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선의의 불씨
또 하나의 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렀지요. 이것 저것 사다 보니 자질구레한 종이 뭉치가 대여섯 개나 됐나 봐요. 그걸 양쪽 손에 다 들고 오느라니까, 시장 안에서 신문을 차는 앉은뱅이 청년이 있잖아요. 스무남은 살이나 됐을까요. 팔에다 무슨 보급원인가 그런 완장을 둘렀어요. 그런데도 불구자 같은 궁기가 없고 퍽이나 명랑해요, 얼굴 표정이-. 밖에서 별로 신문 같은 것 산 일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무엇해서 10원을 꺼내서 신문을 샀지요. 두 장인지 석 장인지 주는 대로 받아서 그걸 또 짐 가진 손에다 구겨 쥐고 그리고 몇 걸음 가자, 뒤에서 '아주머니!' 하고 누가 불러요. 딴 사람을 불렀거니 하면서도 짐짓 돌아다 보았지요. 그랬더니 가게 앞에 웬 중년 남자가 서서 그 가게 주인인가 봐요, 아주 심상한 얼굴로 '그거 이리 내세요.'하고 손을 내밀잖아요. 돈을 다 치렀는데 어째서 달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라니까 무심결에 내주었지요, 그 가게에서 산 건 아니지만... 그걸 받더니 남자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봉지에다 그 작은 종이 뭉치들을 하나하나 넣어 주지 않겠어요. 그런 호의를 모르고 하도 무뚝뚝하게 내놓으라기에 물건 산 걸 보자는 줄로만 알았지요...
"미안해서 어떡하나..."
제가 그러니까 남자는 딴 말은 없고,
"아주머니, 저 애한테서 신문 사셨지요?"
신문 사는 걸 아마 보고 있었던가 봐요. 그게 무슨 고맙다는 인사같이 들리더구먼요...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가벼운지...무슨 좋은 수나 난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부듯하더구먼요...
아는 이를 만나 거리에서 차 한 잔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일행 중 부인네 한 분이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곁에서 듣는 나까지 무언지 마음이 흐뭇했다. 거추장스런 종이 뭉치들을 한데다 넣어 주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는 아니다. 그만한 친절도 요즘 우리네 생활에서는 보기 힘드는 일이지마는 이 얘기에는 또 하나 울려 오는 다른 여운이 있다. 육체의 불행을 짊어지고도 제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의 청년-그 청년에게서 신문을 샀다는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선의를 고마운 일로 알고 치사하는 또 하나 다른 '선의'의 눈-, 가게 주인의 그 무뚝뚝한 친절은 그 치사의 소박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상이 세워질 커다란 공로도 아니요, 무슨 상이나 표창을 받도록 의젓한 미담도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보면, 이 작은 '불씨'--평범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선의',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생활에서 제일 아쉬운 주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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