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질고 너그러운 겨레의 피
앉은뱅이 청년에게서 신문을 산 부인네의 '가슴이 뿌듯했다'는 그 행복감-, 20원으로 살맛을 잃었다는 D여사의 비애-.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데도, 하나 공통된 것은 둘 다 지극히 작은 불씨에서 기쁨이, 슬픔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남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 주는 것이 '선의의 불씨'라면, 절망과 비애에 연하는 또 하나의 '불씨'도 그 위력은 결코 그만 못지않다. 성냥개비 한 개로도 도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는, 그것이 '불씨'의 작용이다.
6.25직후 한강 가에 물밀듯 피난민들이 밀려들었을 때, 서로 먼저 건너려고 자전 뭉치를 손에 쥐고 뱃가에서 사람들이 붐벼대는 그 수라장에서, 웬 노인 사공 하나가 '선가 없는 사람은 이리로 오시오.'하고 배 한 척으로 진종일 사람을 실이 나르면서 일체 돈을 받지 않더란 이야기를, 바로 그 당시, 그 배로 한강을 건넌 이에게서 들었다. 어떤 사람이 돈 뭉치를 그 사공 앞에 내밀면서, "이걸로 먼저 우리 식구를 실어 주시오."하자, 노사공은 '돈?' 하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전히 선가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태우더란 얘기다. 불씨 하나에 겨누기로는 너무나 황송하고 우러러보이는 이야기다. 그러나 애 겨레의 혈관 속에 흐르는 어질고 너그러운 피가 어찌 이 날의 이 노사공 하나의 것이라고 단정하랴.
'-구름장이 제아무리 두꺼워도 해를 잃어버렸다고는 행여 생각지 맙시다. 두꺼운 구름장을 헤치고 해는 또다시 나타납니다.'
오랜 친구인 D여사 내외분에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설령 그 햇빛을 눈으로는 목 본다 하더라도 그 날을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 반딧불 같은 작은 '불씨'겨레의 혈관 속에서 다시 깨어날 '선의의 불씨'를 우리는 믿고 살자고. 행복이란, 목마를 때 마시는 물 한 그릇. 아랍과 이스라엘이 겪은 이번 전쟁에서 생채기 하나 없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이스라엘 사막 지대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물이 없어서 말라 죽은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극단의 예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의 '굶주림''목마름'에도 아쉽고 긴한 것은 마실 수 있는 물 한 그릇-선의의 불씨 하나-그것이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보람 있게 살 수 있고, 그것이 없을 때 절망의 구름장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는 메테를링크의 찌루찌루 미찌루 이야기-우리가 찾는 '행복의 불씨'도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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