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생전 - 권필(1569~1612)
이 작품은 선조 때의 문인인 권필이 지었다. 자를 여장, 호를 석주라 했다. 본관은 안동이요, 습재 벽의 아들로 선조 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송강의 풍모를 사모하여, 송강이 강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때, 동악 이안눌과같이 찾아가 뵈오니, 송강이 크게 반가워하며 "천상에서 내려온 두 신성을 보게 되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신선 같은 풍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권필은 공명에 뜻이 없어 과거도 보지 않고 시주로 도락을 삼고 가난하게 살았다. 31세 되는 해 여러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의 벼슬을 받았으나, 의관을 갖추고 예조에 나아가 배알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결연히 사퇴하고 말았다고 한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국왕이 의주로 피난할 조의가 분분할 때, 국왕을 잘 보필하지 못한 이산해, 유성룡 등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사 고천준을 맞아 대접하게 되어 문사를 고를 때, 한낱 야인의 몸으로 권필이 뽑혀 안팎으로 문명을 떨쳤다고 한다. 광해군의 비형으로 정국을 어지럽히고 있는 유희분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지어 퍼뜨리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시를 지은 사람을 찾던 중, 광해군 4년(1612) 깁직재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 시를 발견하였다. 광해군이 권필을 친히 국문하여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백사 이항복 등의 구명으로 죽음을 면하고 귀양갈 때, 동대문밖에 어떤 사람이 준 술에 취하여 죽으니, 그때의 나이 43세 였다. 권필은 40평생 기인, 불기인으로 처세하였으나, 그의 문장은 당대를 울렸고, 동악 이안눌 보다도 낫다고 평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석주집'이 남아있다.
주생전에 대하여
이 작품은 작자가 선조 26년(1593) 봄에 송도에 갔을 때, 이 작품의 주인공 주생을 여관에서 만났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의사를 하는 가운데 그가 지어서 보여주는 '답사행'이란 사곡 중의 연애 사건을 추궁하자, 주생이 숨기지 못하고 자기의 실연담을 얘기해 주는 것을 듣고 돌아와서 기록했다는 발문이 이 작품 끝에 있으나, 이것은 고전 작가들이 흔히 쓰는 가탁에 불과하고, 우리는 이 작품을 작자의 창작으로 보아야 하겠고, 이 작품의 창작연대는 선조26년으로 잡아야하겠다. 이 작품은 중국 명대를 배경으로 하고, 남 주인공 주생과 두 여주인공 기생 배도와 귀족의 딸인 선화와의 삼각연애를 주제로 한 애정소설이다. 남자주인공 주생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나 몰락하여 기생이 되어 있는 배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기생의 신분으로 운명에 얽매어 우는 여주인공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다. 기생배도의 눈물겨운 사랑의 호소를 받은 주생이 배도를 사랑하다가, 귀족의 딸인 선화를 만나고 부터는 배도에 대한 사랑이 선화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배도는 고민 끝에 유언을 남겨놓고 병사함으로써 주생과 배도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기생이란 신분에 대한 사랑의 염증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귀족의 딸 선화에게로 사랑을 옮긴 주생은 배도의 죽음과, 공부를 가르쳐주던 선화의 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다시 유랑의 길을 더나 어머니의 친척인 장 노인을 찾아가 선화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장노인의 주선으로 선화와 정식으로 약혼하지만,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에 출정하게 됨으로써 주생과 선화의 결혼은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다른 고전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남자의 배신으로 인한 한 여성의 죽음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고, 천한 기생에 대한 사랑보다는 귀족의 딸을 택하는 남자의 이기적인 생각, 여성의 선천적인 애욕과 질투, 비천한 신분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기생의 고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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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생의 이름은 회이고, 자는 직경이며, 호는 매천이라 했다. 주생의 집안은 대대로 전당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부친이 촉주의 별가라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촉에서 살게 되었다. 주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민 했다. 시도 잘 지었다. 나이 열 여덟에 태학 생이 되었고, 동배들의 추앙을 받는 바가 되었다. 주생 자신도 재주와 학문이 남에게 뒤지지 낳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태학에 다닌 지도 수년이 흘렀다.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을 했다. 이에 주생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 세상의 인생이란 마치 티끌이 연약한 풀잎에 깃들어 있는 것과도 같은데, 어찌 명예에 얽매여 더러운 속세에서 허덕이며 아까운 청춘을 보낼까 보냐" 이때부터 주생은 과거에 대한 뜻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장사에 뜻을 두었다. 주생이 재산을 헤아려 보니 백천냥이나 되었다. 그중 반으로 배를 구입했다. 강호를 오가며 남은 돈으로 잡화장사를 시작했다. 잇속이 있어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 이래서 아침에는 오땅에 있었고 저녁이면 초땅에 있었다. 그는 장사에만 굳이 구애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악양성밖에 배를 매어두고, 오래 전부터 친히 지내는 나생을 찾았다. 그 또한 뛰어난 선비였다. 나생은 주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주생은 취하는 줄도 모르고 대취하여 배로 돌아왔다. 날은 벌써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둥근 달이 떠올랐다. 주생은 배를 강가운데 띄워놓고 돛대에 기댄 채, 어느새 곤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배는 맞바람을 받아 쏜살같이 흘러갔다. 주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뿌연 안개 속에서 절간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달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강 양쪽 언덕에는 푸른 나무들만이 희미하게 보였고, 새벽빛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초롱 불빛이 붉은 난간의 푸른 주렴사이로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딘 가고 물으니, 전당이라고 했다.
아침이 밝았다. 주생은 고향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 태반은 벌써 세상을 떠나버린 뒤였다. 주생은 시부를 읊조리며 배회했다.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기생 배도를 만났다. 주생과는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그녀는 재주나 미모에 있어 전당에서는 제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배랑 이라 불렀다. 배도는 주생을 집으로 모셨다. 서로 마주 대하니 몹시 기뻤다. 주생은 시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배도는 시를 읽고 몹시 놀라 말했다.
"낭군의 재주가 이다지도 훌륭하니 모든 사람에게 굽힐 데가 없구료. 어찌하여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시옵니까? 그래 장가는 드시었나요?" "아직도 장가를 못 갔소." 배도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소원이옵니다. 낭군님은 이제 배로 돌아가지 마시고 저희 집에 머물러 계시 와요. 그러면 낭군님을 위해 좋은 배필을 마련해 드리겠사옵니다."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둔 터였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은근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생은 웃으면서 사양했다. "내 어찌 감히 바랄 수가 있겠소."
이렇듯 즐겁게 노는 동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배도는 어린 계집종을 불러 주생을 별실로 모셔 편히 쉬게 했다. 침실 벽에는 절구 한 수가 걸려 있었다. 시의 내용이 생소한 것이었다. 주생이 계집종에게, "이시는 누가 지은 것이냐?" 하고 물으니, "주인아씨가 지은 것이옵니다."했다. 주생은 벌써 배도의 곱디고운 자태에 흠뻑 취해있었다. 그런데다 그녀의 시를 읽으니 한층 더 정이 쏠렸고, 마음은 불같이 타올라 만 가지 생각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 시의 대구를 지어 그녀의 뜻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아무리 고심했으나 좀체 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달빛은 뜰에 가득했고, 꽃 그림자는 운치를 도왔다. 주생은 이리저리 배회했다. 홀연 문 밖에서 얘기소리, 말 우는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주생은 매우 의심쩍었다.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배도의 방은 그리 멀리 않았다. 주생은 배도의 방을 살폈다. 사창에선 촛불이 환히 비쳐 나왔다. 주생은 몰래 다가가 안을 보았다. 배도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채운 전을 퍼놓고, '첩연화'란 시를 초하고 있었다. 단지 전첩만 지었을 뿐, 후첩은 아직 짓지 못하였다. 이에 주생은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주인 아가씨의 시를 이 나그네가 채워드려도 좋겠소?" 배도는 짐짓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미친 손이 어지 하여 여기까지 오셨나요?" "내가 미친 것이 아니오. 주인 아가씨가 이 나그네를 미치게 할 따름이오."
배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주생으로 하여금 그 시를 완성하게 했다. 주생은 시를 다지었다. 그때서야 배도는 자리에서 일러 났다. 그녀는 약옥선 술잔에다 서하주를 따라 군 했다. 주생은 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배도가 아무리 권해도 사양했다. 그녀는 주생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처연히 말했다.
"저의 조상은 호족이었지요. 조부께서는 천주의 시박사 벼슬을 지내시다가 죄를 지어 서인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빈곤하여 다시는 제기할 수 없었어요. 더욱이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다른 사람 손에서 자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절개를 지켜 깨끗이 간직하려 했지만, 이미 기생의 명부에 올라 부득이 사람들과 얼려 술 마시고 놀게 됐답니다. 저는 늘 한가한 시간이면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달을 바라보며 넋을 잃곤 했어요. 이제 낭군님을 뵈오니, 풍채가 의젓하시고 거동이 활달하며, 재주가 빼어나고 생각이 깊사옵니다. 제 비록 몸은 천하오나, 침석에 모시고 건즐받들기를 원하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낭군님이 후일에 입신출세 하셔서 속히 높은 신분이 되시어, 저를 기생의 명부에서 빼주시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 주시 온다면 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낭군님이 저를 버리셔 도중에 헤어지더라도 그 은혜를 잊지 낳겠사오며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사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주생은 그녀의 하소연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씻어주며 말했다.
"그것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생각이 없을까?"
배도는 눈물을 거두고 안색을 달리하여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여야불상이요, 사기이행이라 하지 않았어요. 낭군님은 이익과 곽소옥의 일을 못 보셨는가요? 낭군님이 저를 멀리하시고나 버리지 않으시겠다 하오면 맹세의 말씀을 해주시와요."
배도는 노나라에서 나는 고운 명주 한 자락을 꺼내어 주생에게 주었다. 주생은 즉석에서 붓을 들었다. 주생이 쓰기를 마치자, 그녀는 정성껏 봉해서 치마띠 속에다 간직했다. 이 날밤, 그들은 '고당부'를 읊으며 맘껏 즐겼다. 그것은 김생과 취취며 위랑과 빙빙의 재미에 견줄 바 아니었다. 이튿날이었다. 주생은 지난밤에 들었던 사람의 말소리며 말울음 소리에 대해 물었다. 배도가 대답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붉은 대문을 한 집이 물가에 면해 있사옵니다. 그것은 죽은 노 승상 댁이옵니다. 승상은 이미 돌아가시고 노부인이 일남 일녀를 거느리고 홀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아들딸을 성사도 시키지 않고, 날마다 노래하며 춤추는 것으로 일을 삽고 있답니다. 지난밤에도 사람과 말을 내어 저를 데리러왔었어요. 그러하오나, 낭군님이 와 계시어 병을 핑계 대고 거절하였습니다."
이날 해질 무렵 승상 부인은 배도를 데리러 사람을 보내 왔다. 그녀는 또다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주생은 떠나는 배도를 문 밖까지 나가 배웅하면서, "밤을 새우지 말고 곧 돌아오도록 하오." 하고 신신 당부 했다. 배도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그 모습은 산듯한 난조 같고, 말은 나는 용과도 같이 꽃과 버들 숲을 스치면서 염염히 사라졌다. 주생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뒤따라 알려갔다. 용금문을 나섰다. 왼편으로 돌아섰다. 수홍교에 이르렀다. 웅장한 저택이 구름에 닿을 듯이 우뚝 서있었다. 주생은 곧 이 집이 물가에 면해 있는 붉은 대문 집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집은 공중에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음악 소리가 뚝 그치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밖에까지 들려왔다. 주생은 다리 위에서 방황했다. 고풍시 한 수를 지어 기둥에 적어 두었다. 주생이 방황하는 사이에 어느덧 석양의 놀이 짙어졌다. 어둠이 밀려왔다. 이때 여러 무리의 여자들이 붉은 대문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금안과 옥륵의 광채가 휘황하게 비쳤다. 주생은 배도가 이 무리 속에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길가의 빈집으로 숨어들어 지나는 십여 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배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의심쩍었다. 다리 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날은 이미 소와 말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에 주생은 곧장 붉은 대문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전혀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각 밑으로 가 보았다. 역시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생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달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각의 북쪽으로 연못이 훤히 보였다. 수면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밭 사이로는 길이 굽이굽이 나 있었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슬금슬금 걸어갔다. 꽃밭이 끝나자 집이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보 꺾어 들었다. 멀리 포도가 아래 한 채의 집이 보였다. 규모는 작으나 아담했다. 사창은 절반이나 열려 있었고,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 밑으로 붉은 치마, 푸른 옷소매가 나풀거리는데, 영락없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주생은 몸을 숨기며 다가갔다. 숨마저 죽이고 몰래 엿봤다. 금빛 병풍이며 비단 요가 눈을 부시게 했다. 승상 부인은 자색비단 옷을 입고 백옥 책상에 의지하여 앉아 있었다. 나이는 50줄이나 됐을까, 조용히 뒤돌아보는데 여유가 작작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 옆에는 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머리채는 곱게 뒤로 닿아 내렸고, 얼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맑은 눈이 살짝 옆을 흘기는 모습은 흐르는 맑은 물결 위에 가을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웃을 때면 애교가 넘쳤고, 그 입 모양은 정녕 봄꽃이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듯 했다. 이들 사이에 앉아있는 배도는 그들에 비한다면 봉황과 까마귀, 구슬과 조약돌 격이었다. 주생의 넋은 구름밖에 나앉고 마음은 허공을 맴돌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들고픈 심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갔다. 배도는 자리에서 돌아가려고 했다. 부인이 끝내 말려 했으나 그녀는 간절히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부인이 말했다.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리도 서두는가. 정든 사람과 약속이라도 있단 말인가?"
배도는 옷깃을 단정히 하고, "마님께서 하문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주생과 인연을 맺은 내력을 자세히 아뢰었다. 승상 부인이 미처 말할 사이도 없이, 소녀가 미소짓고 배도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좀더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하마터면 하룻밤 즐거운 모임을 놓칠뻔 했군." 부인도 역시 크게 웃으며 돌아가도록 했다. 주생은 재빨리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한발 앞서 배도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까지 골면서 자는 체 했다. 배도는 이내 뒤따라 왔다. 주생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는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낭군님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계시옵니까?" 주생은 제멋대로 읊어댔다. 배도는 몹시 불쾌해하며, "소위 선아 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지요?" 하고 힐문했다. 주생은 대답할 수 없어 다시 시로 써 응답했다. 주생은 배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대가 내 선아가 아닌가." 하니 , 배도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낭군님은 저의 선랑이시군요." 이 뒤부터 서로 선아 선량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생이 배도에게 늦게 들어온 사연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연회가 파한 후 다른 기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였으나, 유독 저만 남게 했나이다. 저를 따로 선화의 거소에다 불러 다시 조촐한 술자리를 벌여놓고 붙들었습니다."
주생이 자세히 유도해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선화의 자는 방경이고 나이는 열 다섯입니다. 용모가 빼어나 세속 사람 같지 않으며, 사곡을 잘 지을 뿐만 아니라, 자수도 잘 놓아 저같은 것은 감히 댈 수도 없어요, 어제는 풍입송의 사를 짓고 거기에 맞춰 금현을 뜯고자 했어요. 제가 음률을 안다고 머물게 하고서는 그 곡을 노래하게 했습니다."
주생이 다시, "그럼 그 시는 어떤 것인가?" 물으니, 배도는 소리내어 죽 읊었다. 배도가 한 구절 한 구절 읊을 때마다, 주생은 은근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짐짓 말했다.
"이 시곡에는 규방의 춘회가 남김없이 발휘되었구료. 소야란 정도의 뛰어난 솜씨가 아니면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는 좀 힘들 것 같소, 그러나 나의 선아가 꽃을 다듬고 옥을 깎는 재주만은 못하오."
주생은 선화를 본 후로 배도에 대한 정이 없어졌다. 응수할 때만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즐거운 체했으나, 마음엔 오직 선화생각 뿐이었다. 하루는 승상 부인이 어린 아들 국영을 불러 말했다.
"네 나이 벌써 열둘이 아니냐. 아직도 취학을 못하고 있으니, 후일 성년이 되면 어떻게 자립하겠느냐. 내 들은 바로는 배도의 남편인 주생은 글을 잘하는 선비라고 한다. 네 가서 배우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부인의 가법은 매우 엄했다. 국영은 이 말을 어길 수 없었다. 그날로 책을 챙겨 주생에게 갔다. 주생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됐구나'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체 하면서 허락했다. 어느 날 주생은 배도가 출타한 틈을 타 국영에게 조용히 말했다.
"네 오가면서 글을 배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네 집네 빈방이라도 있다면 내가 너의 집으로 옮겨갔으면 한다. 너는 왕래하는 불편을 덜 것이요, 나는 너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텐데."
국영은 넙죽 절을 하면서 "그러하옵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말씀드려 그날로 주생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배도는 외출했다 돌아와 몹시 놀라며 말했다.
"아마도 선랑께서는 딴 마음이 있으신가 보군요. 왜 저를 버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십니까?" "내 듣건대 승상 댁에는 삼만 축의 장서가 있다하오. 무인은 선공의 유품이라 함부로 내고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지 않소 그래서 제집에 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들을 읽어보려는 욕심으로 그러는 거요."
배도는 "낭군님께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저의 복입니다." 하고 말했다.
주생은 승상 댁으로 옮겨갔다. 낮이면 국영이와 같이 있고, 저녁이면 집안의 문이란 문은 빈틈없이 잠가버리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갖은 궁리를 다하는 동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문득 그는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선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봄이 다가도록 만나지도 못했구나. 황하의 물 말기를 기다린다면 몇 해나 기다려야 할지. 차라리 어둔 밤에 선화 방으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 일이 성공하면 귀한 몸이 될 것이요, 실패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한다 해도 좋다."
이 날 저녁 따라 달이 없었다. 주생은 어려 겹의 담을 뛰어넘어 선화의 방 앞에 이르렀다. 복도에도 구부러진 큰 기둥이 있는데 염막이 겹겹이 드리워 있었다. 주생은 얼마 동안 동정을 살폈다. 인적이 없었다. 선화 혼자만이 촛불을 발기혹 곡을 뜯고 있었다. 주생은 기둥사이에 바짝 엎드려 그 뜯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뜯기를 다한 선화는 소자 첨의 하신랑사를 작은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선화는 못 들은 척 했다. 곧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생은 방안으로 들었다. 함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 데다 약질이었다. 정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엷은 구름과 가는 비처럼 버들과 어림 꽃처럼 교태로 왔다. 울다가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살며시 미소짓다가는 가볍게 찡그리기도 했다. 주생은 별이 꽃을 찾아 날 듯, 나비가 꽃가루를 그리워하듯 매혹되었다. 정신은 한없이 무르녹았다. 어느덧 날은 밝아왔다. 난간 앞 꽃나무 가지에 앉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문득 들었다. 주생은 깜짝 놀랐다. 방을 급히 나갔다. 집과 연못은 고요했고, 새벽안개는 몽롱했다. 선화는 주생을 보내느라고 방문을 나섰다가 들어가며 말했다.
"이제 간 후로는 다시는 오지 마셔요. 이 비밀이 새나가 누설된다면 사생이 걱정되옵니다." 주생은 기가 막혔다. 목이 메어 급히 달려들어 말했다. "이제 겨우 좋은 인연을 이루었는데 어찌 이렇게도 박대를 하는 거요?" 선화는 방긋 미소 지으면서, "아까 말은 농담이에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옵고 저녁으로 만나도록 하시어요."하고 말했다. 주생은 연신 "응응"하면서 급히 달려나갔다. 선화는 방으로 들어오자 '조하간효앵'시를 일절 지어 창밖에 걸었다. 다음날 저녁이었다. 주생은 또 선화를 찾아갔다. 갑자기 담 밑 나무 사이에서 아련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켰나 싶어 달아나려 했다. 신을 끌던 사람이 청매를 던져 주생의 등을 맞쳤다. 그는 피할 곳이 없어 몹시 당황했다.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신 끌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랑, 놀라지 말아요. 앵앵이가 여기 있어요." 그제서야 주생은 선화가 한짓인줄 알았다. 일어서서 선화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왜 이렇게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요?" 하니, 선화는 웃으며 말했다. "어찌 감히 낭군님을 놀라게 하겠어요. 낭군님 혼자 지레 겁을 먹었을 뿐이지요." 주생은, "향을 훔치고 구슬을 도둑질하는데 어찌 겁이 나지 않겠소." 하고는 손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생은 창문의에 걸린 절구를 보았다. 마지막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름다운 선화가 무슨 근심이 있어 이런 시를 지었소?" 선화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자의 몸은 수심과 함께 나서, 만나지 못했을 때는 서로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면 서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니 어찌 여자의 몸으로서 편안하게도 근심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낭군님은 절단지기를 어겼고 저는 행로지욕을 받았습니다. 불행이도 하루아침에 우리 정사의 자취가 발각된다면 친척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동리 사람들은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우리들이 손을 잡고 해로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구름 속에 든 달과 같으며 숨은 꽃과도 같습니다. 설사 한때는 즐겁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테니 어찌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후, 눈물을 주룩 흘리며 원한 품은 태도를 보였다. 거의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주생은 눈물을 훔쳐주며 위로해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 하나를 얻을 수 없겠는가. 내 나중 중매의 절차를 밟아 예법대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니 너무 걱정을 마오." 선화는 눈물을 거두며 치사했다. "낭군님의 말씀대로만 될 것 같으면, 저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록 집안을 화복 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나물을 캐어 정성껏 제사를 받드는 일만은 다하겠습니다." 선화는 향합을 열었다. 조그만 화장용 거울을 꺼내어 둘로 깨뜨렸다. 한쪽은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은 주생에게 주며, "동방화촉의 밤을 기다렸다. 다시 하나로 합하와요." 했다. 또한 흰 깁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이두 물건은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제 마음의 간곡함을 나타내는 것이옵니다. 제 소원이니 승란의 처로 생각하시어 가을밤의 원한을 끼치지 마시옵고, 가사 항아가 그림자를 잃을지라도 꼭 밝은 달빛을 어여삐 여겨 아껴 주업소서."
이후로 그들은 밤이면 만났고 새벽으론 헤어졌다. 하룻밤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주생은 오랫동안 배도를 만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그녀가 이상히 여길까 두려워 그녀의 집으로 가서 잤다. 밤사이 선화는 기다리다 못해 주생의 방에까지 갔다. 선화는 주생이 쓰던 단장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그녀는 배도가 지은 시 두어 폭을 발견했다. 그녀는 화가 뿌듯이 치밀었고 질투심이 솟아났다. 그래서 책상 위에 있는 붓을 들어 까맣게 지워 버렸다. 그 밑에다 '안아미사'일 절을 지어 푸른 비단에 써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나가 버렸다. 이튿날 주생이 돌아왔다. 선화는 조금도 질투하거나 원망스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또 주머니를 끌러 본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생 스스로 깨달아서 부끄러워하게 하고자 함이어서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승상 부인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배도를 불렀다. 부인은 주생의 학행을 칭안했다. 아들 글 가르치는데 수고를 한다고 치사했다. 그리고는 손수 술을 따라 배도로 하여금 주생에게 잔을 권하게 했다. 주생은 이날 밤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배도는 혼자 앉았으니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시가 먹으로 지워진 것을 보았다. 마음은 자못 언짢았고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 밑에 '안아미사'를 보니 선화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그녀는 몹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이 시를 소매 속에 감춘 다음 주머니를 전처럼 싸매 두었다.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렷다. 주생이 술에서 깨어나자 침착하게 물었다.
"낭군님은 이곳에서 무작정 유할건가요? 도대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생은, "국영이가 공부를 아직 다 마치지 못한 탓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처의 동생을 가르치는 것이니 불가분 마음을 다해야 겠지요?" 주생은 얼굴을 붉히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요?" 하고 물었다. 배도는 얼마동안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주생은 당황하여 어찌할줄을 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만 응시 했다. 배도는 그 시를 꺼내어 주생의 면전에 던지며 말했다. "유장상종이요, 찬혈상규구료. 이 어찌 군자가 할 짓입니까? 난 지금 곧장 들어가 부인께 말씀 올리렵니다." 배도는 몸을 일으켰다. 주생은 황망히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사실대로 고백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빌었다. 선화는 나와 백년 해로를 굳게 언약한 사인데, 어찌 죽을 곳으로 몰아 넣는단 말이오." 배도는 마지못해 뜻을 돌리고는, "그렇다면 곧 저와 같이 돌아 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낭군님이 저와의 언약을 어긴 바에야 제가 무어라고 맹세를 지킬 것이오리까." 하고 말했다. 주생은 하는 수 없었다. 부인에게 딴 핑계를 대고 배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배도는 선화와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 부터는 다시는 주생을 선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마음속에 불평이 끓어올라서였다. 주생은 오로지 선화만을 생각했다. 몸은 나날이 여위어 갔다. 끝내는 병을 빙자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스무 날이 지나갔다. 돌연 국연이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이 왓다. 주생은 제물을 갖춰 영구 앞에 나아가 전을 올렸다. 선화 역시 주생과 이별한후 상사의 병이 깊어 기거 동작도 남의 손을 빌어야 했다. 문득 주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났다. 담장소복을 하고 주렴안에 혼자 서 있었다.
주생은 전을 끝냈다. 멀리 선화가 보였다. 눈을 찡긋해 정을 표시했다. 머리르 숙이고 서성거리고 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앗다. 세월은 흘러 몇달이 지났다. 배도마저 병들어 눕고 말았다.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 주생의 무릎을 베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저는 봉비하체로서 그늘에서만 살아오다가 아름다운 청춘이다가기도 전에 시들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 저는 낭군님과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비단 옷이며 좋은 관현 악기가 소용이 없고, 전날의 소원도 다 그만입니다. 다만 원하옵는 바는, 제가 죽은후에 낭군님은 선화를 취하여 배필로 삼으시옵소서. 그리고 내 죽은 뒤 시신은 낭군님이 왕래하시는 길 가에 묻어 주신다면 죽더라도 산 거같이 여기고, 편안히 눈을 감겟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기절했다. 한참만에 다시 깨어나 주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랑, 주랑이여! 부디부디 몸조심하시어요. 몸조심 하..."
이러기를 몇 번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생은 배도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그는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호산의 길 가에다 고이 묻어 주었다. 주생은 제사를 마쳤다. 그는 두 계집종과 이별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집을 잘 간수 하여라. 내 후일 성공해 돌아오면 반드시 너희들을 돌봐 주마."
계집종들은 섧게 울며, "저희들은 주인 아씨를 어머니 같이 우러러 받들었고, 아씨도 저희를 자식같이 사랑해 주시었어요. 이제 저희가 박복하여 아씨를 일찍 여의었으니, 오직 믿고 슬픔을 달랠 길은 서방님 뿐이온데, 이제 서방님 마저 가신다니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하고는 더욱 섧게 울었다. 주생은 새삼 계집종들을 달래 주고는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올랐다. 그러나 차마 노를 저을수가 없었다. 이날 밤 주생은 무홍교밑에서 묵었다. 멀리 선화의 집을 바라보니 촛대의 불빛만이 숲 속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는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만날 인연이 끊어졌음을 슬퍼했다. 그는 '장상사'일 절을 읊었다.
주생은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가면 선화와 영영 이별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머물자니 배도도 가고 국영도 또한 죽었으니, 의지 할데라곤 없었다. 벌써 날이 훤히 밝아 왔다. 주생은 하는 수 없이 노를 저어서 물길을 떠났다. 선화의 집이며 배도의 묘는 점점 아득해졌고, 산굽이를 돌아 강이 굽어진 곳에 이르니 홀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생의 외가인 장씨 노인은 호주의 갑부 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복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주생은 그리로 찾아가 의지했다. 장 노인댁에서는 주생을 지극히 후하게 대접햇다. 주생은 비록 몸은 편안하였으나, 선화를 생각한즉 정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주생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 세월은 흘렀다. 춘삼월 호시절을 맞았다. 이 해가 바로 만력 임진년 이엇다. 장씨 노인은 주생이 나날이 여위어 가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 까닭을 물엇다. 그는 감히 감추지 못해 사실대로 아뢰엇다. 장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에 맺힌 한이 잇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내 안사람과 노 승상은 동성이어서 여러해동안 긴밀히 지냈다. 내 너를 위해 힘써 보겠으니 염려하지 마라."
이런 다짐을 둔 다음 날이었다. 노인은 부인을 시켜 편지를 써, 늙은 하인을 전당으로 보내 왕사지친을 의논했다. 선화는 주생과 이별한후 날마다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여윌대로 여위어만 갔다. 승상 부인도 선화가 주생을 사모하다 얻은 병인줄 알고 있엇다. 그녀의 뜻을 이루어 주려 했으나, 이미 주생은 떠나 버려서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돌연 노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온 집안이 놀라며 기뻐했다. 선화도 누워있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세수도 하며 몸단장을 하는 등 전과 같았다. 이해 구월로 혼인날이 정해졌다. 주생은 날마다 포구로 나가 늙은 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흐레가 되던 날이었다. 그 늙은 종이 돌아 왔다. 정혼의 뜻을 전하고, 더욱이 선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주생은 급히 편지를 뜯었다. 분향냄새가 그윽했다. 편지지에는 눈물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는 선화의 애원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주생은 꿈꾸다 깨어난 것만 같고, 술에 취했다. 정신이 난 것만 같았다. 슬프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오는 구월을 손꼽아 보니 아직도 아득했다. 주생은 혼일을 고쳐 잡으려고 장씨 노인을 찾았다. 다시 한번 늙은 종을 보내 달라고 청한후, 선화에게 답을 썼다. 주생이 편지를 써 놓았으나 전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앗다. 마침내 원병을 중국에 까지 청해왔다. 사태는 매우 급박했다. 황제는 조선이 지극히 중국을 섬기므로 불가불 구원을 해야했고, 또 조선이 무너지면 압록강 서부 지방은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임을 간파했다. 장차 왕업의 존망계절이 달린 판국이어서 거절할 도리가 없엇따. 그레서 도독 이여송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때 행인사의 해인 설 번이 조선을 다녀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북방 사람들은 오랑케를 잘 막아내며 남방의 사람들은 왜놈을 잘 방어하오니, 이 싸움은 남방의 군병이 아니면 어렵겠나이다."
이래서 호절의 여러 고을에서 병정을 급히 모집하게 되었다. 그때 유격 장군 이었던 어떤 사람이 평소에 주생의 성명을 알고있어, 출전하는 날에 끌어내어 서기의 소임을 맡겼다. 주생은 굳이 사양했으나 어쩔수 없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조선으로 나왔다. 안주의 백상루에 올라 고풍칠언시를 지었다. 이듬해 계사년 봄이었다. 명군은 왜적을 대파하여 경상도로 몰아붙였다. 주생은 밤낮으로 선화를 생각하여 마침내 병이 중해졌다. 그는 종군해 남하할수 없어 송경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나는 때마침 일이 있어 송경에 갔었다. 한 여관에서 주생을 만났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앗다. 그래서 글로써 의사를 통했다. 주생은 내가 글을 안다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나는 주생에게 병든 내력을 불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근심에 싸여 응답이 없었다.
하루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나는 주생과 같이 불을 밝히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생을 답사행의 사 한수를 지어 보여주었다. 나는 몇번이나 이시를 읊었다. 그리고 시 중의 정사를 탐독했다. 주생은 더 이상 갑추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 말하지 말라느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사를 아름답게 보앗다. 그리고 이들의 기우를 한탄했고, 좋은 시일을 놓친데 대하여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헤어진후, 나는 붓을잡아 이를 써나가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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