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상편"
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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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 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 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 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기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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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뎅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워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 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했으면 좋을까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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