 떫은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함축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 나무들은 네 계절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함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그렇게 메마르고, 또 그렇게 외로워 보이건만 겨울 나무들의 가지가지에는 이미 봄날의 찬란한 꽃 세계도 신록의 청신한 향연도 충분히 마련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씨 심어 가꾸어 기른 나무들 사이를 무한의 애정을 느끼면서 거닌다. 세월이 내 머리칼을 은실로 표백하면서 쉬지 않고 흐르고 있건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무들을 어루만지면서 흰 눈 위를 거닌다. 봄이 돌아오면 시냇가의 능수버들은 어느 나무보다도 일찍 꿈처럼 아련한 초록으로 실가지들을 물들이고 흐느적거리겠지. 언덕 위의 산수유나무는 잎이 돋기도 전에 잔설 속에서 황금의 꽃을 마술처럼 가지마다 푸짐하게 피우겠지. 그리고 진달래, 개나리, 미선, 백목련들이 일찍 피기 경쟁을 벌일 것이고 철쭉, 아기씨꽃, 살구, 매화, 앵도, 홍도, 백도, 박태기 들이 각각 제 시간을 찾아 피어 나겠지. 모란, 옥싸리, 모코렌지, 레드멘들이 차례차례로 뒤를 이어 피겠지. 언덕 위의 과수원의 사과나무, 배나무도 푸짐하게 꽃을 피울 것이고, 숲 속의 자작나무, 백양나무, 은사시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 밤나무꽃들도 멋을 아는 눈에는 버릴 수 없는 풍취를 심어 줄 것이 틀림없다. 그 무렵에는 연못에 수련의 둥근 잎이 물 위에 몇 개씩 동동 뜨기 시작하겠고, 금잉어 떼들이 물을 굽어 보는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수면에 호화롭게 떠올라 조를 것이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깊은 겨울날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칠 것 없이 비쳐 오는 겨울볕을 받으면서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뚜비와 함께 눈 위를 거닌다. 잎 하나 지니지 않은 겨울의 낙엽수들은 제각기 특유의 골격과 수형을 지니고 있어 제나름의 본 모습을 보여 준다. 수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들은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들을 감상해 볼 것이다. 그 소박하고 깊이 있고 떫은 멋에 취하여 반드시 삼매경에 잠기게 될 것이다. 난만한 봄을 마른 가지에 빈틈없이 준비하고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봄날을 의심 없이 믿고 기다리는 겨울 나무, 눈서리와 매운 바람을 희망 속에 꾸준히 견디고 참는 침묵의 겨울 나무, 볼수록 믿음직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탁월한 예술인 같기도 하고, 천년을 내다보는 철인 같기도 하다.
겨울 정원의 낙엽수 사이를 거니는 멋을 나는 점점 즐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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