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전 (2/4)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조웅의 나이 어느덧 열 다섯 살이 되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생김새가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한 대장부였다. 하루는 조웅이 모친을 뵙고 아뢰었다. "소자의 나이 열 다섯 살이 되었나이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한 곳에서 보낼 것이 아니라 천하를 두루 다니며 세상 구경도 하고 서울의 일도 알고 싶사오니 허락하여 주소서." 왕부인은 듣고 크게 놀라 거듭 말했다. "만리 타향에 와서 오직 너만을 믿고 살아왔는데 어찌 이 어미를 두고 떠나려고 하느냐? 네가 떠나겠다면 이 어미도 같이 가겠다." 조웅은 더 이상 여쭙지 못하고 스승인 월경대사에게 의논을 드렸다. "제가 모친께 세상에 나아가 역적의 소식도 듣고 그 간의 형편을 알고자 했더니 꾸중만 들었습니다. 부디 스승께서는 어머님의 마음을 돌리시어 제 뜻을 펴게 해주십시오." 월경대사도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쾌히 응낙했다. 그리하여 며칠 뒤에 왕부인을 찾아가 조웅의 뜻을 아뢰니 부인은 벌써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사님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옹의 나이 아직 이십도 안되었는데 어찌 홀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월경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빈승이 웅의 길흉을 짐작하지 못하면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왕부인은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만약 대사님의 예측이 빗나가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빈승이 웅의 일생을 짐작하는 것쯤은 감히 장담하겠습니다." 이에 부인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조웅은 크게 기뻐하여 이튿날 아침 모친과 스승, 그리고 여러 중들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산을 내려왔다. 몇 년만에 세상에 나오니 조웅은 기분이 날아갈 듯하여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를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하루는 강호라는 곳에 이르니 무척 큰 고을이어서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고 상점이 즐비했다. 한참 구경하다가 한 곳에 이르니 머리가 눈같이 흰 노인이 다 떨어진 옷에 검은 띠를 두르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범상치가 않았다. 특히 조웅의 눈에 띈 것은 백발노인의 앞에 놓인 장검이었다. 이 장검은 보기에는 웅장하여 저절로 욕심이 생겼으나 수중에 돈이 없으니 멀리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칼을 사려고 해도 백발노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자 백발 노인은 장검을 들고 가버렸다. 조웅은 객점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백발노인의 칼이 머리를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조웅은 아침 식사도 잊은 채 백발노인이 앉았던 곳으로 달려갔다. 백발노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칼 이외에도 벽에 글귀를 써 붙였는데 살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화산도사의 한쪽 소매가 무거우니 행색이 칼 파는 노인 같다. 사람마다 칼 값을 물으니 노인이 이르되, 내 기다리는 자 있도다. 앞으로 만 사람이 와도 팔기를 원치 않노라. 아, 조웅의 소식을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기다리는 사람은 어이해서 오지 않는고.> 조웅은 글을 다 읽자 크게 놀라 백발노인에게 절했다. 백발노인은 한참 살피더니 조웅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대 이름이 조웅인가?" 조웅은 공손히 대답했다. "제가 바로 조웅이옵니다. 어르신네께서는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시는지요?" 백발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야 자연히 알고 있지. 하늘이 보검을 주시었으므로 임자를 찾아내고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에 큰 별이 강호에 비쳤기에 이곳에 와서 기다렸다. 어제 그 별이 더욱 비치므로 자네가 나타날 줄 알고 글을 써서 알렸다." 하면서 보검을 주었다. 조웅은 보검을 공손히 받아 살펴보니 길이가 석 자요, 그 가운데는 금빛 글자로 <조웅검>이라고 뚜렷이 씌어져 있었다. 조웅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귀한 보검을 주시니 이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보검은 그대의 것이다. 나는 다만 전해 주었을 뿐이니 어찌 은혜라 할 수 있겠는가?" 백발노인은 말하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대의 앞길은 창창하니 부디 큰 공을 세우라." 조웅이 무척 섭섭해 하니 백발노인은 다시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칠백 리를 가면 관산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 산중에 천명도사라는 분이 계시다. 네 정성이 지극하면 만날 수가 있으니 어서 여기를 떠나거라."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조웅은 백발노인이 가르쳐 준대로 남쪽으로 떠나 며칠만에 관산에 도착했다. 산중으로 들어가니 깎아 세운 듯한 절벽 밑에 아담한 초가집이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맑은 연못이 있어 연꽃이 만발하고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조웅이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흰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신선 차림의 천명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맞이했다. 조웅이 엎드려 절하고 뵈오니 천명도사가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내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하늘의 뜻을 따라 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니 힘써 배우라." 하거늘, 조웅이 제자의 예를 베풀고 그날부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먼저 육도삼략을 익힌 다음 천문 지리를 담은 천문도를 배우니 조웅은 눈앞이 트이는 듯하여 침식을 잊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하루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쯤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벼락치는 소리가 산중의 고요를 깨뜨렸다. 조웅이 놀라 천명도사에게 까닭을 물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변입니까?" 천명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 산중에는 한 마리의 천마가 있는데 어찌나 날쌔고 용맹한지 구름을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구나. 너는 나가서 이 천마를 얻도록 하여라." 조웅이 크게 기뻐하여 나가보니 과연 한 마리의 천마로 전신의 털이 불꽃처럼 붉었다. 그리고 절벽 사이를 비호처럼 뛰어다니는데 바람 소리가 윙윙 날 지경이었다. 조웅이 이를 보고 크게 외쳤다. "네 어찌 임자를 모르고 날뛰느냐?" 그러자 적토마는 조웅을 뒤돌아보더니 반가운 듯이 달려와 울어댔다. 조웅은 말의 목을 몇 번 쓰다듬어 주다가 조웅을 뒤따라 나와 지켜보고 있는 천명도사에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위해 미리 말까지 마련해 주셨군요?" "하하하... 이 천마는 네가 앞으로 행동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늘이 낸 물건은 임자가 있는 법이니 너는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느니라." 천명도사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더욱 힘을 다해 신통한 술법을 가르치니 조웅의 무술은 날로 눈부시게 뛰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웅이 스승에게 나아가 여쭈었다. "어머님을 객지에 두옵고 오랫동안 뵙지 못했으니 잠깐 찾아 뵈옵고 오겠습니다." 천명도사는 허락하고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 조웅이 하직하고 적토마에 올라 한 번 채찍질하고 바람같이 달려갔다.
어느 새 칠백 리 밖의 강호에 이르러 한 객점에 들어가 쉬었다. 이 객점은 위나라 장진사의 집인데 진사는 일찍이 죽고 그 부인이 홀로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사는 집이었다. 그 진사의 딸이 인물도 아름답고 학문에도 뛰어나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해서 그 모친은 딸에 어울리는 훌륭한 신랑을 얻고자 객점을 차리고 오가는 길손을 청하여 은근히 인물을 구경하던 참이었다. 이날 조웅이 들어가니 부인이 계집종에게 어떤 손님이냐 물었다. "마님, 어린 나그네이옵니다." 계집종은 간단히 대답했다. 부인은 크게 실망하여 딸의 나이가 벌써 열 여섯인데 신랑감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안타까와했다. 조웅은 저녁을 먹고 뜰에 나가 밝은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때 안채로부터 꾀꼬리같이 아름답고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초산의 나무를 베어 객실을 지은 뜻은 인걸을 보려한 것인데, 영웅은 아니 오고 거지들만 오는구나. 오동나무 베어 거문고를 만든 뜻은 원앙새를 보려 한 것인데 까마귀만 지저귀는구나. 아이야, 술잔에 술 부어라. 술로써 근심이나 풀자꾸나.> 조웅은 자기도 모르게 노랫소리에 취해 정신이 황홀해졌다. 이에 행장을 풀어 퉁소를 꺼내어 화답하니 그 소리가 그지없이 맑았다. 부인과 딸이 내당에서 이 퉁소 소리를 듣고 매우 놀랐다. 이어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려오니 그 가사는 이러했다. <십 년을 공부하여 천문도를 배운 뜻은 달나라의 항아 - 달 속에 있다는 선녀 -를 보려했더니, 은하수에 오작교가 없어 오르기 어렵구나. 푸른 대나무를 베어 퉁소를 만든 뜻은 그리운 님을 보려 한 것인데, 그 누가 이 뜻을 알리오. 아서라, 아는 이 없으니 나그네의 근심이나 위로할까 하노라.> 부인과 딸이 듣고 마음이 황홀하여 중문으로 나와 살며시 엿보니 나그네의 얼굴이 비범하고 풍채가 훌륭한 것이 눈이 번쩍 뜨였다.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딸을 보고 말했다. "공자 같은 성인이 나시매 기린이 나고, 아름다운 딸이 나매 영웅이 나는도다." 하니, 장낭자가 부끄러워 별당에 들어가 숨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빡 졸았는데 꿈속에 부친이 나와 엄숙히 이르기를, "너의 평생 좋은 짝을 데려왔으니 오늘밤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도록 하라. 집없는 나그네이니 한 번 가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시며 빨리 나가라고 성화같이 재촉하는 것이었다. 장낭자가 일어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일곱 개의 별을 입에 물은 황룡이 내려와 치마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크게 놀라 깨어보니 일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기이한 꿈이었다.
이때 조웅은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져 중문을 열고 별당까지 이르렀다. 장낭자가 이를 보고 놀라 이불 속에 몸을 숨기니 조웅은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께선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길가던 나그네인데 시를 읊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왔소이다." 장낭자가 황망히 대단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인데 어찌 예절을 돌보지 않고 아녀자의 방에 들어오십니까? 어서 나가십시오." 그러나 조웅은 물러가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낭자께서는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나도 양반의 후예이니 어찌 예절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처지가 부모의 승낙을 받을 수가 없으니 나중에 아뢰기로 하고 백년 가약을 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장낭자는 부끄러움에 고개만 푹 떨구었다. 이에 조웅이 낭자의 손을 이끌고 백년 가약을 맺으니 어찌 천생 배필이 아니겠는가. 은근한 정으로 밤을 지냈는데 날이 샐 무렵에 닭이 울자 조웅이 떠나가려고 했다. 장낭자가 하루만 더 머물러 모친을 뵙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붙잡았으나, 조웅은 자기도 역시 모친을 천 리 밖에 두고 떠난 지 삼 년이나 되기 때문에 하루도 지체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려 주었다. 장낭자는 할 수 없이, "그렇다면 무슨 신물이라도 남겨 주소서." 하니, 조웅이 옳게 여기며 행장에서 부채를 꺼내 시 한 구절을 지어주면서 이 다음에 만나는 신표로 삼도록 했다. 장낭자가 받아서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시귀였다. <퉁소로 미인의 거문고에 화답하고, 쓸쓸한 방안으로 나를 모르게 들어갔도다. 오늘밤 어린 신랑은 누구인가? 소년 영웅 조웅이 분명 하도다. 새벽바람에 눈물로 하직하니, 길이 아득하여 언제 온다 약속을 못하겠구나.> 조웅이 하직하고 말을 재촉하니 장낭자는 문에 기대어 눈물만 흘렸다. 이 때 장낭자의 어머니 위부인이 한 꿈을 꾸었는데 황룡이 난데없이 나타나 딸을 업고 구름 속으로 올라가므로 발을 구르며 딸을 부르다가 깨어보니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창문을 여니 날이 밝았으므로 별당으로 나가보니 딸은 아직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얘야, 날이 밝았는데 아직도 누워 있느냐?" 모친이 말하자 장낭자는 어색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위부인이 딸의 모습을 살피다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네 모습을 보니 정신이 없는 듯하구나. 어디가 아프냐?" "아니옵니다. 밤에 달빛을 구경하다가 늦게 잤으므로 조금 피로할 따름이옵니다." 이 때 계집종이 와서 바깥채에 머무른 손님이 벌써 떠나갔음을 알렸다. 위부인은 크게 놀라 급히 종들을 풀어 나그네의 종적을 찾았으나 천리마를 타고 날 듯이 간 조웅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여러 해를 벼른 끝에 훌륭한 신랑감을 만났다가 곧 잃었으니 이런 변이 있나!" 위부인이 발을 구르며 애석해 하자 장낭자가 곁에서 위로했다. "어머니는 너무 근심 마옵소서. 세상사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후일을 기다려 봄이 좋을 듯합니다."
한편 -. 왕부인은 아들을 보낸 다음 밤낮으로 근심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하루는 월경대사가 와서 위로했다. "부인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웅이는 어진 스승을 만나고 또 훌륭한 보물을 많이 얻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왕부인은 의아하여 급히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떻게 아십니까?" "빈승이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웅이 나타나 말하기를 좋은 스승과 기이한 보검, 그리고 하루에 능히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천마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웅이가 이리로 오고 있으니 만나 보시면 모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언제 당도할 것인가를 물었다. 월경 대사는 잠시 손을 짚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밖에 있으니 조금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하고 부인을 모셔 절 문밖에 나가 기다렸다. 과연 잠시 후에 불꽃같이 붉은 털을 가진 천리마 위에 한 소년이 타고 나는 듯이 달려오는데 그것이 바로 조웅이었다. 조웅이 말에서 내려 모친게 엎드려 절하니 부인은 아들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가 조웅이 그 간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모친과 스승은 하늘이 도와주셨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다시 모친과 만나 조웅은 그 동안 못다한 효도를 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하루는 부인이 아들을 보고 말하기를, "이제 네가 이렇게 컸다만 머나먼 타향에 친척도 없으니 너의 짝을 누가 정해줄 것이냐? 내가 생전에 네 짝을 보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에 조웅이 모친을 위로했다. "어머님께서는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천지 만물이 모두 짝이 있는데 사람이 설마 짝이 없겠습니까?" 하고는, 문득 땅에 엎드려 사죄를 청했다. "어머님, 이 불효 자식을 꾸짖어 주십시오." 왕부인이 크게 놀라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대체 무슨 죄를 졌다는 것이냐?" "어머님께 불효한 일이 있나이다. 소자가 스승님을 떠나오다가 강호에서 장낭자와 백년 가약을 맺었나이다." 하고는 일의 전후를 소상히 아뢰었다. 왕부인이 듣고 크게 기꺼워하였다. "네 말을 들으니 참으로 천생배필이구나. 그것 역시 하늘이 지시한 것이로다." 월경대사도 듣고 같이 기뻐했다. 조웅이 며칠 후에 모친께 아뢰었다. "스승님과 기한을 정하고 왔사오니 이제 어머님 곁을 떠나야 할까 합니다." 모친이 섭섭한 마음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네 말이 당연하다. 그러나 네 소식이 궁금하면 어디 가서 알아보면 될지 모르겠구나." 월경대사가 옆에서 대신 말했다. "부인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웅의 거처는 빈승이 아나이다." 부인이 월경대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어서 떠나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조웅이 하직하고 여러 날 만에 관산에 이르니 천명도사께서 웃으며 맞이했다. "네가 기약한 날짜를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도다. 어머님께서는 편안하시더냐?" 조웅은 엎드려 아뢰었다. "어머님은 편안하시옵니다. 스승님께서도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천명도사는 빙그레 웃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거동을 보아하니 분명 배필을 정한 듯하구나." 조웅이 땅에 엎드려 사죄했다. "스승님께 큰 죄를 지었나이다." "하하하... 하늘이 정한 것이니 너는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 천명도사는 조웅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그 동안 쉬었던 공부를 다시 계속했다. 조웅의 뛰어난 재질은 육도삼략과 천문 지리, 그리고 신기한 술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스승은 매우 흐뭇해 했다. 하루는 천명도사가 밝은 달빛에 조웅을 데리고 천문을 살피다가 갑자기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웅아, 네 앞길에 큰 근심이 생겼구나." 조웅이 놀라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소서." "너의 처가집에 죽음의 변이 닥쳤으니 빨리 가 보아라." 천명도사는 엄숙히 말하고는 환약 세 알을 내주었다. 조웅은 약을 받아 가지고 적토마를 몰아 나는 듯이 강호로 달려갔다.
이 때에 장낭자는 조웅을 보내고 소식이 없자 마침내 병이 들어 눕고 말았다. 이에 어머니 위부인이 온갖 약을 써서 치료하였으나 치료되기는커녕 병만 더 위중해졌다. 그러던 차에 조웅이 장진사 댁에 도착하니 슬피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고 있었다. 조웅이 계집종을 불러 물으니 울면서 대답하기를, "저의 아가씨의 병이 위중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조웅이 급히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주인께 아뢰어라. 내게 약이 있으니 병세를 자세히 알려주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계집종이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여쭈니 위부인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때라 부리나케 병세를 적어 보냈다. 그러자 조웅이 잠시 생각하더니 환약을 꺼내 주며 말했다. "이 환약을 환자에게 먹이고 따뜻한 음식을 먹이도록 하라." 과연 시키는대로 환약을 먹이니 장낭자는 언제 병이 들었냐는 듯이 일어났다. 위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와 조웅의 손을 잡고 사례했다. "공자는 나의 딸을 살려냈으니 우리 집의 은인입니다. 부디 우리 딸을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조웅이 듣고 겸사했다. "떠돌아다니는 몸에게 이렇듯 중한 말씀을 하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분부가 있어야 하니 돌아가서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하고는, 작별을 고하자 위부인은 부디 소식을 빨리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조웅이 관산으로 돌아와 스승께 절하며 감사드렸다. 하루는 천명도사가 조웅을 데리고 큰 바위에 올라가 천기를 보더니 크게 놀라며 말했다. "웅이야, 저것이 보이느냐? 별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천하가 시끄럽게 되었구나. 지금 서쪽 오랑캐가 크게 세력을 떨쳐 대륙을 취하려고 하니 너는 먼저 위나라를 돕고 그 다음에 대송을 회복하라." 조웅이 엎드려 아뢰었다. "어리석은 제자가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건 염려 말아. 네 재주면 능히 나라를 구할 수 있도다." 스승이 엄숙히 말하니 조웅이는 즉시 행장을 차리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제자는 다녀오겠습니다." 천명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이별은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부디 몸을 자중하라." 조웅은 스승과 작별하고 나서 즉시 모친에게로 말을 몰았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장낭자의 병을 고쳐준 일을 여쭈니 모친이 크게 기꺼워하셨다. 조웅이 몸을 바로 하고 모친께 아뢰었다. "지금 서쪽 오랑캐가 세력을 떨쳐 위국을 침범하려고 하니 소자가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나가 막을까 합니다." 왕부인이 크게 놀라 극구 만류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싸움터에 나가겠다는 거냐? 부질없는 생각은 먹지 말아라." "스승님의 명령인데 소자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조웅이 꿋꿋이 말하니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다. "스승님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이 어미도 막을 수가 없구나. 위왕은 네 부친과 전부터 친교가 있는 분으로 이름은 신광이시다. 먼저 위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이 어미를 다시 보도록 하여라."
조웅이 모친에게 작별을 하고도 천리마를 몰아 전쟁터로 향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가도 인가가 하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컴컴한 산길로 들어왔다. 얼마쯤 가다가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므로 발길을 재촉하니 초가집 두 채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니 한 늙은이가 나와 맞이했다. 조웅이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쉬기를 청하자 노인은 쾌히 응낙했다.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병서를 읽고 있는데 자정이 되어서 문득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살며시 들어와 절을 했다. "너는 어떤 여자이길래 깊은 밤중에 남자의 거처를 찾아오느냐?" 그러자 절세 미녀가 맑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 마을에 사는 여인으로 공자의 행차가 쓸쓸한 것을 보고 위로해 드리고자 왔나이다." 조웅이 듣고 틀림없이 귀신이라 여기고 축귀문 - 귀신을 쫓는 주문 -을 외우니 여인이 울면서 방을 나갔다. 이에 조웅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병서에 열중했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일며 돌멩이가 사방으로 나는 것이 천지가 뒤집히는 듯했다. 게다가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고 하므로 조웅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키가 구 척에다가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찬 한 장수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면 한 번 보고 까무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형상이었으나 조웅은 도리거 두 눈을 부릅뜨고 보검을 빼어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쳤다. "너는 어떤 귀신이길래 감히 대장부를 능멸하는가!" 그러자 그 장수가 땅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조웅이 이상하여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깊은 밤중에 이렇게 나타난 것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데 무슨 곡절이오?" 장수가 눈물을 거두고 대답했다. "저는 관서땅에서 약간 이름을 날린 장수인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원한이 없겠습니까? 그러다가 오늘 뜻밖에 훌륭한 영웅을 만났으니 제 원수를 갚을 때가 온 듯하여 감히 시험해 보았습니다. 조금 전의 그 여인은 제가 평생 사랑하던 아내입니다." 하며, 문을 열고 부르자 그 미인이 갑옷과 큰 칼을 들고 들어와 절을 했다. 조웅이 급히 답례하자 그 장수가 말을 이었다. "제 아내가 영웅께 드리는 갑옷과 칼은 부디 성공하시어 저의 원한을 풀어주십사 하는 뜻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승리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갑옷과 칼을 무덤 앞에 묻어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수와 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노인을 불러 물으니 한 무덤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 뒤로 가보니 두 개의 무덤이 있는데 한 무덤 앞에는 <관서장군 활달의 묘>라는 비석이 서 있고, 그 보다 작은 무덤 앞에는 <관서 장군 월랑의 묘>라고 씌인 비석이 서 있었다. 조웅이 절하고 황금 갑옷과 칼을 가지고 위국으로 떠나니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친 듯했다.
며칠 후에 위나라에 당도해서 싸움터로 가서 보니 넓은 벌판에 양쪽이 진을 쳤다. 서쪽 오랑캐 서번국 군사는 산을 등지고 진을 쳤고, 위나라 군사들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서번은 세력이 강해 용맹한 장수가 구름처럼 많고 군사가 강해 위나라가 맞서 싸우기를 한 달이 되어도 매번 지기만 했다. 이 날도 서로 맞붙어 싸우는데 서번국의 장수가 칼을 번뜩일 때마다 위국 장수는 맥없이 죽거나 도망치기에 바빴다. 번장이 의기양양하여 크게 외쳤다. "위국 장수는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그러자 위국 병사는 얼굴색이 변해 벌벌 떨었다. 위왕이 더 버틸 수가 없어 항복하는 글을 써서 후군장에게 주어 보냈다. 후군장이 번왕에게 나가 항서를 바치니 번왕은 도리어 크게 화를 냈다. "너의 왕이 앉아서 항서만 보내니 어찌 이토록 무례하냐? 우선 네 머리를 베어 본보기로 삼으리라."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후군장의 머리가 벌써 말 아래로 굴렀다. 이어 번국 중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가 머리를 칼로 꿰어들고 달려드는 위국 병사는 사시나무 떨듯했다. "마지막이로다!" 위왕은 이를 보자 비통히 부르짖으며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다. 이때 조웅이 이 모양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갑옷을 입고 보검을 빼어든 채 천리마를 타고 나는 듯이 달려가며 우레같이 호통쳤다. "번장은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양진의 군사들이 어리둥절하여 보고 있는 사이 조웅은 번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또 웬놈이냐?" 번장은 우습다는 듯이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조웅은 머리를 낮추어 쉽게 적의 칼을 피하더니 보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그러자 부로가 일 합도 겨루지 못하고 번장의 목이 땅위로 굴렀다. 조웅은 적장의 목을 칼 끝에 꿰어들고 나는 듯이 위진으로 돌아왔다. 위왕은 이것이 혹시 꿈이나 아닐까 해서 조웅이 말에서 내려 엎드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조웅은 엎드린 채 죄를 빌었다. "제가 외인으로 당돌하게 나섰으니 죄를 내리소서." 위왕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하했다. "과인이 어리석은 탓으로 장군을 미리 맞아들이지 못했구려. 과인의 목숨이 오늘로 끝나게 된 것을 장군이 살려 주었으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소. 그런데 장군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조웅은 위왕이 부친과 친함을 아는지라 자기의 내력과 지난 일을 숨김없이 아뢰었다. 그러자 위왕이 크게 놀라며 조웅의 손을 붙들고 말하였다. "장군의 부친은 곧 내 어릴 적의 벗이다. 이제 그대를 보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이어 대성의 소식을 물었다. 조웅은 이두병이 송나라를 멸하고 자칭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자신과 어머니가 역적의 손길을 벗어나려고 망명하여 다니던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위왕이 듣고 송나라 서울을 향해 절하고 슬피 우시니 그 충성이 본래 크고 아름다웠다. 조웅이 같이 눈물을 흘리다가 도리어 위로했다. "대왕께서는 고정하십시오. 아직 오랑캐를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우선 이들을 없앤 후에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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