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전 (2/3)
드디어 과거 날이 되어서 시백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글의 제목을 보고 곧바로 그 벼룻물을 담긴 물로 먹을 갈아 단숨에 써서 내놓으니 너무도 글이 잘 지어져서 고칠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시백은 맨 먼저 글을 내고 발표하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얼마 후 시험관이 발표를 하는데 장원은 서울 출신 이시백이며, 그의 부친은 이조판서 이득춘이라고 크게 소리쳐 알리었다. 시백이 너무 기뻐 당황할 대 시험장 위에서 새로 합격한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백이 많은 사람 속에서 나와 과거 보던 곳 아래에 이르자, 상감께서는 장원을 보셨다. 시백의 됨됨이가 영특하고 월등한 호걸이므로 임금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공이 그의 아들을 두어 나라에 큰 기둥이 되게 키운 것을 칭송하시면서 종이꽃과 남빛 옷을 내어 주셨다. 시백은 성은에 사례하고 비단 도포와 옥으로 된 띠에 뛰어난 얼굴로 풍악을 거느리고 대궐문을 나왔다. 기운으로 불그스레 취한 동작이 참으로 이 나라의 인재 다왔다. 시백의 일행이 안국동 가까이 다다르자, 우선 사당에 엎드려 절하고 부모님들과 친지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또한 바깥채에서 치하하러 온 여러 손님들이 장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상공과 함께 나가보니 상공의 친구가 많이 모여 기뻐하고 치하해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파연곡-잔치가 끝날 때 부르는 마지막 노래-을 불렀다. 그 후 시끌시끌하던 집안이 이젠 고요해졌다. 모든 손님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상공은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간 저녁상을 물리고 촛불을 켜서 낮을 이어서 계속 즐기는데 상공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상공은 손님을 보기가 부끄러워 방안에만 앉아 있을 박씨를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부인이 마음이 심히 상하여서 물어 보았다.
"오늘같이 하나뿐인 아들이 과거에 급제를 해서 경사스러운 일은 평생에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인즉 어찌하여 상공의 얼굴 빛이 그러하십니까? 혹시 그토록 추악하게 생긴 며느리가 이 자리에 없음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온지요?" 상공이 침묵하여 대답하기를 꺼리는 것 같아 보이자 부인이 재촉해서 물어보았다. "어서 말해 보십시오?" 갑자기 상공의 얼굴빛이 엄숙해지며 일렀다. "부인, 아무리 학식이 얕고 좁다한들, 겉모양만을 중요시하고 속에 담겨진 큰 재주를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며느리의 재주는 위대하기까지 하며 옛 제갈공명의 부인인 황씨보다 크게 뛰어날 것이오. 덕행 또한 충만하고 절개가 돋보이니 주나라의 문왕의 아내인 태사에게도 견줄 정도이니 우리 집안에는 분에 넘치는 며느리인데 부인의 그 속좁은 말은 우습지 아니하오?" 상공은 여전히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이 때 서방님의 장원급제를 듣고서 계화는 박씨에게 기뻐 치하하고 또 탄식하여 말하였다. "아가씨! 시집오신 후로, 서방님 모습은 단 한 번도 침실에 보이지 않았었지요. 우리 아가씨가 어질고 착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의 박대하심을 당하시어 홀로 쓸쓸히 후원에서 많은 날들을 지내시며 집안의 모든 일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시니, 저의 생각에도 아가씨를 생각할 때면 서러워짐을 느끼고 눈물까지 나옵니다."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여릿여릿 말하는 계화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태연히 대답했다. "우리 인간의 팔자는 이미 하늘이 정하신 것이니 어찌 나의 기구한 팔자를 탓할 수 있겠느냐?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옛부터 얼굴빛이 붉은 여자와 팔자 사나운 사람이 한 둘이 아닌고로 나 혼자만이 기구한 것이 아니느니라. 선한 이는 분수와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 옳은 것이니, 아녀자된 도리로써 어찌 서방님의 은혜로서 사랑하심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제 다시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라. 모르는 사람이 듣게 된다면 나의 몸가짐에 관해 천히 여길 것이 분명하다." 박씨의 넓은 마음과 어질로 정숙한 말에 계화는 감격하였다. 이미 이 때는 박씨가 시집온 지 삼년이 되었다.
하루는 안채에 나와 시부모님께 절하고 조용히 여쭈었다. "제가 시집온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본가의 소식이 아득하니 부모님의 안부를 알고 싶어 다녀오려 하오니 어른께서는 허락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상공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대뜸 놀라서 일렀다. "네 심정이 짐작은 간다마는 여기에서 금강산까지는 오백 리에 달하고 길도 험한데 어찌하여 네가 떠나고자 하느냐? 나이 많은 남정네도 출입하기가 어려운 곳인데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 떠날 수 있단 말이냐?" 박씨가 숨을 죽이고 가만 있자 덧붙여서 말하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아예 먹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박씨는 상공의 말을 듣고 송구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물론 아버님의 말씀이 옳으신 줄 압니다만 꼭 다녀오고자 하는 심정이니 부디 허락하시고 어른들께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지혜로움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승낙하고 일렀다. "너의 효성이 아름답기로 꼭 한 번 다녀오도록 할 것이다. 내일 떠날 차비를 차려 줄 터이니 속히 다녀오도록 하여라." 다시 박씨가 여쭈었다. "저 혼자 사나흘 동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차비는 필요치 않습니다." 사실 박씨의 재주가 월등함을 짐작은 하지만 그렇게 빨리 다녀올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박씨의 신통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이튿날 시부모님께 절하고 방으로 돌아온 박씨는 계화를 불러 다짐을 주었다. "친정집에 잠시 다녀올 테니까 너는 내가 떠난 모습을 어떤 사라에게도 소문내지 말도록 해라." 말을 끝마치자 뜰에 내려와 서너 걸음 걷다가 몸을 구름 위로 날려 눈감짝할 사이에 금강산 비취정에 이르러서 부모님께 절하고 문안을 드렸다. 딸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박처사는 슬픔이 복받쳤으나 딸의 손을 잡고 탄식하듯 말했다. "어언 시집 보낸 지 삼년 동안에 너의 운명에 기박함을 서러워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어서 방도를 찾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너의 불행이 끝이 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 달 십오 일에 서울로 올라갈 터이니 너는 잠시 쉬고 가거라." 박씨는 말씀 그대로 몇 해 동안의 정을 풀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처사 내외가 재촉하며 말하였다. "네 시아버님께서 기다릴테니 어서 돌아가서 안심시키도록 해라."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이별을 고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구름을 타고 잠깐 사이에 제 방으로 돌아왔다. 계화가 아가씨를 맞아 잘 다녀오신 것을 기뻐했다. 박씨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나서 상공께 여쭈었다. "친정에게 돌아올 적에 저의 아버님이 이 달 십오 일에 오신다고 시아버지께 아뢰라고 하여 이렇게 말씀 올립니다." 상공은 알아들었다고 이르고 집안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술과 안주를 듬뿍 장만해 놓고 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십오 일이 되자 달빛이 밝게 비치고 맑은 바람이 휙 부는 듯하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처사가 구름을 타고서 내려왔다. 상공이 마당으로 내려가 처사를 맞이해서 방으로 모시고 절을 마친 다음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또한 시백은 옷을 가다듬어 입고 처사를 향해 절하며 여러 해 동안의 문안을 드리니 그 모양이 훤하고 의젓하게 보였다. 처사가 대단히 기뻐하고 사위의 굵은 손목을 덥석 잡으며 상공께 치하하여 말했다. "훌륭한 인품의 아드님이 장원 급제함을 진실로 축하드리며 높은 벼슬까지 올라가니 귀하신 집안에 이런 경사가 또 다시 없음을 익히 알면서도 천성이 어리석어 상공께 변변히 치하 드리지 못했더니 올해에 딸의 불행이 끝나고 지금 그 흉한 얼굴과 추한 탈을 벗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과거에 급제한 사위를 높이 치하하고 더불어 딸아이를 보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상공은 처사의 말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고 갑작스런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객이 술을 마시며 서로의 정감 있는 말을 나누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닭 우는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어 편히 쉬고 처사는 박씨의 박에 들어갔다. 박씨는 부친을 맞아 절하고 문안까지 드리니 처사가 딸의 손을 잡으며 남쪽을 향해서 앉혔다. 처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박씨에게 일렀다. "비로소 오늘에야 너의 허물이 다 끝났다." 하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부르는 말을 줄줄 외며 소매를 들어 박씨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다지도 흉하던 얼굴의 허물이 깨끗이 벗겨지며 옥같은 고운 얼굴의 뛰어난 미인으로 바뀌었다. 처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박씨에게 말하였다. "너의 이 허물을 내가 가져가고 싶다만 의문을 풀 길이 없구나. 그러니 시아버님께 잘 말씀드려 궤짝 하나를 얻어서 시아버님과 서방에게 보여 의심을 풀게 하여라. 이제 오늘부터 너와 내가 이별한 뒤 칠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지나야 우리 부녀가 다시 만나 다하지 못한 정을 풀 수밖에 없겠구나." 처사는 아쉬운 듯 딸의 모습을 쳐다보고 바깥채로 나가서 상공과 이별하며 말했다. "다음에 혹시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시면 며느리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처사가 마당으로 내려서 두어 걸음 걷는 것 같더니 이내 모습이 없어졌다. 상공은 신기하게 여겨졌다.
다음 날 계화가 상공께 나아가 알렸다. "처사께서 어제 다녀가신 뒤에 저의 아가씨의 허물이 말끔히 벗겨져 이제는 매우 아름답고 고운 부인이 되었사옵니다. 이토록 신기한 술법이 있기에 감히 상공께 아뢰옵니다." 말을 듣고, 상공은 기쁨에 넘쳐서 속히 후원으로 들어가 보았다. 과연 며느리는 어여쁜 미인이 되어서 상공을 맞이했다. 입이 딱 벌어진 상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박씨는 공손히 여쭈었다. "저에게 전생의 죄가 너무 커서 흉칙한 허물을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수십 년 동안의 불행을 겪으며 사니 저의 처지를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님께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도록 하라고 명하여 이제 오셔서 제 얼굴을 되찾아 주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의 변한 모습에 과히 의심하지 마십시오." 말을 듣고 난 상공은 어리둥절하여 며느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거짓말같이, 구슬같이 하얀 얼굴과 앵두 같은 입술에 만 가지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 이보다 예쁜 미인이 다시없어 보였다. 상공의 놀라움이 너무도 크니, 박씨가 시아버지께서 의심함을 눈치채고 이미 벗은 허물을 내어 보이니 상공이 보고 틀림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크게 깨달아 며느리를 향해 일렀다. "이제야 너의 본래의 모습이 돌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으니 너의 시어머니와 특히 네 서방이 기뻐할 것이다." 말을 마치고 안채로 나오려는데 박씨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궤짝을 하나 주시면 이 허물을 그 속에 넣었다가 시어머님과 남편의 의심을 풀고자 합니다. 선뜻 상공은 허락하고 바깥채로 나아가 궤짝을 얻어 들여보냈다. 박씨는 자기의 허물을 소중히 궤짝 속에 넣어 두었다. 이때쯤 상공은 안방으로 들어가 부인과 아들에게 박씨의 얼굴이 말끔히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부인이 믿지 아니하고 비웃으며 말하길,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래서 마음에 켕기는 무엇이 있어서 계집종을 시켜 박씨를 부르게 했다. 전갈을 받은 박씨는 옷차림을 가다듬고 계화에게 허물을 넣은 궤짝을 들게 하고 안방에 이르러 부인께 절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부인이 한참동안 박씨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허허롭게 말했다. "별스런 일도 다 있구나? 이럴 수가..." 부인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다시 박씨에게 말하였다. "대체 너의 흉한 허물은 어디로 가고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느냐?" 박씨는 엎드려 여쭈었다. "제가 흉한 얼굴로 주제넘게 귀하신 집안에 들어온 지 이미 팔 년 동안에 시어머니께 다시없게 불효를 했사옵고, 홀로 팔자를 원망하였더니 전생의 죄악이 끝나서 아버님이 오시어 저의 본래 얼굴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이르는 말씀이 벗은 허물을 궤짝 속에 넣었다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보여 드려 의심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박씨는 말을 마치자, 계화에게 궤짝을 가져오라고 했다. 궤짝 속에서 허물을 내어 보이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의심을 말끔히 풀어 그제서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하였다.
이즈음 상감께서는 시백의 총명과 덕망을 사랑하시어 벼슬을 높여서 병조판서를 시키시니 시백은 성은에 감사드리고 크게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와 상공을 뵈었다. 대뜸 상공이 묻기를, "지금 너의 아내가 어떠하냐?" 시백이 송구스러워 대답을 못하자 상공이 말했다. "사람의 잘되고 못됨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므로 너의 지난 어리석음을 뉘우치거라. 이제 무슨 낯으로 아내를 쳐다볼 수 있겠는가? 그런 됨됨이로 나라의 중책을 어찌 감당해 낼지 의문이로고." 시백은 면구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자 박씨의 방에 들어가니 박씨는 등불을 밝히고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앉아 있었다. 시백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박씨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먼저 말하였다. "어리석은 몸이 부인의 흉한 얼굴을 싫어하고 여러 해를 박대하였더니 하늘이 나의 처복을 도와 주셨구료. 이제 당신의 본래 얼굴을 되찾아 세상에선 둘도 없는 미인이 되셨으니 내가 아무리 뉘우쳐도 당신을 마주볼 면목이 도저히 없소이다. 하지만 부인의 도리는 남편을 따름이 그 첫째 요인이니 부디 부인의 이것을 생각하시어 나의 어리석었던 생각을 용서해 주시구려." 그러나 박씨는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비록 인물이 추하다 하여 시집온 뒤로 시부모님을 효성껏 모시고 당신을 모시어 커다란 잘못이 없었는데 당신이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고 구박까지 심하셨습니다. 거기다가 한갓 아름다운 얼굴만을 취하시니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은 생각 마십시오. 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 사시고 저의 생각은 조금도 마십시오."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옳은 고로 시백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의 잘못이므로 아무쪼록 박씨의 마음을 달래기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밤을 지새며 무릎이 닳도록 사죄하니 어진 덕성을 갖춘 박씨는 시백의 끈덕진 지성에 감동하였다. 박씨는 자기가 너무 박정히 대한 것 같아 공손히 말하였다. "군자의 체통이 귀하고 또한 재상의 위신이 무거운데 어찌 철없는 젊은이와 같이 행동하십니까? 제가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추한 상을 보인 것은 당신의 마음을 반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신을 쓰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요, 여러 해 동안에 박색을 꺼려하여 말을 붙이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신의 말씀을 삼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당신의 심보를 괘씸히 여겨서 한평생을 풀지 않으려 했더니 당신이 이렇게 말하심을 보니 여자의 마음인지 제 마음이 봄눈 녹듯이 풀려 이제 지난 일을 전부 잊었으니 당신은 체통을 차리십시오." 부인의 말을 들으니 판서의 마음이 한없이 기뻐서 박씨에게 사례하여 말했다 ."나는 세상에 어리석고 무능한 자로서 보는 눈이 좁지만 부인은 선녀와도 비길 수 있으니 생각이 넓고 마음 또한 깊구려, 철없는 내가 어찌 부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마는 부인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 해 맺힌 마음을 풀어 버리고 내 이런 기쁨은 평생에게 처음인 듯 싶소이다." 박씨는 곱게 웃으며 자기의 말이 너무 지나쳤음을 판서에게 말하고 밤이 깊도록 말하니 두 사람의 사랑은 부풀어 갔다. 어느새 계화가 들어와 이부자리를 펴니 판서가 부인과 함께 자리에 들고 서로 깊이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두 내외가 서로 화합한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아기를 배니 상공의 부부가 손자의 재롱을 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달이 다 되어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상공이 산실로 들어가 뼈대가 굵고 두 눈방울이 초롱초롱한 갓난 손자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상공의 부부는 온갖 일을 잊고 손자들의 재롱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에 손자의 이름을 희기와 희인이라고 지어 손 안의 보배처럼 몹시 사랑하였다.
이때쯤 상감께서는 판서의 총명과 어진 덕망을 아름답게 보시어 평안감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감사가 황송하여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벼슬이 높아진 것을 알고 일가 친척과 집안 식구들이 이 판서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판서는 이제 길 떠날 차비를 하며 장이를 불러 쌍가마를 꾸미라고 하자 박씨가 이상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쌍교를 꾸미십니까?" 판서가 미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부인을 데려 가고자 함입니다." 박씨가 놀라며 말하였다. "장부의 몸이 나라에 맡겨지면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날도 적다고 하였는데 게다가 처자까지 돌보겠습니까? 제가 집에서 부모님을 성심껏 받들겠사오니 저는 생각지 마시고 하루 속히 부임해서 나랏일을 잘 다스리십시오." 부인의 말이 지당하므로 이에 머리를 숙이고 사례하며 일렀다. "당연한 말이오. 내가 어리석어 늙으신 부모님의 외로우심을 생각지 못하고 망령된 말을 했으니 곁의 사람들이 웃을까 두렵소이다. 내 미숙함을 탓하지 마시고 두 분 어른을 봉양하십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자 부인에게 절을 하고 부인과도 섭섭한 이별을 한 후에 곧바로 대궐에 나가서 절하고 부임길에 올랐다. 여러 날 만에 평양에 도착한 감사는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근심을 보살피고, 각 고을 원님들의 잘잘못을 조사해서 백성을 사랑하고 공무에 많은 힘을 쓰는 자는 나라에 알려 큰사랑을 주게 하였다. 또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자는 파면시켜 명백하게 다스리니, 도둑은 양민으로 변하여 백성들은 편안히 살게 되어 태평가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도내의 백성들이 감사의 정치에 고마움을 느끼고 거리마다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축송하는 소리가 상감께 알려지니 상감께서는 이 감사의 선한 정치를 아름답게 보시고 병조판서로 임명하시며 속히 상경하여 나랏일을 진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왕명을 받자 이 감사는 대궐을 향해서 네 번을 절하고 서울로 올라오니 여러 고을의 원님과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에 가득히 모여서 감사와 이별하기를 아쉬워하였다.
여러 날만에 서울에 이르러 상감께 절하고 임금님의 은혜에 또 다시 감사를 드리니 임금께서는 감사에게 칭찬을 아기지 않으셨다. "그대가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 사랑하는 것은 이 모두가 백성의 복이요, 나의 충실한 신하다." 하시고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시니, 판서가 은혜에 감사하고 절하며 물러났다. 본집에 이르러 우선 부모께 인사드리자 상공이 손을 꽉 잡으며 판서에게 말하였다. "내가 늘 너를 어리석게 여긴 것은 예전에 너의 부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랬더니만 이제는 감사의 직분을 충실히 다해서 백성이 칭송하고 상감께서는 네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높은 벼슬을 주셨으니, 이제서야 내가 바라던 아들이 되었고 임금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고 박씨의 마땅한 지아비가 되었구나." 크게 기뻐하는 상공의 말을 듣고 판서는 황송하여 절하고 그 동안 그리웠던 생각을 말씀 드리며 부모님과 이야기 하다가 밤이 깊음을 알고 주무시도록 여쭈고 일어나 박씨의 방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몸을 일으켜 맞아들이는데 판서가 손을 꼭 잡으시며 앉히고는 정답게 말하였다. "그간 부모님을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오?" 이에 박씨는 수줍게 잡힌 손을 빼며 대답했다. "어찌 그것을 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모두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수년간 객지에서 고생한 판서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럭저럭 이야기하다가 오랜만에 잠자리에 함께 드니 그 정다움이란 이루 표현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명나라의 남경은 이때쯤 소란스러워서 가달이란 오랑캐의 두목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 소식이 나라 대궐에까지 들리자, 상감은 근심이 되어 이시백을 상사-명나라로 보내는 사신-에 임명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대와 화합이 잘되는 사람으로 군관을 삼고 날을 잡아 출발하여라." 시백은 임경업으로 정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임경업은 원래 충주 사람으로 힘이 세고 슬기가 그지없었다. 어려서 무과에 으뜸으로 뽑히고 때마침 벼슬이 철마산 군영의 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시백은 임경업을 상사군사로 삼아 중국의 남경으로 갔다.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에서 온 사신의 이름을 듣고 황자명으로 접빈사-외국사신을 맞는 벼슬-를 삼아 맞게 했다. 접빈사를 따라 임경업과 함께 황제 앞에 나아가 이시백이 네 번 절하고 글을 올리나 황제가 글을 거두고 옆의 신하에게 저지하여 조선의 사신을 데리고 예부에 나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 그때 마침 북쪽 오랑캐 사신이 이르러 글을 올리어 황제가 보시었다. 그 대충 내용은, <가달이 일어나서 우리 나라의 땅을 침략하니 그들의 군사는 너무 강해서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황제게 간곡히 아뢰오니 한시 바삐 지원군을 보내 주시어 저희 불쌍한 백성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황제는 몹시 걱정하여 그곳에 보낼 장사를 선정하려고 하자 접빈사 황자명이 아뢰었다. "조선 나라에서 온 임경업 상사군관의 얼굴을 보아 하니, 다른 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지혜와 용기를 높이 갖추어 가달을 물리칠 만한 능력이 있으므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병의 최고 사령관에 정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가 이시백을 불러 경업의 됨됨이를 물으니 시백이 여쭈었다. "경업의 지혜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큰 중책은 이끌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백의 겸손함을 명나라 황제는 칭찬하고 임경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큰 칼을 손수 주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베어 죽이라고 하면서 삼만 명의 대군을 내주었다. 임경업은 명을 받고 물러 나와서 장병들에게 많은 연습을 시키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오랑캐 나라에 이르니 그곳 국왕이 경업의 용맹을 보고서 크게 기뻐하여 맞이하고 대접을 극진히 했다. 국왕이 가달의 군대가 강함을 걱정하니 경업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비록 제가 지혜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무찌르겠습니다." 말을 끝마치고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에 도착했다. 무려 적군과 삼십여 번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더니 임원수가 큰 소리를 지르며 길다란 팔을 늘이어 가달을 사로잡아 본진에 돌아오자 호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임원수를 맞아 웃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즐기었다. 임원수는 지휘대에 높이 앉아 군사에게 호령하여 가달을 잡아들이고 뜰 앞에 꿇어 앉히고는 무섭게 꾸짖어 말하였다. "비록 네가 무식한 오랑캐이지만 너의 병력이 강한 것만을 생각하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느냐?" 가달은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며 말했다. "무지한 저희가 하늘의 섭리를 모르고 호국을 침략하여 장군께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다시는 악한 마음을 먹지 않고 호국에 복종하여 충성하겠으니 장군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수는 옆 사람에게 지시하여 묶은 것을 풀어 주고 자기 옆 자리에 오르게 해 술잔을 주며 위로하였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진실로 그대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므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니 또 다시 이런 부질없는 마음은 먹지 말고 하늘의 뜻대로 살아 죽을 때가지 평안을 누리도록 하라." 가달이 크게 절하고 말하였다. "저의 죽어 마땅한 죄를 이렇게 용서하시니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달은 백 번 절하고 호왕과 작별하고 남은 군사를 지휘하여 제 나라로 돌아갔다. 임원수의 넓은 그릇됨을 크게 칭찬하고 호왕은 말하였다. "이토록 훌륭한 장군이 조선에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경업의 탁월함을 높이 사시어 왕조의 사위로 삼고자 하여 궁궐 안에 들어가 왕비와 의논하고 공주를 불러 경업의 사내다움을 말하여 일렀다.
"너의 남편감을 고르려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이 말에 공주는 얼굴을 숙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녕 아버님의 분부가 저의 전부이오나 여자의 평생을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소녀에게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직접 보고 말씀 드리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공주의 바른 말에 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호왕은 다음 날 바깥채에 나가 임경업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장군을 신임하여 부탁할 일이 있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 경업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대답했다."어떤 말씀이신지요?" 호왕은 진지하게 말하였다. "내게 딸이 하나 있는데 장군을 내 사위로 삼고 싶은 바 공주에게 말했더니 그 아이의 말이 제 눈으로 보아야 정할 수 있겠다기에 그러자고 했네만 자네의 생각은 어떤지 그게 알고 싶네." 임원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이 말에 호왕이 매우 기뻐하여 안채로 들어가 말을 전하고 높은 다락채에 발을 내려치고 공주를 그곳에 올려 보내니 임원수는 벌써 공주의 관상 보는 법을 직감하고 신발 속을 세 치나 헝겊으로 높이고 기다렸다. 과연 들어오라고 하여 경업이 들어갔더니 한참 동안 위 아래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키는 세 치가 더 크니 앞으로 보자면 밤 하늘의 별과 같이 크게 될 인물이요, 뒤를 보자니 용봉의 모양이어서 영웅은 영웅이지만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 못내 애처롭소이다." 이 말을 듣고 난 호왕이 경업을 사위로 삼지 못하게 되자 마음 깊이 상해하며 원수에게 나가 있으라 하고 호왕이 바깥채로 나와 공주의 거절하는 뜻을 말하고 마침내 원수와 작별하게 되자 많은 보석을 상으로 주었다. 경업은 많은 보석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감격하여 한결같이 대답했다. "저희 중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아서 원수의 은혜가 바다같이 깊사온데 이렇게 보물까지 나누어주시니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의 사람됨에 모두들 감격하고 있을 때, 원수는 호왕과 작별하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남경에 도착하여 황제께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칭찬하여 말하였다. "남경에 가 이토록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이제 경업의 이름이 세 나라에 크게 떨치니 이제 내 사랑하고 신임하는 믿을 수 있는 신하가 되었구나." 게다가 벼슬까지 높여 주시니 경업은 머리를 숙여 감격하였다.
한편 호왕은 이시백과 임경업을 보내고 나자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게 하고 우리 나라의 위엄을 말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의외로 가달로 인해서 임경업을 보게 되니 그 힘이 상당히 강하여서 가볍게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겠구나." 호왕이 마음이 편하지 못해함을 알고 공주가 곁에 있다가 한 마디 했다. "아버님께서는 과히 근심 마십시오. 제가 조선에 들어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이시백과 임경업을 죽이고오겠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나서 호왕은 마음이 풀려서 말하였다. "본시 너의 뛰어난 지혜는 용맹스런 사내들도 이겨낼 지혜가 없음을 잘 아는 터이니 어찌 어리석은 근심을 하겠느냐?" 잠시 후 남장을 하고 나타난 공주에게 왕은 날카로운 칼을 주고 작별하였다. 집을 떠나기 전에 공주는 왕비와도 작별을 고했다. 왕비는 다짐하여 말하였다. "이제 조선 땅에 들어가거든 우선 의주와 평양 등지에서 말소리를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 습성을 익힌 뒤에 서울로 들어가 이시백의 집을 찾아 감쪽같이 시백을 죽이고 나서 곧 의주로 가 임경업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돌아와 나라에 큰 공을 세우도록 하라. 부디 몸조심하여라." 공주가 명을 받들고 곧장 길을 떠나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먼저 평안도 의주에 이르러 이시백의 집을 찾아 왔다. 이즈음 하루는 박씨가 안채에서 저녁 인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시백은 밤이 깊어져서야 들어왔다. 박씨가 판서를 맞이하여 앉혀 드리자 아들의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워 박씨와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박씨는 엄숙하게 판서를 향해 말했다. "내일 저녁때쯤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고 하면서 설중매라는 기생이 당신 서재로 찾아갈 것입니다. 만약에 그 계집의 미모에 빠져 당신의 침실에 가까이 하시면 밤중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 계집에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제 방으로 보내 주시면 제가 잘 처리 하겠사오니 제 말을 무심하게 여기지 마시고 큰 일을 그르치게 마십시오." 유심히 듣고 있던 판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허허, 그 말씀 흥미롭군요. 어찌 판서된 도리로 조그만 계집의 손에 몸을 다칠 수 있겠소." 박씨가 마음이 상하여 얼굴을 찌푸리며 강하게 말하였다. "저의 말을 당신이 믿지 않으신다면 그 계집을 후원으로 들여보내시고 상공이 그 뒤를 따라 후원에 들어오시어 그 계집아이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시면 제 말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에 판서가 승낙하고 박씨와 밤을 지냈다.
이튿날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관청에 들어가 나랏일을 처리하고 해가 진 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손님들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은 각자 돌아갔다. 판서가 저녁 상을 물리고 한가하게 앉았는데 밤이 점점 깊어지자 어느 여자가 문을 열며 살며시 들어와 절하거늘 판서가 눈을 들고 자세히 보니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다. 판서가 당황해서 물었다. "대체 너는 어떤 계집이냐?" 그 여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주에서 살고 있는 설중매라 합니다 .상공의 훌륭하심이 시골 구석까지 파다하기에 늘 상공의 모습을 그리워하다가 사랑을 맺고자 험준한 길도 마다않고 올라왔사옵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대뜸 판서가 대답했다. "네 말은 기특하지만 이곳에는 손님이 많이 드나드니 후원의 부인에게 가 있으면 밤이 깊은 후 손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너를 부르도록 할 것이니라." 말을 마치자 계집종을 불러서 후원으로 인도하라 일렀다. 박씨의 방에 들어간 설중매는 박씨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이에 박씨가 웃으며 말하였다. "어서 올라오너라." 박씨의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들어와 앉았다. 계화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오도록 하여 한 잔 가득 술을 부어 주니 설중매가 황망히 말하였다. "저는 본시 술을 못하옵나니다만 부인께서 손수 따라 주시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하여 너댓 잔을 계속 마시더니 정신이 흐려져 술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박씨가 살펴보자 여자의 얼굴에 살기가 스며 있어 독한 기운이 드러나 보이므로 천천히 옷 속을 뒤져보았더니 날카로운 단도가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다. 박씨가 그 칼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그 칼이 갑자기 박씨에게 달려들므로 깜작 놀라서 재빨리 피하고 주문을 외워 칼을 막아내고 잠깨기를 기다렸다. 설중매는 날이 밝아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박씨가 일렀다. "어서 빨리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말하였다. "본시 저는 강원도 원주에 사는 계집으로서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 없어 춤과 노래를 배워서 기생이 되었는바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심은 대체 무슨 말씀이옵니까? 아가씨의 높으신 이름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박씨가 소리를 높여 꾸짖어 말하였다. "끝내 나를 업신여기고 속이기까지 하니 괘씸한 일이로구나! 네가 바로 호왕의 공주 기룡대가 아니란 말이냐?" 기룡대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마가 닳도록 사죄하며 말하였다. "부인께서는 신명하시어 저의 본색을 꿰뚫어 보시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부인의 말슴대로 저는 호왕의 공주로 아버님의 명을 받고 이 집에 숨어들어 왔으니 넓으신 은덕을 베푸시어 목숨만은 살려 주시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평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박씨가 차분히 일렀다. "과연 네가 사실을 말하여 용서해 주겠으니 이 길로 너의 나라에 돌아가 임금에게 전하여라. 조선에 들어갔더니 이판서의 부인을 만나자마자 본색이 드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박씨가 이르길, 내가 잠시라도 조선에서 머뭇거린다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니 하시도 지체함이 없이 돌아가서 화를 스스로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해서 돌아왔다고 하여라." 기룡대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엎드려 죄를 모두 고백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원하옵건대, 제 죄를 용서하시고 무사히 저의 나라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씨가 무섭게 말하였다. "너의 국왕이 분에 넘친 욕심을 내어서 조선을 침략하려 하니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운수가 몹시 나빠서 그렇기는 하지만 너의 군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조선을 쉽사리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니 너는 빨리 돌아가서 상세히 말하도록 하여라." 말을 끝마치고 기룡대에게 몇 잔의 술을 다시 먹이고 나가기를 재촉하였다. 기룡대는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후에 하직하고 나와서 길을 찾았으나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한참 헤매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해서 말했다. "호국의 공주 기룡대가 조선 이시백의 집에 들어가서 죽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기룡대의 통탄하는 모습을 보고 박씨가 물었다. "내가 그토록 말했는데 어찌 지금가지 돌아가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 기룡대가 땅에 엎드려 대답했다. "제가 부인의 은덕을 입고 돌아가려고 했사오나 삼면이 급경사의 낭떠러지여서 갈 수가 없으니, 바라옵건대 부인께서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박씨는 타이르며 말하였다. "그대로 너를 보내게 된다면 필시 임 장군을 죽이고 갈 것 같아서 너에게 내 솜씨를 잠시 동안 보여준 것뿐이다." 박씨는 손을 모으며 공중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러한 순간에 갑자기 천둥소리와 벼락이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기룡대의 몸이 저절로 날아서 눈깜짝할 사이에 호국의 궁성 뜰에 닿았다. 호왕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어찌하여 우리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느냐?" 한참 후에 기룡대는 의식을 차리고 여쭈었다. "하마터면 소녀는 아버님을 다시는 못 뵐 뻔했사옵니다." 호왕이 급히 물었다. "그 말은 웬 말이냐?" 기룡대가 조선에 들어가서 겪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상세하게 아뢰었다. 왕은 놀래서 한숨을 크게 쉬고 일렀다. "허, 놀라운 일도 다 있구나. 이시백의 지혜로움을 높이 칭찬하였더니 그 부인 또한, 그토록 희한한 재주를 지녔구나. 비록 조선의 땅은 작으나 재주 많은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잘 알겠구나."
왕은 많은 신하들을 모아서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누가 앞장서서 큰공을 세우겠는가?" 호왕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뜰 아래서 두 장수가 똑같이 아뢰어 말하는 것이었다. "신들에게 기묘한 재주는 없사오나, 군사를 맡겨 주시면 속히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아와 나라에 충성을 하겠나이다."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대장군 용골대와 그의 아우 용홀대였다. 왕은 몹시 기뻐하며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준치 원년이라 고치고 용골대와 용홀대로 하여금 좌우 선봉장을 삼고 군사 삼만 명을 주며 명하였다. "이제 동쪽으로 돌아가서 병자년-1636년-십이월 이십 팔일에 한양성에 도착하여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워라." 호왕의 명령을 받들고 용골대의 형제가 군사들을 훈련시켜 험한 길을 떠났다. 한편박부인은 상공을 모시고 걱정스레 여쭈었다. "기룡대가 혼이 나서 돌아간 뒤, 호국의 힘이 더욱 강대해져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임경업을 죽이고 위로는 임금님께 항복을 받고자 해서 용골대의 형제들을 좌우 선봉장으로 삼아서 북쪽으로 이십 팔일에 동대문을 깨치고 물밀 듯이 쳐들어 올 것이니, 부디 그 날을 기억하였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시어 급히 화를 면하십시오. 뒤의 모든 일은 제가 이곳에서 막아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박씨의 침착한 말에 상공의 부자는 알아 듣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그 날을 초조히 기다렸다. 드디어 십이 월 이십 사 일이 되자 시백은 임금께 진중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내의 말이 이 달 이십 팔 일 밤에 호국의 군대가 북쪽으로 해서 동대문을 깨치고 쳐들어 올 것이니 임금님과 대비님, 그리고 세자님 사형제를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게 하시어 재난을 피하라 하였습니다. 진실로 신은 그의 신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상감님께 아뢰옵니다." 상감은 크게 놀라며 산성으로 피난하려고 하시자 영의정 김자점과 좌의정 박운학이 아뢰었다. "도승지 이시백은 평화롭게 편안한 이 때에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속절없는 말을 하여 임금님을 불안하게 하니 버릇없는 이시백을 파면시킨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이에 상감께서 결정을 못짓고 머뭇머뭇 거리는데 문득 하늘에서 선녀가 칼을 옆구리에 끼고 살며시 내려와 뜰 아래서 절을 하니 임금께서 깜짝 놀라시며 물으셨다. "선녀는 무슨 일로 여기에 내려왔는가?" 그 선녀는 다시 절하고 여쭈었다. "소인은 이시백의 부인 박씨의 계집종 계화이옵니다. 박씨 부인이 제게 이르기를 지금 임금께서 간신 김자점의 허울 좋은 말을 들으시고 머뭇거리실 테니 네가 빨리 가서 광주산성으로 옮기시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어 이렇게 왔사옵니다." 말을 끝마치고 칼을 칼집에 꽂고 앞에 있는 망두석-양편에 있는 돌기둥-을 들어 내려칠 듯이 하여 김자점과 박운학에게 겁을 주며 꾸짖어 말하였다. "김자점과 박운학은 들어라. 너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라 있으면서도 임금님의 성은을 갚을 생각은 꿈도 안 꾸고 나라에 옳은 말을 하는 충신들을 헐뜯고 도리어 해치려 하니 너희 같은 썩어빠진 신하를 어찌 용서할 것이냐마는 너희 죽을 기한이 아직 되지 않아서 우리 부인의 말씀이 너희들의 죄만을 나무라셨다. 그리고 조선의 국운이 무궁하니 비뚤어진 마음을 다시 품지 말라고 하셨다." 계화의 꾸짖음에 낯이 벌겋게 달아 오른 김자점이 슬며시 물러났다. 계화는 다시 임금을 향해 엎드려 여쭈었다. "만약이 이 밤을 이대로 보내시면 큰 화를 분명히 만나실 것입니다. 부디 저와 부인의 말슴을 어기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계화는 돌아갔다. 임금은 매우 기이히 여기시고 이시백에게 이조판서 겸 광주유수를 함께 시키시고 왕족을 호위하게 하여 산성으로 가려고 했다. 본래 망두석은 태조 대왕께서 임금으로 되실 때에 일등 석수들을 불러 만들어 세워놓은 것이다. 그 무게 천근도 넘어 세상에서 그것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연약한 여자가 가볍게 드는 것을 보고 조종의 높은 관리들이 전부 놀래서 짐작을 해보았다. 그 짐작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박씨의 계집종이 저렇게 힘세니 그 주인의 신기한 재주와 지혜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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