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상편"
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의 웅뎅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뎅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 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 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 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벌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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