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 (3/3)
토끼가 듣고 마음 속에 의심이 크게 일어 물었다. "그대의 노래 속에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구려. 무슨 까닭이요?" 자라는 속으로 움찔했으나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흥이 나서 그냥 부른 것인데 거기에 무슨 뜻이 있겠오?" 토끼는 그래도 의심이 안 가셔져 다시 물었다. "간사한 토끼를 얻어 공을 세웠다고 한 것과 우리 대왕의 병환이 나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오?" 자라가 토끼의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나를 의심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에 대꾸하지 않고 바삐 헤엄쳐 눈깜짝할 사이에 남해 수궁에 이르러 토끼를 내려놓았다. "그대는 부질없이 나를 의심하지 말고 빨리 숙소로 갑시다." 자라의 말에 토끼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천지가 넓고 해와 달이 밝은데 눈부신 대궐이 하늘에 솟아 있고 문과 창에는 서기가 어려 있었다. 토끼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의심이 봄눈 녹듯이 사라져 자라를 따라 숙소에 이르렀다. "토선생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내가 바로 용궁에 들어가서 우리 대왕께 그대와 같이 온 것을 여쭈고 오리다." 자라가 말하고 바삐 나가므로 토끼는 마음속에 다시 의심이 일었다. '내가 이처럼 멀리 왔는데 술 한 잔도 대접하지 않고 바삐 궁중으로 들어가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의심을 떨어냈다. '아마 나의 높은 이름을 수국의 임금과 신하들에게 먼저 들어가서 아뢰려는 거로구나. 임금은 급히 통문관 대제학 벼슬을 주시어 며칠 안으로 여러 해 그냥 두었던 사기를 쓰라고 하기에 정신이 없어 사소한 접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해서 할 일 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이때 자라가 급히 궁중으로 들어가니 모여있던 신하들이 모두 반기며 즉시 용왕께 아뢰었다. 용왕은 자라를 불러들여 용상 아래 가까이 앉으라 하며 무사히 다녀온 것을 치하하는 한편 토끼의 소식을 물었다.
자라가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이 왕명을 받자와 거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동해가에 이르렀나이다. 하여 그곳 깊은 산으로 들어가 토끼 하나를 만나 백가지로 꾀고 천 가지로 달래어 간신히 데리고 지금에야 돌아와 토끼를 여관에 머물러 있게 하고 급히 들어왔나이다. 그 동안 귀하신 몸의 병환은 어떠하신지 염려가 되옵니다." 이어 토끼를 꾀던 일을 낱낱이 아뢰었다. 용왕이 듣고 나서 무릎을 치며 기뻐하셨다. "그대의 충성심과 말재주는 가히 남해 용궁에서 으뜸이라 할 만 하도다. 하늘이 도우셔서 그대 같은 신하를 내게 내린 것이로다." 용왕은 즉시 온 조정의 신하들에게 분부하셨다. "짐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자옵고 수국의 어른이 되어 지금까지 다스렸지만 덕이 부족하여 늘 두려운 생각이 들었도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치료할 방법이 아득하던 중에 별주부의 지극한 충성으로 인간 세상에 나아가 토끼를 얻어왔으니 이제 그 간을 시험하면 짐의 병이 깨끗이 나을 것이로다. 이는 온 나라의 큰 경사이므로 모든 신하들은 영덕전으로 모여라. 별주부는 특별히 벼슬을 높여 자헌대부-정이품의 문관벼슬,-약방제조-궁중의원의 우두머리-겸 충훈부당상을 제수하노라." 자라가 듣고 황공하여 엎드려 절했다. "항공무지로소이다." 모든 신하들이 이 분부를 듣고 즐거워하며 일제히 영덕전으로 모였다. 이윽고 하례가 끝난 다음 용왕이 분부했다 ."어서 토끼를 잡아 들여라." 그러자 금부도사 명태가 나졸들을 이끌고 여관으로 풍우같이 달려갔다. 한편 토끼는 여관방에 앉아서 자라가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자라는 오지 않고 대신 금부도사가 이르러 어명을 전하며 나졸들을 시켜 꽁꽁 묶은 다음 바람처럼 몰아다가 영덕전 아래에 꿇어앉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토끼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용상을 우러러보니 용왕이 머리에 황금관을 쓰고 몸에 용포를 입고 손에 백옥홀을 쥐었는데 뭇신하들이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것이 매우 엄숙하고 위세가 놀라웠다. 용왕이 선전관 전어를 시켜 토끼에게 분부하셨다. "짐은 수국의 왕이요, 너는 산중의 조그만 짐승이로다. 짐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남해를 다스리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지 오래인데 오직 너의 간만이 약이 된다고 하는도다. 해서 특별히 별주부를 보내어 너를 데려왔으니 너는 죽음을 한탄하지 말라. 네가 죽은 뒤에는 네 몸을 비단으로 싸고 백옥과 호박으로 관을 만들어 명당자리에 장사지내 줄 것이다. 만약에 짐의 병이 낫기만 하면 마땅이 사당을 세워 너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로다. 네가 산중에 있다가 호랑이와 늑대의 밥이 되거나 사냥군에게 잡히어 죽는 것보다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느냐? 짐이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죽은 넋이라도 짐을 원망하지 말라." 이어 신하에게 명하여 빨리 토끼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오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군사들이 한꺼번에 우- 몰려들었다. 토끼는 공연히 헛된 욕심을 내어 자라를 따라 왔다가 물 속에서 원통하게 죽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스스로 취한 화인지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할 것인가? 세상에 턱없이 명예와 이익을 탐내는 자는 능히 이것을 보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토끼는 용왕의 분부를 듣자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머리를 깨뜨리는 듯하고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부질없이 부귀와 영화를 탐내어 고향을 버리고 왔으니 어찌 뜻밖의 변이 없겠는가? 이제 날개 있다 해도 날아가지 못할 것이요, 땅을 좁히는 술법이 있다 해도 날아가지 못할 것이요, 땅을 좁히는 술법이 있다 해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테니 꼼짝없이 원통한 귀신이 되는구나.' 토끼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죽을 곳에 빠진 뒤에 살아난다 하였으니 어찌 죽기만을 생각하고 살아날 방도를 헤아리지 않겠는가.'
토끼는 갑자기 한 꾀가 떠올라 짐짓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용왕이 보고 토끼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원통해서 우는 줄 알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하였다.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네가 우니 짐의 마음도 아프구나." 토끼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대왕께 아뢰오. 소인 토기는 서러워 우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대왕은 수국의 어른이시고 소인 토끼는 산중의 조그마한 짐승이오니 만일에 소토의 간으로 대왕의 병환이 나으신다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또 소토가 죽은 뒤에 후하게 장사지내며 심지어 사당까지 세워 주신다고 하시니 이 은혜는 하늘같이 커 소토는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다만 소토가 비록 작은 짐승이오나 보통 짐승과 달라 본래 방성의 정기를 타고 세상에 내려와 날마다 아침이면 옥 같은 이슬을 받아 마시며 밤낮으로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풀을 뜯어먹으므로 그 간이 참으로 신령스러운 약이 되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알고 항상 소토를 만나면 간을 달라고 보채옵니다. 이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몸에서 꺼내어 푸른 산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어 높고 험한 산봉우리 깊은 곳에 감추어 두고 다니다가 뜻밖에 자라를 만나게 되었나이다. 만약에 대왕의 병환이 이렇게 중한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찌 가져오지 않았겠나이까?" 용왕이 들으시고 크게 성내어 꾸짖었다. "네가 참으로 간사한 놈이로다. 천지간의 온갖 짐승이 어찌 간을 넣었다 꺼냈다 할 수가 있겠느냐? 네가 얕은꾀로 짐을 속여 살기를 꾀하나 짐이 어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에 속겠느냐? 네가 짐을 속인 죄는 더욱 크니 빨리 너의 간을 꺼내어 짐의 병을 고치는 한편 짐을 속인 죄를 다스릴 것이로다." 토끼가 듣고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막히어 속으로 부르짖었다. '내가 속절없이 죽는구나!' 그러나 애써 용기를 가다듬어 다시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소토가 아뢰는 말을 자세히 들으시고 굽어살피옵소서. 만약 소토의 배를 갈라 간이 없으면 대왕의 병환도 고치지 못하고 소토만 부질없이 죽을 뿐이니 다시 그 누구에게 간을 구하시려고 하시나이까? 그때에는 뉘우쳐도 소용없으니 대왕께서는 세 번 생각 하시옵소서."
용왕이 토끼의 말을 듣고 또 그 기색이 태연함을 보고 약간 믿는 눈치였다. "네 말과 같다면 간을 넣었다 꺼냈다 하는 표적이 있을 것이로다." 토끼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이제는 내게 살아날 길이 있구나.' 해서 엎드려 공손히 아뢰었다. "세상의 날짐승과 들짐승 가운데 소토만이 홀로 아랫몸에 구멍이 셋 있나이다." "셋이라고?" "그렇사옵니다. 하나는 대변을 볼 때 쓰옵고, 또 하나는 소변하는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간이 출입하는 곳이옵니다." 용왕이 듣고 크게 꾸짖었다. "네 말이 어찌 그리 간사스러우냐? 날짐승과 들짐승을 막론하여 어찌 아랫몸에 구멍이 셋 있는 것이 있겠느냐?" 토끼가 다시 여쭈었다. "소토의 구멍이 셋이 있는 내력을 아뢰겠나이다. 대개 하늘이 자시-밤 열 한 시에서 한 시 사이-에 열려 하늘이 되옵고, 땅이 축시-밤 한 시부터 세 시까지-에 열려 땅이 되옵고, 사람이 인시-밤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에 생겨 사람이 되옵고, 만물이 묘시-아침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 -에 나와 짐승이 되었나이다. 여기서 묘라는 글자는 곧 토끼의 다른 이름이니 날짐승과 들짐승의 근본을 살피자면 소토는 곧 짐승의 으뜸이라 할 수 있나이다. 산의 풀을 밟지 않는 저 기린도 소토의 아래이옵고 굶주리되 좁쌀을 먹지 않는 저 봉황새로 소토만 못하옵기에 특별히 해와 달과 별의 세 빛을 따라 아랫 몸에 세 구멍이 있나이다. 대왕께서 소토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토의 아랫몸을 한번 조사해 보시옵소서." 용왕이 듣고 이상하게 생각되시어 나졸을 시켜 자세히 살피게 했다. 그러자 과연 토끼의 아랫 몸에 세 구멍이 있지를 않은가. 용왕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말을 간이 구멍으로 꺼낼 수 있다고 하니 도로 넣을 때는 그리로 넣는가?" 토끼가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내 꾀가 거의 맞아 들어가는구나.' 그러나 내색은 않고 엄숙히 대답했다. "소토는 다른 짐승과 같지 않은 점이 많사옵니다. 만약에 새끼를 배려면 보름달을 바라보아 배옵고 새끼를 낳을 때는 입으로 낳사옵니다. 옛글을 보아도 능히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을 넣을 때에도 입으로 넣사옵니다." 용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간을 자유롭게 출입시킨다 하니 혹시 깜빡 잊고 간이 몸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서 꺼내어 짐의 병을 고치도록 하라." 토끼가 다시 아뢰었다. "소토가 비록 간을 능히 넣고 빼고 하오나 또한 정한 때가 있사옵니다. 달마다 초하루부터 십오 일까지는 뱃속에 넣어 해와 달의 정기를 빨아들여 음양의 기운을 받사옵니다. 그리고 십 육일부터 달 말까지는 몸에서 꺼내어 맑은 시냇물에 깨끗이 씻어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바위틈에 아무도 알지 못하게 감추어 두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약이라 하옵나이다. 오늘은 마침 오월 하순이니 만약 자라가 대왕의 병세가 이렇듯 중하심을 말하였다면 며칠 더 있다가 가져 왔을 터인데 아깝나이다." 그러자 자라가 엎드려 용왕께 아뢰었다. "토끼의 간이 출입한다는 말은 사기에도 없사옵고 이치에도 부당하니 먼저 배를 가르게 하옵소서. 그래서 간이 없으면 신이 다시 땅으로 나가 다른 토끼를 잡아오겠나이다." 토끼가 듣고 큰일이다 싶어 호되게 꾸짖었다. "자라야, 네 하는 수작이 갈수록 방정맞구나.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을 얘기했다면 약이 많이 든 간을 여러 개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 속이 응큼하여 벼슬하러 수궁으로 가자고 나를 꾀기만 했으니 이것이 첫 번 허물이로다. 그리고 대왕의 병세가 시급하니 어서 간을 가져와야 치료할 수 있을 텐데 무조건 나만 죽이라고 하니 한심하구나. 네놈의 생긴 형용이 음침하고 고약하니 함께 안락함을 맛볼 수가 없도다. 나를 죽여 간이 없으면 어떤 토끼가 다시 오겠느냐? 내가 수궁 벼슬하러 너를 따라갔다는 말이 온 산중에 퍼졌을 테니 만약에 내가 다시 안 나가고 너 혼자 또 나가면 산중 벗들이 나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을 것이로다. 그렇게 되면 다른 토끼를 잡기는커녕 네 목숨조차도 보전키 어려울 것이다. 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대왕의 병환은 어떻게 고치겠느냐? 너처럼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을 하니 가엾구나. 정말 나라 망칠 역신이로다. 내 목숨 죽는 것은 조금도 한이 없다. 독수리, 사냥개에게 구차스럽게 죽지 말라고 수정궁 용왕 앞에서 칼로 이 배를 가르면 그런 영화 어디 있겠느냐? 자, 어서 내 배를 갈라라." 토끼가 배극 왈칵왈칵 내미니 자라는 대꾸할 말이 없어 눈만 꿈뻑꿈뻑했다.
용왕이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배를 갈라 간이 없다면 토끼만 죽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어디 가서 다시 토끼를 잡아온단 말인가? 차라리 잘 달래어 간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신하에게 명하여 토끼를 묶은 것을 끌러주고 용상 가까이 불러올리니 토끼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용왕은 옥으로 만든 잔에다 천일주를 가득 부어 토끼에게 주며 놀란 마음을 진정하라고 위로하였다 ."토선생은 짐이 실례한 것을 용서하라." "황공무지로소이다." 토끼가 공손이 받들어 마신 다음 아뢰는데 갑자기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신이 듣자하니 토끼는 본래 간사한 짐승이라 하옵나이다. 또 옛말에도 군자는 이치를 따져 속인다고 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토끼의 말을 곧이 듣지 마시고 어서 간을 꺼내어 귀하신 몸을 고치시옵소서." 모두가 바라보니 바른 말 잘하기로 이름난 대사간 자가사리였다. 토끼가 듣고 가슴이 떨려 얼른 엎드려 죄를 청했다. "대왕께서 소토가 거짓말을 아뢰었다고 믿으신다면 서슴치 마시고 소토의 배를 가르시옵소서." 용왕이 웃으며 말했다. "토선생은 산중의 선비인데 어찌 거짓말로 짐을 속이겠는가. 대사간은 물러가 있으라." 이어 토끼를 위해 잔치를 베풀라 명하였다. 토끼가 대접을 받는데 금강초, 불로초는 옥으로 된 쟁반에 가득 담겨 있고, 향기롭고 맑은 술은 잔마다 가득히 차고 풍악이 꽝꽝 울리었다. 또 미녀 수십 명이 나와 춤추며 노래하니 토끼는 절로 흥이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간을 내어주고도 죽지 않을 것 같으면 이곳에서 살고 싶구나.' 이때 용왕이 토끼의 기분 좋음을 보고 은근히 위로했다. "짐은 수국에 있고 그대는 산중에 있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서로 만난 것은 좀체로 보기 힘든 기이한 인연이로구나. 그대가 짐을 위하여 간을 가져오면 짐이 어찌 그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겠는가. 후한 상을 내릴 뿐만 아니라 부귀를 같이 누릴 것이니 그대는 깊이 생각하여 실행하라." 토끼가 엎드려 공손이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소서. 소토가 분수에 넘치게 대왕의 너그러우신 덕을 입고 목숨을 살렸으니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이까? 하물며 소토는 간이 없을지라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이를 아끼겠나이까?" 용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토선생의 뜻은 참으로 크도다." 잔치가 끝나나 뒤에 용왕은 신하에게 명하여 토끼를 인도하여 딴 궁궐에 가서 쉬게했다. 토끼가 신하를 따라 갔더니 너무나 화려한 것이 눈이 으리으리했다. 운모병풍과 진주발이 사방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저녁밥을 올린 것을 살펴보니 맛있는 음식들이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토끼는 자신의 처지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하여 속으로 궁리했다. '내가 비록 한때의 속임수로 용왕을 속였으나 이곳에서 어영부영하고 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해서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튿날 다시 용왕을 뵙고 여쭈었다. "대왕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가므로 소토는 빨리 산중으로 가서 간을 가져올까 하옵니다. 부디 소토의 작은 정성을 살피옵소서." 용왕이 크게 기뻐하시며 자라를 불러 분부하셨다. "그대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토선생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나가 간을 구해 오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자라가 머리를 조아리며 분부를 받들었다. 용왕이 다시 토끼에게 말했다. "토선생은 빨리 돌아오라." 하고는 진주 이백 개를 선물로 내리셨다. "이것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우선 짐이 정으로 선사하노라." "황송하나이다."
토끼가 공손히 받은 후에 용왕께 하직하고 용궁을 벗어났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모두 나와 전송하며 빨리 간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부탁하는데 대사간 자가사리만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 때 토끼가 자라의 등에 다시 올라타고 넓고 푸른 바다를 건너 바닷가에 이르렀다. 토끼는 자라의 등에서 내려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속으로 외쳤다. '이는 참으로 그물을 벗어난 새요, 함정에서 벗어난 호랑이로다. 만약 나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어찌 고향 산천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해서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어 놀았다. 자라가 이를 보고 재촉했다. "우리의 길이 바쁘니 어서 빨리 간이 있는 곳으로 가십시다." 토끼가 듣고 눈을 부릅뜨며 꾸짖었다. "네 이놈 자라야, 네 죄를 논하자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겠도다. 대체 오장육부에 붙은 간을 어떻게 넣고 빼겠느냐? 이것은 내 기특한 꾀로 너의 왕과 신하들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너의 용왕의 병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그야말로 바람난 말과 소는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옛말과 같은 것이다. 또 네가 공연히 산중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나를 갖은 감언이설로 꾀러 내어 네 공을 나타내려고 하였으니 내가 용궁에 들어서 놀란 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산중으로 잡아다가 우리 산중 짐승을 다 모아서 잔치를 베풀어 너를 푹 삶아서 백소주 안주감으로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네놈이 왕께 충성하느라고 한 짓이고, 또 네가 나를 업고 푸른 바다를 왔다 갔다 한 수고를 생각하여 목숨만은 살려 보내겠다. 그리 알고 돌아가되 좋은 약을 보내기로 왕에게 약속했으니 점잖은 내 체면에 어찌 거짓말을 하겠느냐? 나의 똥이 무척 좋아 열을 식힌다 하고 사람들이 주워다가 병든 아이들에게 먹이나니 네 왕의 두 눈이 열에 들떠 있더라. 갖다가 복용하면 병이 곧 나으리라." 이어 철환똥을 많이 누어 칡잎에 단단히 싸서 자라등에 올려놓고 칡으로 감아주니 자라가 짊어지고 무수히 감사하며 용궁으로 돌아갔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으니 토끼가 오죽 좋겠는가.
깡충깡충 뛰어가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천하장사 항우는 병사 팔천을 거느리고 한태조와 천하를 다투다가 오강을 도로 건너가지 못했고, 형가는 만고 협객으로 함 척 검 빼어들고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역수를 도로 건너지 못하였도다. 신통한 나의 재주 죽음에서 교묘한 언변으로 용왕을 속이고 이 물을 도로 건넜구나. 반갑도다, 반갑도다. 우리 고향 반갑도다. 청산록수는 이전에 볼 때와 다름이 없고 푸른 산봉우리 흰구름은 내가 앉아 졸던 곳이로다. 저 과실나무 열매는 내가 주워 먹던 것이로다. 너구리 아저씨 평안하오. 오소리 형님 잘 있는가. 부귀공명 생각일랑 부디 하지 말고 고향 떠날 생각 부디 하지 마소. 벼슬하던 몸 괴롭고 타향에 가면 천대받네. 몸에 익은 푸른 산, 밝은 달, 낯익은 우리 친구 주야로 만나서 즐겨 노세."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자라는 용궁으로 들어가서 가지고 간 토끼의 똥을 바치니 용왕이 먹고서 병이 나아 만고충신이 되었다. 토끼는 신선을 따라 월궁으로 올라가서 여태까지 약을 빻고 있구나. 자라와 토끼가 본래 미물로서 장한 충성, 교묘한 꾀가 사람과 같은 고로 얘기로 길이 전해진다. 사람이라 스스로 뽐내다가 자라나 토끼만도 못하면 그 아니 부끄러운가. 부디부디 조심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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