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일기글 쓰기 - 일기글 어떻게 쓸까 (3/4)
유식한 말을 쓰지 말고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있을 신현복 군은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해서 국민학생 때 쓴 것을 일기문집으로 한 권(현복이의 일기), 중학생 때 쓴 것을 두 권(자물쇠여 안녕, 슬픔에서 축복으로) 낸바 있다. 여기 들어 보이는 것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쓴 글인데, 슬픔에서 축복으로 라는 책 맨 끝장에서 좀 짧은 글들을 고른 것이다.
이사
5월 13일 (토) 비오다 맑음
난 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 방, 내 책상이었다. 그렇다. 우린 이미 이삿짐을 옮겼다. 장차 먼 곳으로 이사해야만 할 거사는 장초의 예상과는 반대로 우린 한 동네에서 짐을 옮긴 것이다.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이삿짐을 옮겨 놓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 놓지도 정리 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 방은 다르다. 책상 이 오기가 바쁘게 난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 넓기만 하던 내 방이 책 무더기로 갑자기 책천지 가 되었다. 두 시간이 훨씬 넘었다. 내 옷은 먼지 자국에 심히 더렵혀져 있고, 다리는 다리대로 아파왔다. 무거운 이삿짐을 들고, 메고, 2,3층 사이를 돌았기 때문이다.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기분만은 정말이지 상쾌했다. 난 내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내 책상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즐거움과 온갖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싶어하던 내 방이었다. 늦은 밤, 무슨 일로 내 옛집에 찾아 갔을 때, 그것들은 이미 검은 아가리를 내놓고 나를 맞았다. 세 식구와 그 살림살이와 책들을 쑤셔 박기엔 너무나 비좁았던 우리 방도 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피어 오르는 옛 향수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다. 언젠가, 이 옛집은 곧 세워질 새 집을 위하여 허물어지리라. 그럼 난 슬퍼해야 하리라. 엉엉 울어야 하리라. 그러나 난 옛집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돌아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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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한 날에 쓴 일기다. 중학생이 되어도 3학년에 올라간 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제 방을 갖게 된 기쁨이 나타나 있다. 밤늦게 옛집에 찾아갔을 때 느낀 것도 잘 잡았다.
- 언젠가 이 옛집은 곧 세워질 새 집을 위하여 허물어지리라. 그럼 난 슬퍼해야 하리라. 엉엉 울어야 하리라...
이렇게 글월의 끝을 -다 로만 쓰지않고 -리라 를 자연스럽게 섞어 써서 싱싱한 문장이 되게 한 것도 능숙한 글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대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이삿짐을 옮겨 놓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놓지도 정리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첫머리부터 읽어 가다가 이 대문에 와서 누구든지 좀 어리둥절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삿짐 옮긴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의미니 뜻 이니 하는 말이 나와서 아무래도 좀 부자연스럽고, 말을 꾸며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이런 정도의 글이야 손끝에서 저절로 나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책과 글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이런 글이 아무래도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글을 이와 같이 엉뚱하다고 느끼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이 갖는 글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결코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깨끗하고 건강한 느낌인 것이다.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뜻이다 이 글월을 나 같으면 다음과 같이 쓰겠다.
이삿짐을 옮기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놓지도 정리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고쳐 쓴 것과 본디 써 놓았던 글을 견주어 보기 바란다. 그러면 의미니 뜻 이니 하는 말이 괜히 들어가 있고, 말을 머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고 한 말도 내가 쓴다면 그래서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든지, 온 몸이 지쳐 맥이 빠졌다 고 쓰겠는데, 이런 말까지 잘못 썼다고 나무라지는 않겠다. 아무튼 유식한 말 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말에서만은 유식 한 것이 사실은 무식한 것이다. 이 밖에 낱말 두세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 내 옷은 먼지 자국에 심히 더럽혀져 있었고
여기 나오는 심히 는 많이 아주 크게 몹시 이런 입말 가운데 어느것이나 알맞은 말을 골라 썼으면 좋겠다.
- 그러나 기분만은 정말이지 상쾌했다.
여기 쓰인 상쾌했다 는 시원했다 고 쓰는 것이 더 낫겠다.
- ... 피어오르는 옛 향수까지...
이 대문에서 향수 란 말을 썼는데, 그리움 이라 해도 될 것이다. 다음은 이사 에 이어서 오는 글이다.
급변하는 시대
5월 26일 (금) 맑았다
20세기 초 이후 시대는 급변했습니다. 이 시대는 그 사회 구성원을 볼 때도 70-80대(세)는 공맹교육을 받고, 50-60대는 일제 식민교육을, 30-40대는 미국식 교육을, 그 아래 세대는 시대 모순을 비판하는 세력으로 자라나 오늘날 이 민족의 가치관은 크게 혼동을 빚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급변하는 과도기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물질문명의 과도기란 것은 우리 피부로 절실히 느끼는 문제입니다. 우리 공업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입시 준비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컴퓨터를 배우라고. 급변하는 이 시대에 컴퓨터가 보편적으로 보급된 10년,20년을내다보고 꼭 컴퓨터 이론이라도 배워라. 그러나 난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세상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급류를 타고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급류를 타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시대가 서글펐다.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시대가 서글프게만 느껴져 무한정으로 눈물을 쏟고 싶어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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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공업 선생님이 컴퓨터를 배우라고 하신 말씀을 고마워하면서도 그러나 난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세상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급류를 타고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급류를 타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시대가 서글펐다 고 한 것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 말이 되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로 오랫동안 자기를 가꾸어 왔기에 이만큼 주체를 세울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쓴 말은 왜 이런가?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이건 영 모양을 구겨 버렸다. 자리를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 라고 했으니 너무나 유치한 말이다. 자기를 이런 이상한 말로 분칠해서 어떤 어른들 모양을 내어 보이려고 한 것을 보면, 앞에서 해 놓은 말조차 책에서 읽은 남의 말을 흉내낸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이 구절을 모두 싹 없애고 나는 이라고만 써서 읽어 보라. 비로소 글이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끝에 가서 무한정으로 눈물을 쏟고 싶어한단 말이다
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 대문은 장난하는 기분으로 쓴 것 같다. 또 하나, 이 글은 앞쪽의 반쯤은 합니다 체로 썼고, 뒷쪽 반은 한다 체로썼다. 글에 따라서는 이렇게 합니다 와 한다 가 뒤섞여도 자연스럽게 읽히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글에는 두 가지 글체로 써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왜 이렇게 썼을까? 처음부터 한다 로 써야 옳았을 것이다. 이밖에 낱말 몇 가지를 들어 본다.
혼동 이란 말을 쓰더라도 뒤섞음 이나 섞갈림 이라고 써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혼란 이란 말을 쓸 것을 잘못 썼다. 특히나 는 더구나 하면 아주 고운 우리말이 된다. 물질문명의 과도기 이것은 무슨 말인가? 보편적으로 이것은 두루 하면 된다. 급류 이것은 급한 물살 이나 급한 흐름 이다. 표류하는 은 떠내려가는 하면 된다. 우수 이것은 근심 이다. 근심 이라고 쓰면 좋은 글이 안 되고, 우수 라고써야 그럴듯한 글이 되고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글을 쓸 수없을 것이다.
감상자 이것은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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