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희승편" 이희승(1896~1989)
국어 국문 학자, 시인. 호는 일석. 경기도 개풍 출생. 경성 제대와 일본 도쿄 대학원 졸업. 문학 박사. 서울대 교수, 동아 일보 사장 역임. 시집에 "박꽃", 수필집에 "벙어리 냉가슴"이 있고 "국어학 개설" "국어 대사전" 등의 저서가 있다. 정확한 문장과 전형적인 우유체의 문체로 교과서에 흔히 실리는 글들이다.
독서와 인생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갈대'라고 한 것은 아마 약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갈대는 웬만한 바람일지라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저리 쏠리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와 같은 약한 존재이면서, 생각하는 작용을 한다. 이 '생각한다'는 일, 이것이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한 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이르는 것도, 이 생각하는 작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그만큼 놀랍고 위대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문화를 창조하여 내려 왔고, 또 그것을 흐뭇하게 누리고 있는 것은 온전히 사고작용의 덕분이라 할 수 있으며, 오늘날 월세계를 생각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극장에 구경을 갔더니, 막간에 배우 한 사람이 나와서 재담을 하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방울이 무엇이냐?' 하는 수수께끼를 내고서, 제 스스로 해답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해답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제일 큰 방울은, 빗방울, 물방울, 은방울, 말방울, 왕방울, 죽방울 등 어떠한 방울도 아니요, 곧 사람의 '눈방울'이라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사람의 눈방울 속에는 안 들어 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인간, 동물, 주택, 산천 초목 등의 모든 풍경이 동공을 통하여 사람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만일 높은 산에라도 올라서면 더욱 넓은 세계가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천문대 망원경이라도 빌리게 된다면, 수억의 별이 있는 큰 우주가 사람의 조그마한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니, 눈방울이 과연 크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사람의 사고 작용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도(즉 공간을) 생각하여 볼 수 있고, 태양계 생성의 초기로부터 지구 냉각의 말기까지도(즉 시간을) 생각하여 보려 하고 또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이와 같은 생각의 범위를 어떻게 넓히고 높이고 깊게 하겠느냐 하면, 별수없이 남의 지식을 빌려 오는 도리밖에 없다. 빌려 오되, 한 사람의 지식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의 지식을 대량으로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현대인 지식뿐만 아니라 옛 사람의 지식도, 신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지식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지식도 빌려 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고 작용의 도를 넓히고 높이고 하여, 그 활동을 활발하고 왕성하게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서적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고 작용을 활발하고 왕성하게 하기 위하여 서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피차간에 가진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 수단으로 언어라는 것을 사용한다. 그런데, 언어는 이것을 이용하기에 힘이 안 들어 용이하고, 또 돈이 안 들어 경제적으로도 유리하지마는 표출하는 순간에 사라지고 말아서 보존하여 두고 되풀이하여 들을 수가 없고, 또 사람의 성량은 한도가 있어서, 먼 곳에까지 들릴 수가 없다. 따라서 아무리 목소리가 큰 웅변가라 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수효는 무한정 많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것을 언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는다고 이른다. 이 제한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곧 자기의 하고 싶은 말을 글자를 써서 기록으로 바꾸어 놓으면 된다. 그러면, 이 기록을 두고두고 볼 수도 있고, 또 먼 거리에 보낼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돌려 볼 수도 있다. 사람이 기록을 만들 필요를 이런 일에서 절실히 느끼었고, 따라서 문자를 발명하여 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끼리 서로 만나서 회화를 교환하게 되면, 서로 전달하고 싶은 생각을 곡진하게 철저하게 할 수 있는 편리가 있는 반면에, 그 말로써의 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가 잡히고 조리가 밝을 수는 없다. 대개는 그 표현이 산만하고 중복이 있고 군더더기가 붙어서 간결하고 세련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곧 자기의 생각을 정돈하여 기록에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정돈된 생각을 정돈하여 기록에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정돈된 생각을 조리를 따져 가며 체계를 이루어 기록하여 내면, 그것이 곧 책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용 유해한 생각을 서적의 형태를 빌려서 만들어 내는 일은 없고,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바를 질서 있게 체계 있게, 그리고 조리가 밝게 기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적은 사색의 결과요 지식의 창고인 동시에, 사색의 기록이 되며, 지식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빵으로만을 살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의식주의 생활을 충족시키면 인간의 할 노릇을 다 하였느냐 하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의식주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불가결한 필수 조건이지마는 사람은 그만 못지않게 정신 생활의 신장을 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신 상태에만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생활을 좀더 고도화, 심화, 미화한다. 이것이 곧 이상을 추구하는 정열이다. 그리고 이 정신 생활의 고도화를 실현하려면 각 개인의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상의 추구뿐만 아니라, 당면한 현실 생활을 질서 있게 평화스럽게 영위하려는 데도 각 개인의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 하면, 이러한 수양 없이는 사람은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기 쉽고, 따라서 사회악을 지어 내게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이나 덕행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은 인류 생활의 이익이나 행복을 가져오기는커녕 해독과 불행을 자아내기 쉬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수양에 관한 서적은 사람인 이상 누구에게나 필요한 등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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