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 (3/3)
유성룡이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 임금께 아뢰니 모두들 크게 놀랐다. 임금께서는 크게 실망하시어 최일령을 불러 물으셨다.
"명나라 황제가 구원병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이제 우리 조선은 망하였도다." 최일령이 엎드려 아뢰었다. "저하는 너무 염려하지 마옵소서. 구원병은 반드시 올 것이옵니다." "오, 경은 그렇게 생각하오?" "네, 전하. 그들이 스스로 구원병을 보낼 것이옵니다." 임금께서는 최일령이 천문 지리에 밝아 능히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걸 알고 있는 터라 오직 구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왜장 평수길은 삼만 군졸을 거느리고 경상우도로 짓쳐 들어가 진주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진주 기생 모란이라는 여인이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한 꾀를 생각해 내었다. (내 목숨을 걸고 왜적이 괴수를 잡으리라.) 이에 모란은 촉석루에다 술상을 마련하고 평수길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평수길이 부하들을 이끌고 앞을 지나가는데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은은하고 붉은색 치마 물빛을 비쳤는데 향기가 십 리 안팎에 진동하는 것이었다. "선녀가 인간 세계에 하강했단 말이냐? 웬 미인인고?" 평수길이 정신이 황홀하여 멍하니 바라보자 모란이 교소를 지으며 좌석을 같이하기를 청했다. "장군께서 오시기를 소녀는 눈이 빠지게 기다렸나이다. 오셔서 술 한잔 하소서." 평수길은 입이 헤 벌어져 즉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술을 즐기니 얼마 가지 않아 크게 취했다. 이에 모란이 지키는 군사가 없을 때를 취하여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니, 그 목소리와 뛰어난 자태는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좋도다!" 평수길이 흥을 이기지 못하고 모란을 껴안고 함께 춤을 즐겼다. 이때를 기다려 모란은 평수길을 꽉안고 촉석루 난간에서 뚝 떨어져 깊은 강물 속으로 떨어지니 어이하리오. 모란의 열 손가락에는 굵은 반지를 빠짐없이 끼어 있어 평수길이 벗어나려고 용을 써도 모란이 꽉 낀 팔을 풀지 못하고 원통한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앗, 대장님이!" 보고 있던 왜군들이 크게 놀라 즉시 평수길의 시체를 찾아 건져내으니 이미 싸늘히 식은 시체였다. 그리고 모란이가 죽으면서도 어찌나 세게 껴안았던지 아무리 풀려고 해도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왜군들은 하는 수 없이 평수길과 모란의 시체를 함께 가지고 총대장 청정의 진으로 후퇴해 버렸다.
한편. 중국에서 구원병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임금께 하루는 진주목사가 보내는 장계가 올라왔다. 임금께 장계를 펼쳐 보시니. (이미 은퇴한 재상 이순신이 왜적을 맞이하여 싸웠던 바 거북선을 이용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배를 깨트렸나이다. 그러다가 한산도에서 적의 수병을 크게 깨뜨리고 자신은 적탄에 맞아 죽었나이다. 그리고 진주에 모란이라 하는 기생이 있사온데 오직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런 마음으로 왜장 평수길을 데리고 죽었나이다. 세상에 이런 충절이 없을 듯 하여 감히 엎드려 아뢰나이다. 전하께서는 통촉하시옵소서.) 하였거늘, 임금께서 다 읽으시고 용안에 눈물을 지으시며 분부하셨다. "세상에 이런 충성과 열녀가 어디있단 말인가? 이제 시절이 태평하거든 이순신을 충무공에 봉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모란은 촉석루 앞에 비를 세워 그 충렬을 기리도록 하라."
이때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서 군사를 청하로 온 사신을 그저 보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늘 근심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밤에 한 장수가 홀연히 나타나 엎드려 절하며 아뢰는 것이었다. "형님은 어찌하여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지 아니하나이까?" 황제는 듣고 크게 놀라 물었다. "그대는 귀신인가 사람인가? 어찌하여 짐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는가?" 장수가 처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소자는 삼국시대의 관운장이옵나이다. 형님은 유헌덕이 도로 이 세상에 태어나 황제가 되옵고 막내 동생 장비 또한 다시 태어나 조선 나라 왕이 되었나이다. 소장은 미부인(유헌덕의 아내)을 모시고 조조에게 가 있다가 형님을 만나러 떠날 때 죄없는 사람을 죽이었으므로 미처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였나이다. 해서 조선을 지키었더니 지금 왜적이 조선을 침략하여 땅을 거의 다 빼앗고 종묘 사직까지 유린하는데 잘못하면 조선의 사직이 오늘 내일로 끊어질까 염려되나이다. 그런데도 형님께서는 구원병을 아니보내시니 어인 일이오니까?"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크게 울적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 장수를 자세히 살피더니 신장이 구척이요, 손에 청룡 은월도를 비껴들고 봉의 눈을 부릅뜨고 세 가닥으로 늘어진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있으니 분명히 관운장이 분명했다. 황제가 크게 당황하여 용상에서 일어나 절하며 물었다. "장군은 누구를 보내라 하시나이까?" 관운장이 다시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구원병은 팔십만 명을 보내시되 대장은 이여송을 보내시면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을 덧붙였다. "형님께서 이 아우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옵니다." 그런 말과 함께 문득 간곳이 없거늘 황제가 크게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이에 이튿날 조회 때 신하들이 모두 모이자 하문하셨다. "짐이 간밤에 한 꿈을 꾸었더니 조선나라 경계선을 지키는 관운장이 와서 구원병을 보내라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좌승상이 엎드려 아뢰었다. "관운장은 본시 충절로 유명한 장수이니 지시대로 하옵소서." 황제가 옳게 여겨 즉시 팔십만 명의 대병을 일으키게 하고 익주자사로 있는 이여송을 불러다가 명하였다. "짐이 경의 용맹이 재주를 잘 알고 있도다. 이제 조선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고 공을 세워이름을 빛내고 돌아오면 이름이 청사에 올라 나라의 일등 공신이 되리라." 이여송이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소신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동방예의지국으로 나아가 왜적을 토벌하고 오겠나이다." 황제가 크게 기꺼워하시며 즉시 대원수의 칭호를 내리고 대장기를 주었다. 이윽고 이여송이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군사를 이끌고 나아갈 때 만조 백관이 사십리밖까지 나와 전송하며 이구 동성으로 말했다. "장군이 만 리 밖의 동국에 나아가 크게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그 공을 잊지 않으리라." 이여송이 가슴을 펴고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그마한 왜놈을 어찌 근심하리오." 이여송이 팔십만 명의 대병을 지휘하여 행진할 때 장수들에게 일일이 소임을 맡기는데 아우인 이여백으로 선봉장을 삼고, 이여월로 그후 군장을 삼았다. 그리곤 전군에 엄히 명령을 내렸다. "만약 군령을 태만하게 이행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것이로다." 이여송이 천리준총마에 높이 올라 앉아 가는데 머리에는 용의 무늬가 새겨진 투구를 썼고, 몸에는 황색 전포를 걸치고, 오른손에 팔각도을 들고 왼손에는 대장기를 높이 들었는데 황금 글씨도 '대마사(지금의 국방부 장관)대원수 명나라 이여송'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팔십만 명의 대병이 조선으로 향하니 기치 창검은 햇빛을 가렸고 북소리, 호각소리는 천지를 뒤엎는 듯했다. 얼마후에 굽이쳐 콸콸흐르는 압록강을 건너니 미리 소식을 듣고 조선에게 임금이 제신을 거느리고 몸소 백리 밖에까지 나와 맞이했다. 인사가 끝난후 자리에 앉아 임금께서 원수에게 말씀하셨다. "원수께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자와 먼길에 수고를 하시니 과인의 마음이 매우 불안하오이다." 이여송이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대왕께서 뜻밖의 왜란을 당하셨으니 오죽이나 근심하시리까?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고 소장이 왔으나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지가 않으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임금꼐서 뜻밖의 이 말을 들으시고 크게 근심이 되어 최일령을 불러 물으셨다. "이원수가 그냥 돌아가겠다고 하니 이 무슨 변고인고?" 최일령이 엎드려 아뢰었다. "전하게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이원수 막사 뒤에 칠성단을 세우고 축문을 읽으시며 통곡하시오면 원수가 듣고 마음을 돌릴 것이옵니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즉시 영을 내리셨다. "즉시 칠성단을 세우라" 그리고 칠성단에 올라 슬피 통곡하시니 이여송이 듣고 물었다. "저 우는 소리는 어니서 들리는 것인고?" 수하 장수가 살피고 나와 보고했다. "조선왕이 원수께서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우시나이다." 그러자 이여송이 문득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기이하도다. 내가 조선왕의 관상을 보니, 왕후의 상이 아니어서 실망했더니 이제 울음 소리를 들으매 용의 울음 소리가 분명하도다. 오백년 사직이 분명하도다." 이에 회군하기를 단념하고 장수를 불러 소임을 맡기는데 조선장수가 구름 모이듯 했다. 평안도 평강 땅 태생인 김응서, 전라도 전주 출신 강홍엽, 황해도에서 온 김승태, 함경도 태생인 유홍주, 강원도의 백철남, 경기도에서 온 문둔황 등 모두가 범 같은 장수들이었다. 각기 갑옷 투구를 갖추고 이여송에게 인사를 올리니 원수가 보고 크게 칭찬했다. "조선 같은 조그만 나라에 이렇듯 영웅 호걸이 구름같이 많으니 기이한 일이로다." 이어 그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높은 깃대 끝에 황금 만 냥을 달고 말했다. "그대를 중에 저기 달린 황금을 떼어 오는 자가 있으면 선봉을 삼으리라." 그러자 한 장수가 즉시 몸을 날려 철추로 치니 황금이 여지없이 떨어졌다. 박수 갈채 속에 다시 한 장수가 내달아 남은 황금을 가지고 비호같이 동라왔다. 이여송이 보고 물었다. "저들이 누구인고?" 수하 장수가 공손이 아뢰었다. "먼저 장수는 김응서라 하옵고, 두 번재 장수는 강홍엽이라 하오이다." 이에 이여송은 김응서로 선봉을 삼고 강홍엽으로 후선봉을 삼았다. 그리고 유홍수로 좌익장을 삼고 백철남으로 우익장, 김일관으로 군량장, 그리고 남은 장수를 모두 후군장으로 삼고 군사를 몰아 강원도에 있는 왜군 총대장 청정의 진으로 향했다. 임금께서는 유성룡을 불러 특별히 명하였다. "경은 우리 조선 군사와 명나라 군사의 군량을 급히 수송하라." 이때 이여송은 조선 장수들의 재주를 다시 시험해 볼생각으로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좋은 술 천 독만 내일 아침에 대령하라." "알겠나이다." 김응서가 즉시 대답하고 나와 군졸들에게 명해 땅을 깊이파고 술 천독을 묻게 했다. 그리곤 그 위에다가 백탄 숯을 피워 밤새 돌고 술을 익히게 하니 이튿날 아침 어김없이 술 천독을 대령했다. 이여송이 보고 크게 칭찬했다. "과연 조선에도 재주가 뛰어난 인재가 있도다." 그리곤 또 영을 내렸다. "내일 아침에 용탕을 대령하라." 김응서가 대답하고 나와 하늘을 우럴러 슬피우니 하늘에서 갑자기 용이 한 마리 떨어져 시냇가에 죽었거늘 즉시 용탕을 지어 올렸다. 이여송이 칭찬하고 다시 영을 내렸다. "내일 아침까지 소상강에서 나는 젓갈을 올리렸다." 이에는 김응서라한들 어쩔 도리가 없어 깊이 근심하고 있는 터에 임금께서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전에 어떤 신하가 이 다음에 써먹을 일이 있다 혀며 소상강에서 나는 젓갈을 가져와 보관해 둔 것이 이 있느니라. 그러니 급히 가져가 원수께 올려라." 응서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젓갈을 갖다 바치니 이여송이 진심으로 칭찬했다. "그대는 과연 천재로다. 그대같이 재주 있는 장수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여송은 아직도 장난이 하고 싶은지 또 분부를 내렸다. "내일 아침에 백마 백필을 대령하라." 응서가 기거이 대답하고 나와서 군졸들에게 명령하였다. "흰가루를 칠하여 백마 백필을 대령하라." 이여송이 듣고 크게 웃으며 칭찬했다. "임기응변이 저렇듯 빠르니 누가 당하리오. 내가 졌도다."
이에 청정은 강원도 원주성에 있다가 군사가 와서 보고하는 소리를 듣고 크게 놀랐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대를 이끌고 오나이다." 청정은 급히 각도에 흩어진 장졸을 모두 부르니 장수가 팔백여명이오, 군사가 이십여명만명이었다. 이여송이 원주에 도착하여 적진을 살펴보니 제법 진식이 갖추어져 있었다. 원수가 북을 울려 싸움을 돋우니 적진에서 한 장수가 내달으며 크게 소리쳤다. "면장 이여송은 들으라. 우리 대장께서 조선을 거의 다 얻었거을 너는 무슨재주가 있다고 다 망한 조선을 구하려는냐? 빨리 나와 내칼을 받으라." 그러자 선봉장 김응서가 말을 몰고 달려 나오며 호통쳤다. "우리 진중에 영웅 호걸이 구름같이 모였거늘 너는 어지하여 죽기를 재촉하느냐?" 이에 양편 장수가 내달아 사워 삼십여 함에 이르러 김응서의 칼이 번뜩이더니 왜장 마원태의 머리가 땅에 굴렀다. 김응서가 적장의 머리를 칼 끝에 꿰고 돌아오려고 하자 왜진에서 다섯 장수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조선장수 김응서는 도망하지 말라." 김응서가 크게 분노하여 말머리를 돌리고 왜장 다섯을 상대로 싸우는데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청정이 이를 보자 크게 분노하여 벽력같이 호통치며 말을 내달아 명천검으로 김응서의 머리를 노리고 치니 응서가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그이 말이 적의 칼에 캊아 땅에 엎어졌다. 이에 김응서의 목숨이 풍전 등화처럼 위험했다. 이여송이 보고 크게 놀라 급히 새 장수를 보내어 김응서를 구해 오게 하였다. 김응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본진으로 동라와 사례했다. "원수의 구함이 없었다면 소장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이때 양편 장수가 내달아 한데 어울려 싸우니 명나라 장수는 아홉이오, 왜장은 다섯이었다. 양쪽 진에게 내지를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칼빛은 하늘의 햇빛을 가리는 듯한데 마치 산중 맹호가 먹이를 다투는 것 같고 용이 여의주를 갖고 싸우는 듯했다. 십여 합에 이르렀을 때 왜장의 칼이 번뜩하더니 맹장 이여우러의 머리가 떨어졌다. 거의 같은 시각에 강홍엽의 칼이 왜장 한일천의 머리를 잘랐다. 또한 김일관이 한소리 크게 호통치면서 왲아 한업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청정은 다섯장수가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자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말을 몰아 나는 듯이 달려나오며 우레 같이 호통쳤다. "내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이여송이 바라보니 청정은 신장이 구 척이오, 일백근짜리 황금투구를 쓰고 몸에는 구리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백근 무게의 철수를 들고 왼손에는 천하명검 며천검을 들었는데 불과 삼합도 못되어 명장 태경을 한칼에 베었다. 이여송이 부하의 죽음을 보자 즉시 말을 몰아 나오며 호통쳤다. "직장, 청정은 어찌하여 나의 아장을 죽이는가? 너듣거라. 너희 왜놈이 그 옛날 진시황을 속이고 섬으로 들어가 나오지 아니하고 자칭 왕이라 칭하고 미친개가 짖듯이 감히 조선국 같은 예의지국을 침범하니 어지 하늘의 벌이 없겠는가? 어서 썩 나와 나의 칼을 받아라." 천정이 듣고 크게 노하여 호통쳤다. "내가 조선을 거의 다 얻었거늘 네가 왜 나서서 가로막느냐?" 호통과 함께 명천검을 휘둘러 이여송과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양쪽의 총대장이 이렇게 접전을 벌이니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하늘이 무너지고 당이 꺼지는 듯하는데 십여합이 지나도록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청정은 기운이 달려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어딜 도망치느냐?" 이를 본 이여송과 명장 일곱이 우르르 뒤좇으며 호통쳤다. 청정이 죽을 둥 살둥 도망치는 데 문득 앞에서 한 대장이 나타나 크게 호령했다. "네가 감히 헛된 욕망을 품었으니 어찌 하늘인들 무심하겠느냐? 너는 도망치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청정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바로 전에 본적이 있는 관운장이 아닌가. 청정이 크게 놀라 옆으로 도망치려고 하니 명장 일곱이 달려들어 전후 좌우에에 협공했다. 이렇게 되니 청정이 제아무리 용뱅한들 그물에 든 고기요,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마찬가지 였다. "목을 바쳐라!" 이여송이 우레 같이 호통치며 달려들어 칼을 번개같이 내리쳤다. 이에 청정의 목이 칼빛을 쫓아 떨어졌다. 김응서가 즉시 달려들어 청정의 목을 칼 끝에 꿰어 들고 이여송에게 치하했다. "원수의 용맹은 천추에 승전고를 높이 울리며 축하연을 크게 베풀었다. 이때 전라로 쳐들어갔던 왜장 동철, 충청도로 갔던 마웅태, 함경도로 갔던 봉철등은 청정과 합세하고자 급히 오다가 총대장이 죽었다고 소리를 득고 크게 졸라 급히 달려와 부르짖었다. "명장 이여송과 조선 장수 김응서, 감홍엽은 어찌하여 우리 대장을 죽였는가. 우리가 네놈을 죽여 대장의 원수를 갚으리라.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이여송이 듣고 크게 분노하여 칼을 들고 곧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김응서와 강홍엽이 만류했다. "원수게서는 참으소서.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가? 소장들이 나가 왜장을 베어 원수의 노함을 풀리라." 이어 두장수가 일시에 내달으며 꾸짖었다. "너희들은 조선에 김응서와 강홍엽이 있다는 말으 들었는가? 어서 나와 칼을 받아라!" 양편 장수들이 한데 어울려 싸우기를 이십여 합 긑에 김응서의 칼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왜장 마웅태를 치니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문경이 이를 보자 크게 노하여 부르짖었다. "내 맹세코 너를 죽여 우리 장수의 원수를 갚으리라." 응서와 홍엽은 십여 합을 겨루다가 거짓 패한척 본진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문경이 기세 등등하게 뒤를 추격했다. "도망가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김응서와 강홍엽이 나르듯이 본진으로 돌아 오자 포소리가 한번 크게 울리더니 진세가 갑자기 변하여 오행진이 되니 나는 제비라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왜장 문경이 크게 당황하여 이리저리 살길을 찾는데 김응서가 벽력같이 달려들어 허리를 감아쥐고 땅에 재던졌다. 문경을 사로 잡아 장대 밑에 굻어 앉히고 김응서가 크게 호령했다. "네가 감히 예의지국을 침범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저... 제발 목숨남은 살려 주십시오. 저는 다만 청정의 명에의래 조선으로 나왔을 뿐입니다." 문경이 애걸하자 이여송이 매섭게 꾸짖었다. "네 놈이 천륜을 모르고 함부로 조선 같은 예의지국을 법하였도다. 조선에 영웅 호걸이 구름같이 많아 너의 대장 청정과, 소서, 평수길도 모두 칼날 아래 목없는 귀신이 되었도다. 내 너를 한칼에 메어 방자하게 군 죄를 물으려고 했으나 이미 항복하였기로 이대로 놓아 보낼것이니 빨리 돌아가 다시는 외람된 생각을 벅지 말라." 이에 문경은 머리를 감싸쥐고 왜국을 향해 도망쳤다. 이여송이 그제서야 군대를 거두니 남은 것은 산같이 쌓인 왜인이 시체뿐이었다.
이때 임금께서는 싸움의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승전 소리를 접하시고 크게 기뻐하셨다. 그러나 승전의 기쁜도 잠시였고, 또하나의 걱정이 생겼다. "군량이 거의 바닥 났으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고." 임금께서 탄식하자 최일령이 엎드려 아뢰었다. "신이 듣자하니 평안도 식주다에 사는 김수업이라는 부자가 있는데 곡식이 기십석이 있다 하나이다. 그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게 하소서." 김수업이 왕명을 받고 급히 달려나왔다. "왜적의 침략에 전하게옵서는 얼마나 근심하셧나이까?" 임금께서는 같이 탄식하시고 용건을 말씀하셧다. "지금 군량이 바닥나 야단이니 우선 그대의 곡식을 취하여 쓰고 이 다음에 시절이 태평하거든 갚고자 하노라. 그대 생각은 어떠한고?" 김수업이 엎드려 아뢰었다. "소신이 곡식은 바로 전하의 고식이오니 좋을대로 쓰시옵소서." 임금게서 크게 기뻐하시어 김수업으로 하여금 군량장을 삼아 곡식을 나르게 했다. 이때 이여송이 왜적을 쳐부수고 돌아오니 임금께서는 백리 밖에까지 나아가 맞이해 노고를 치하했다. "원수가 아니었다면 우리 조선국은 왜적의 송에 떨어질 뻔 했다. 원수의 이 은혜는 자손 만대에 걸쳐 잊지 않으리." "모든 것이 전하의 복이옵니다." 이에 이여송은 철비를 세워 승전을 천주에 길이 남도록 하고 비단 백필을 들여 승전기를 만들어 높게 세웠다. 그런 다음 크게 잔치를 베풀어 군사들에게 마음껏 즐기도록 했다. 이윽고 잔치가 긑난후 이여송은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중국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이여송은 가는 도중에 이름난 산이나 강물의 혈맥을 일일이 자르게 했다. "혈맥을 자르지 앟으면 조선에 영웅 호걸이 자꾸만 태어날 것이로다. 이것을 방비하지 않으면 우리 중국도 장차 위험해질 것이다." 왜적이 물러간 다음 임금께서는 서울로 환궁하신 후 제신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왜장을 모두 죽였지만 왜장의 항서를 받지 안흥면 후환이 될것이니 군사를 일으켜 왜국으로 쳐들어가 항서를 받는 것이 어떠한고?" 이에 제신이 모두 찬성하여 왜국을 정복하기로 했다 임금게서는 김응서와 강홍엽을 불러 영을 내리시니 두 장수가 서로 선종이 되겠다고 다투었다. 해서 제비를 뽑게 하니 강홍엽이 선봉이 되고 김응서는 후군을 맡았다. 두 장수가 군사 이십만명을 이끌고 왜국으로 떠나니 때는 무술년 시월달이었다. 군대가 경상도 동래에 도착하여 배를 탈 때 문득 뒤에서 김응서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장군님 잠간 군사를 머물게 하고 내말을 들으소서." 김응서가 놀라서 돌아보니 머리를 산발한 사람이 와서 절을 하거는 급히 물엇다. "그대는 주구인데 진중에 들어왔는가?" 그러자 그 사람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저는 조선에 사는 귀신으로 왜덕강이라 하옵니다." "할말이 무엇인고?" "장군님이 군사를 급히 행군하옵기로 만류하러 왔나이다. 군사를 사흘만 머물게 하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이나 급히 행군하면 크게 패할것이옵니다." 하고는 문득 간곳이 없엇다. 이에 김응서가 급히 강홍엽을 만나 사흘동안 군사를 머물러 있게 하자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한낱 귀신의 말을 믿고 군대를 쉬게 한다이 될말이오?" 하며 강홍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김응서는 몇번이고 간청하다가 강홍엽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자 탄식하며 말했다. "장군이 이대로 갔다가 패하더라도 나를 원망치는 말라." 이에 조선 군사는 배를 타고 여러날 만에 왜국에 당도하여 동설령으로 향했다. 한편 왜국에서는 조선을 치러 나간 군사가 대패하여 돌아옴을 분히 여겨 군병을 밤낮으로 조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군사가 왜국에 상륙했다는 말을 듣자 동설령 좌우에다 군사를 매복시켜 기다렸다. 김응서는 천기와 진리를 살피고 강홍엽에게 간곡히 말했다. "동설령은 지세가 험하니 들어가면 반드시 위험할것이오." 그러나 강홍엽은 듣지 않고 군사를 곧장 동설령 안으로 진격시켰다. 그러자 좌우 골자기에서 대포소리가 크게 울리며 미리 매복해 있던 왜병들이 몰려나와 들이치니 조선 군사는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십만 명의 대병이 삽시간에 남김없이 죽어 버렸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강물의 되어 흐르니 김응서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만리 타국에 들어와 대병을 모두 북였으니 무슨 낯으로 고국에 돌아가 전하를 죄오리오. 여기서 죽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리라." 이어 강홍엽을 돌아보고 크게 꾸짖었다. "이것은 모두 장군 탓이로다!" 강홍엽이 부그러워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구를 하지 못했다. 이때 왜장 홍대성등이 임진년의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김응서가 그렇지 않아도 분노를 누를 길 없어 벽력같이 호통치며 달려 들어 불과 십합도 안되어 두명의 적장 목을 베었다. 이에 왜왕은 크게 놀라 싸우지 말고 서로 화친하자고 사신을 보냈다. 군사없는 김응서와 강홍엽은 하는 수 없이 왜왕 앞으로 나아가니 왜왕이 크게 기뻐하며 좋은 말로 위로했다.
두 장수는 군사를 잃고 고국으로 돌아갈수도 없고 해서 왜국에서 세월을 보내니 어언 삼년이 지났다. 그러자 왜장은 금은 보화와 미녀로서 두 장수를 유혹하는데 김응서는 눈하나 까딱하니 않았지만 강홍엽은 그만 왜왕의 괴임에 넘어가 부귀와 영화를 탐냈다. 김응서는 이에 분함을 참을 길이 없어 하루는 강홍엽에게 가서 꾸짖듯이 말했다. "옛글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햇으나, 장군의 뜻은 이미 바뀐듯하오. 나는 이제 왜왕의 목을 베어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전하를 베옵고 죄를 청하려 하니 그리아시오." 그러나 강홍엽은 고국으로 돌아갈 뜻이 없어 도리어 김응서가 한 말을 왜왕에게 고해 바쳤다. 왜왕이 크게 성이 나 수만 명의 군사를 풀어 김응서를 잡으려고 했다. 김응서는 일이 틀려졌음을 깨닫자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했다. "내, 왜왕의 머리를 베어 분함을 덜을까 했으나 강홍엽이 배반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슬프도다, 만리 타국에 와서 죽으니 하늘이 나를 돕지 아니하는구나. 일이 틀린 이산 소인배 홍엽을 죽여 전하께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짓게 하리라." 김응서는 즉시 장검을 빼어들고 나는 듯이 달려가 강홍엽을 내려치니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곤 자기도 그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으니 하늘도 슬퍼하는지 갑자기 천지가 컴컴해지며 뇌성벽력이 울리었다.
이때 임금께서는 두 장수와 이십만 명의 대병을 왜국에 보내놓고 소식이 없어 무척 근심하였다. 삼년째 되는 어느날 임금께서 용상에 기대어 잠깐 졸고 있는데 갑자기 김응서가 생시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아뢰었다. "소신이 힘을 다해 왜왕의 머리를 베어 전하의 은혜를 만분지 날이라도 갚을까 했으나 불길히도 강홍엽이 제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십만 명의 대병을 모두 죽이업고 구차한 삶을 살았나이다. 그러다가 몰래 왜왕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더니 강홍엽이 끝내 배반하는 바람에 소신은 홍엽을 베고 자결했나이다. 신은 비록 황천에 가 있으나 귀신이라도 전하를 도와 이나라를 편안케 하오리다." 임금게서 감작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임금이 크게 상심하고 있르때 왜국에서 보내온 김응서의 목이 대궐에 닿았다. 이에 임금게서는 애통해 하시며 후에 장사지내어 충신의 넋을 위로했다. 세월은 흘러 경자년 삼월이 되었다. 이때 묘향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서산대사가 문득 천기를 살피더니 안색이 변해 산을 내려와 곧바로 임금께 나아가 뵙기를 청했다. 임금께서는 서산대사의 높은 덕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황망히 맞이해 하문하셨다. "대사 게서 어인 연고로 갑자기 짐을 보고자 하오?" 서산대사가 함장하여 아뢰었다. "빈승이 천지를 보오니 왜적이 임진년의 원한을 갚으려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기에 이를 여쭈려고 왔나이다. 지금 김응서 같은 장수가 죽고 없나니 누가 왜적을 당해내겠나이까?" 임금게서 듣고 크게 놀라시었다. "그렇다면 어지해야 좋을고?" "빈승에게 왜적이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할 묘책이 있나이다." "어디 말씀해 보오." "빈승의 제자 사명당이 육도 삼략에 통달하옵고 퍌만 대장경과 둔갑술에 능통하오니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옵소서." 임금게서는 크게 기뻐하시어, 즉시 사명당을 불러 간곡히 분부 하였다. "서산대사의 말을 들으니 그대가 높은 재주를 지녔다고 하니 왜국으로 들어가 항복을 받아 후환을 없게 하라." "소승이 어찌 수고를 아끼겠나이까?" 사명당은 공손히 절하고 봉명사전의 직함을 받고 즉시 왜국으로 출발했다. 여러날 만에 왜국에 당도하자 사명당은 왜왕에게 글월을 보냈다. "조선국 생불인 사명당이 당도했으니 왜왕은 공손히 접대하라." 왜왕이 글월을 보고 크게 놀라 대책을 강구했다. "조선에서 생불이 왔다 하니 어찌 하겠는가?"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소신에게 묘책이 하나 있나이다. 삼백 육십간짜리 병풍을 만들어 일만 일천 귀의 글을 지어 병풍에 써서 길에 펼쳐 놓으소서. 그런 다음 사신을 향해 천리마를 급히 몰아 사처에 오거든 병풍에 씌인 글월을 외워 보라고 하소서. 만약 못외우면 죽이사이다." 왜왕이 듣고 그럴듯하게 여겨 그대로 시행하게 했다. 왜국성들은 조선서 생불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백리에 걸쳐 새까맣게 몰려 나와 구경하는데 사명당이 말을 풍우같이 몰아 지나갔다. 이어 왜왕 앞에 나아가 서로 인사를 나누어 왜왕이 물었다. "사신이 생불이라 청하니 들어오는 길에 병풍의 글을 보았습니까?" "보았노라." 왜왕이 청하자 사명당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그만한 글을 외우지 못하리오." 하고는, 삼경에 시작하여 이튿날 오시가지 외우니 모두 일만 구백구십 귀를 물 흐르듯이 역어 내려갔다. 그러자 왜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지하여 열귀는 외우지 않는지요?" 사명당이 눈을 부릅뜨고 호령했다. "없는 글도 외우라 하느뇨?" 왜왕이 안색이 변해 신하를 불러 일렀다. "가서 보고 오너라." 신하가 갔다 오더니 아뢰었다. "과연 병풍 두간이 닫혀있어 글 열귀가 보이지 않나이다." 왜왕이 그제서야 크게 놀라 머리를 조아려 사과햇다. 첫 번재 계교가 실패로 돌아가자 왜왕은 다시 신하를 불러놓고 의논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계책을 아뢰었다. "일백 오십자 되는 구리방석을 만들어 물에 띄우라 하소서. 제아무리 생불이라 하더라도 이번만은 죽을 것이옵니다." 왜왕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구리 방석을 만들어 놓고 사명당에게 타보라고 했다. 이에 사명당이 구리방석에 올아앉아 팔만대장경을 외우니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가고, 서풍이 불면 도쪽으로 가니 완연히 돛이달린 배였다. 왜왕이 보고 크게 놀라 탄식했다. "조선 사신이 저토록 재주가 뛰어나니 어떻게 하리오?" 그러자 또한신하가 앞으로 나와 아뢰엇다. "내일은 잔치를 열어 채단 방석을 내놓고 앉으라 하여 그대로 앉으며 필시 요물이요, 백목을 취하면 부처일 것이니 요물이오면 죽이소서." 왜왕이 그대로 시핸하자 사명당은 백팔염주를 손에 들고 백목에 앉으니 왜왕이 의아하여 물었다. "대사는 어찌하여 비단을 취하지 아니하고 백목에 앉으시는지요." 사명당이 엄숙하게 대꾸했다. "부처가 백목을 취하지 어찌 비단을 취하리오, 백목은 목화에서 핀 꽃이요, 비단은 벌레에서 나온것이니 취하지 않노라." 잔치가 끝난후 왜왕은 다시 신하들을 모아놓고 한숨만 내쉬었다. "조선 사신은 생불이 분명하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그러자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내일은 구리로 된 집을 지어 조선 사신을 안에 넣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사면에서 숯불을 피우면 제아무리 생불이라 할지라도 구리집안에서 죽을 것이옵니다." 왜왕은 이번만은 자신있다 생각되어 구리집 속에다 사명당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앉으라 한후 문을 잠궜다. 그리곤 사면에서 숯을 쌓고 태우니 불꽃이 일어나며 구리가 녹아 흘렀다. 그러나 사명당은 왜왕의 간계를 미리 알아 서면 벽에 서리 상자를 써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 빙자를 써놓은 다음 팔만대장경을 외우니방안이 흡사 얼음창고 같았다. 이것도 모르고 왜왕은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저렇게 뜨거우니 생불이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는, 신하들을 시켜 문을 열어 보니 사명당이 꼿꼿이 앉아 있느 눈썹에는 서리가 기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있지 않은가. 사명이크게 꾸짖었다. "왜국은 남방이라 덮다 하더니 왜이렇게 추우냐?" 왜왕이 듣고 크게 놀랐으나 다시 꾀를 내어 무쇠로 만든 말을 시뻘겋게 달군후 타라 했다. 이에 사명당이 조선을 바라보며 팔만대장경을 외우니 난데없이 구름이 모여들어 소나기가 끊어지지 않고 쏫아져 삽시간에 성 중에 물이 가득차 백성들이 무수히 빠져 죽었다. 사명당이 왜왕을 보고 호령했다. "간사한 왜왕은 듣거라. 네가 깨닫지 못하고 생불인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괘씸하도다. 목숨을 보존하려면 급히 항서를 써서 올리되 그렇지 않으면 너의 왜국은 동해 바다가 되리라." 왜왕이 그제서야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 두 손을 비비며 애걸했다. "비나이다. 생불이신 조선사신 사명당께 비나이다. 소왕이 무지 하여 부처님을 희롱했으니 그죄 죽어 마땅하오나 한번만 용서하소서." "어서 항서를 써서 올려라." 사명당이 거듭 호령하니 왜왕은 즉시 항서를 써서 바쳤다. 이에 사명당은 왜왕을 준절히 꾸짖은 다음 비를 그치게 했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사명당이 마침내 고국으로 떠나게 되니 왜왕이 부두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사명당은 왜왕이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못박았다. "왜왕은 들으라. 너는 욕심을 내어 청정과 소서를 보내어 우리 동방예의지국을 침범하였으니 그 죄를 따지면 왜국을 없애 바다로 만들어도 부족하리라. 하지만 인명이 불쌍하여 이번 한번만은 용서해 주는 것이니 다시는 헛된 욕심을 먹지 말라. 다시한번 야욕을 품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도다. 그리고 차후에는 매년마다 인피 삼백장씩 바치되 십 오륙 세된 처녀의 가죽으로 바치고, 불알 서 말씨을 바치되 십오륙 세된 남자 아이것으로 하라. 만일 하나라도 모자르면 내가 또 건너와 너의 왜국을 불바다로 만들것이니 그리알라." "분부대로 꼭 거행하겠나이다." 왜왕은 벌벌 떨며 명령대로 하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이에 사명당이 왜왕의 항서를 갖고 고국으로 돌아오니 그 위풍과 이름이 멀리 중국까지 떨쳐졌다. 임금게서 사명당을 맞이하여 극구 칭창하였다. "대사가 왜국에 들어가 항복을 받았으나 그 공로는 천주에 빛날 것이로다." 하시고는, 서산대사와 사명당에게 벼슬을 내리려고 했으나 두 분대사가 한사코 사양하고는 산 속으로 홀연히 떠나갔다. 임금께서는 브게 섭섭하시어 백관을 데리고 멀리까지 전송했다. 그후 왜왕은 인피 삼백장과 불알 서 말식을 매년 바치고, 동래당레 왜관을 짓고 구리 삼백 육십근, 주석 삼만 육천근, 쇠통 삼만 육천근, 시우쇠 삼만 육천근 으로 매년 조공(작은나라가 큰나라에 바치는 물건)을 바치고 다시는 외람된 생각을 먹지 못했다. 이에 조선 임급께서는 왜왕에게 금자광록대부의 벼슬을 내려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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