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영화
수업 제한에서 오는 양화 결핍으로 말미암아 요사이 거의 어느 상설관에서나 한 번 상영했던 영화의 재상영을 번번이 본다. 여간한 예술품이 아니고는 두 번 이상 감상하고 싶은 흥이 솟지 않는 것이나 영화의 감상은 짧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 한 번 기억에 남았던 일편에는 식욕이 동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두 번째 보러 간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영화라는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대개는 처음에 느꼈던 감흥이 반감되고 품고 있던 아름다운 환상까지 도리어 부서져 버리고 마는 것이 통례다. 한절 한절의 컷의 구성에는 간혹 치밀한 수법과 자연스러운 연기가 보여 그 이상의 표현 방법은 없으리라고 감탄되는 대목도 있으나 전체로 흠이 보여 오고 결함이 드러나게 되어 겨우 이 정도의 영화였던가 하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감독과 연기자들이 인생을 여실히 그려 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나 나타나는 화면이--불과 몇 센티 평방의 셀룰로이드 딱지가 종시 말 안 듣는 것이다. 연기의 부족으로 허덕거리는 장면을 대할 때는 꾸며 놓은 세트 장치 앞에서 상을 찡그린 감독이 메가폰으로 고함을 치며 삼군이 아니라 삼문 배우들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가엾게도 귀에 들려 오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뿐만 아니다. 참으로 감독자 자신의 두뇌와 천분에 더 많이 달렸으니 그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고 연기자에게 가르쳐 주는 표정과 동작이 과연 진실을 포착한 것이어서 만인을 똑같이 감동시켜 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슈탄벅이나 크레엘이나 듀비베가 아무리 능청맞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각각 한 개의 형이 있는 것이요, 결국 자기류의 발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개성의 조작이니 그것으로 족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 자기류로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잡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간한 천재를 가지지 않고는 벌써 현대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게 되었다.
한다하는 천재도 까딱하다가는 일개 무명의 관객에게 뜀을 받고 계발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거리의 구석구석에 할거하고 있는 군웅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그래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여 왔을 것인가. 폐데일까 루놜일까 채플린일까. '제7천국'을 보려니 성탄제 때의 아동 연극의 정도 밖에는 못 되어서 는적거리는 남배우의 낯짝에다 정신이 번쩍 들게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났다. '장군 새벽에 죽다'도 두 번째는 지루하고, '유령 서로 가다'는 장난과 꾀가 너무나 드러나 보였다. '미모사관', '춘희', '다드워스', '대지' 등이 아무리 힘을 들였다고 해도 이 역 두 번 본다면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며 비교적 솔직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마라, 샵드레드', '야성의 부르짖음'이었다.
제작들이 교묘한 꾀를 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작품의 품격에서 받는 감동 속에 숨어 버려서 순진한 눈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보다는 원작인 소설편이 한층 우수함은 웬일일까. 훌륭한 영화라고 하여도 그것이 소설의 풍미와 암시를 항상 덜어 버리는 것은 일단 시각화된 화면은 아무리 우수한 한 폭이라고 하여도 벌써 결정적 운명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까닭에 소설이 주는 풍부한 환상을 옹색하게 한 까닭으로 규정해 버리고 이지러뜨리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영화란 아주 잘 된 영화가 영화이지 섣불리 되었을 때는 가장 졸렬한 소설보다도 더욱 졸렬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소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난은 이 점에도 있다. 차라리 '미완성 교향악'이나 '악성 베토벤'을 허물없이 본 것은 음악의 덕이었고 '모던 타임스'에서 끝까지 진진한 흥미를 느낀 것을 풍자보다도 웃음의 덕이었다.(이 작품의 풍자란 너무도 진부하고 상식적이다. 채플린의 독창적인 교태와 거기서 솟아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마땅한 듯하다.) 섣불리 본격적으로 겨루다가 실패라는 편보다는 차라리 웃음과 음악으로 대독시키는 곳에 영화의 다른 길이 암시된다. 근대의 걸작은 '아부일족'이었고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봐이에 주연의 '마이아링크'다. 하기는 봐이에의 연기도 벌써 코에 냄새가 미칠 지경으로 되고 말았다.
대체 배우의 생명이 그다지 긴 것이 못 되어서 아무리 명우라고 해도 작품을 4,5편 거듭하면 연기의 형이 결정되어 버린다. 아리볼이나 풀무니, 가르보나 다류가 아무리 차례차례로 연기를 보인다고 하여도 신축자재한 애교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에 이르러 고정해 버림은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데아나다빈이 첫 작품에서 벌써 싫증이 남은 웬일일까. 가령 애수가 얼굴에 잔뜩 서리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특이한 종류의 배우는 나타나지 않는가. 국외자의 욕심이란 한량이 없는 것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