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전 (1/4)
때는 중국 송나라 문제가 즉위한 지 이십 삼 년이 되는 해였다. 어진 황제를 모신 백성들은 농사짓기에 바빴고 거리에는 평화로운 노랫가락이 흘렀다. 이후 추구월 병인일에 문제께서는 갑자기 충렬묘에 납시었다. 충렬묘란 만고에 다시 없는 충신이었다. 좌승상 조정인이 잠들어 있는 묘였다. 조정인이 이부상서-조선시대의 이조 판서에 해당되는 벼슬-로 있을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은 문제를 모시고 뇌성관까지 피했다가 사방으로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여 석 달 만에 반란을 진압시켰다. 이 공로로 조정인은 좌승상으로 벼슬이 올랐고 정평왕이란 칭호까지 내렸다. 그러나 좌승상 조정인이 굳이 사양하므로 문제는 하는 수 없이 금자광록대부와 조상만을 제수하고 그의 부인 왕씨는 공렬부인에 봉하였던 것이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자 간신들이 은밀히 날뛰기 시작하고 어진 신하들이 점점 숨어 살게 되었다. 특히 우승상 이두병이 앞장에서 모함하고 참소하니 좌승상 조정인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해 버렸다. 문제는 충신이 허무하게 죽자 크게 애통하여 친히 제문을 지어 조상하시고 충렬묘를 지어 거의 날마다 거동하시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우승상 이두병은 황제의 이런 거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권세만을 위하여 노력할 뿐이었다. 이두병은 자기의 지위를 반석같이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병권을 잡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아들인 이 관으로 하여금 병부시랑이란 요직에 앉도록 했다. 이 날도 문제는 충렬묘로 거동하시어 늘 하는 대로 좌승상 조정인의 공적을 극구 칭찬했다. 이에 병부시랑 이 관이 엎드려 아뢰기를, "폐하께옵서는 항상 좌승상 조정인의 공로를 찬양하옵시니 신들이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어찌 많은 신하 중에서 조정인 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이까? 폐하가 이처럼 옥안에 슬픔이 가득하시니 이 후로는 충렬묘에 납시는 것을 거두소서." "무엇이? 어허 무엄하도다." 황제께서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즉시 이 관을 끌어내라고 엄명하셨다. 그리곤 환궁하신 다음에 조종인의 아내 공렬 부인 왕씨를 정렬부인에 봉하시고 많은 금은을 하사하시면서, "듣자 하니 조승상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조정으로 불러서 짐의 마음을 덜게 하라." 하고 하교하시었다.
한편 왕씨 부인은 애를 가진 지 일곱 달에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를 낳으니 이름을 웅이라 했다. 왕씨 부인은 삼년상을 지내고도 소복을 벗지 않고 아들 웅을 데리고 세월을 보내었다. 이 날 황제께서 또 다시 충렬묘에 거동하신다는 말에 더욱 슬퍼하고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보낸 신하가 와서 정렬부인의 칭호와 많은 금은을 전하니 부인은 황공하여 급히 절하며 받았다. 또한 아들 웅을 대궐로 들여보내라는 조서를 보고 더욱 황송하여 깨끗한 옷을 입혀 보냈다. 이때 조웅의 나이 불과 일곱 살이었지만 얼굴은 관옥 같고 행동거지는 어른보다 더 의젓했다. 환관을 따라 옥좌 아래에서 몸을 굽혀 절하니 황제께서 보시고 크게 칭찬하였다."충신의 아들은 과연 다르도다. 짐이 오늘 네 거동을 보니 충효에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또한 나이가 일곱 살이라 하니 태자와 동갑이로다. 어찌 더욱 사랑스럽지 않으랴." 이어 태자를 불러오게 하시어 분부하셨다. "조웅은 충신 조정인의 유복자로다. 또한 너와 동갑으로 충효를 겸하였으니 훗날에 국사를 의논하라. 짐은 늙어 여든 살이 가까우니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도다." 하시니, 태자도 즐거워하였다. 조웅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성은 망극하나이다. 그러나 소신은 나이가 어리옵고 또한 나라에 법도가 있으니 어찌 벼슬길에 오르지도 않은 아이가 대궐 안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렇듯 어린 아이에게 국사를 의논하시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오리까? 업드려 비옵건대 소신은 물러가서 공부를 마친 후에 다시 용안을 뵈옵게 하소서." 그 어조가 지극히 간절하니 비록 어린 아이의 말이지만 황제는 사리에 맞다 하여 하교하셨다. "네 나이 십 삼 세가 되거든 벼슬을 내릴 것이니 가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라." 조웅이 황공하여 큰 절을 올리고 물러 나오니 태자도 못내 서운해 하였다. 황제께서는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놓고 조웅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후 물으셨다. " 이 관은 지금 어디 있느냐?" 우승상 최 식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폐하께서 내치라 하시었으므로 지금 옥에 갇히었나이다." 하니, 황제께서는 관대한 분부하셨다. "이 관의 말이 경솔하나 이번만은 용서하라."
원래 이두병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는데 모두 일품의 벼슬에 올라 있으므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했다. 이 날 황제께서 조웅을 크게 칭찬하심을 보고 이두병의 아들들은 모여 의논했다. "조웅이 벼슬길에 오르면 필시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다. 조심해야 하겠다." 마침내 그들은 조웅을 몰래 죽일 흉계를 꾸몄다. 이것도 모르고 조웅은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뵈오니 정렬부인은 엄숙히 물었다. "그래 폐하를 뵈었느냐?" 조웅은 공손히 아뢰었다. "들어가 뵈었나이다." "그렇다면 황제께서 하문하신 말씀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대답했느냐?" 조웅은 황제께서 열 세 살이 되면 벼슬을 주시겠다고 하시던 말씀과 태자도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낱낱이 고하니 부인이 크게 기뻐하였다. "폐하의 은혜가 하늘처럼 높고 바다같이 깊으니 너는 명심해서 충성을 다하여라." "어머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모자는 성은에 거듭 감사하고, 더 한층 몸과 마음을 닦기에 열중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어느덧 병인년 섣달이 되었다. 이날 황제께서는 온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조회를 받고 말하였다. "아, 짐의 나이가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게 늙었구나. 하늘은 짐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태자의 나이가 어려 국사를 보기에 아직 이르니 어찌할꼬?"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이렇듯 정정 하시온데 어찌 동궁의 어리심을 근심하나이까." 이부 상서 정출이 앞으로 나와 간사를 떨었다. "폐하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 승상 이두병이 아직 건재하오니 국사는 아무런 근심이 없나이다." 모든 신하들이 또한 이두병의 권세를 두려워해 맞장구를 쳤다. "승상 이두병은 한나라의 소무 같은 신하이오니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황제는 신하들이 이처럼 장담하자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대궐 안으로 난데없이 흰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와 돌아다니다가 궁녀 하나를 물고 후원으로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에 황제와 모든 신하들은 크게 놀라고 장안의 백성 또한 앞으로 닥칠 길흉을 알지 못해 소동을 피웠다. 황제가 크게 걱정하시니 신하 중의 하나가 나와 아뢰었다. "며칠 동안 북풍이 크게 불고 눈이 산을 덮었으므로 굶주린 호랑이가 내려온 것이니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황제는 이 말에 약간 마음을 놓았으나 웬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때 한림학사 왕열은 사촌누이 되는 왕부인께 이 변고를 편지로 알렸다. 왕부인은 조웅에게 옛날의 역사를 가르치다가 이 편지를 받고 뜯어보았다. 편지에는 대궐 안으로 흰 호랑이가 들어와 난동을 부린 사실을 자세히 알림과 동시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풀어 달라고 했다. 왕부인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답서를 써서 보낸 다음에 아들에게 일렀다. "국가에 이런 흉한 재앙이 일어났으니 네가 앞으로 벼슬한다 해도 간신들에게 당하겠구나." 조웅이 엄숙한 태도로 아뢰었다. "어머님은 염려마옵소서. 사람의 영욕은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니옵고 오직 하늘이 정하는 것이옵니다.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해도 소자는 백옥같이 죄가 없사오니 그 누가 저를 모함하겠습니까?" 왕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얘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산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태우는 법이다. 어찌 간신들이 너를 가만히 두겠느냐?" 조웅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일을 당하여 오래 조심하면 가슴만 아플 뿐 백 가지 일이 불리하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설마 하늘이 죄없는 저희들에게 재앙을 내리겠습니까?" 아들의 활달한 말에 왕부인은 근심하지 않고 묵묵히 집안 일을 돌보았다. 한편 왕부인의 편지를 받은 한림박사 왕 열은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정묘년 정월 보름이었다. 신하들의 하례가 끝난 다음 황제께서는 갑자기 이르시었다. "전에 짐이 조웅을 보니 충효를 범전하였도다. 해서 태자를 위해 대궐로 데려오고자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이두병이 즉시 앞으로 나와 반대의 뜻을 표했다. "폐하, 그건 아니 되옵니다. 벼슬 없는 아이를 조정에 두는 것은 법도에 없나이다." 폐하께서는 불쾌한 안색을 지으셨다. "충효한 인재를 거두는데 어찌 법도를 따지는가?"이두병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조웅을 깎아 내렸다. "인재를 얻고자 하시면 장안에서만도 조웅보다 십 배나 더한 충효스런 인재가 수백이요, 조웅과 같은 아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사옵니다." 황제께서는 불쾌한 나머지 옥좌를 박차고 들어가셨다. 그러자 이두병이 뭇신하들을 돌아보고 엄포를 놓았다. "만약 조웅에 대해 좋게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되니 겁내지 않는 신하가 그 누구이겠는가.
이 때 왕부인과 조웅은 우연히 이두병이 말한 것을 듣고 앞으로의 일이 크게 잘못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드디어 불행이 닥쳤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황제께서는 뭇백성들이 축원한 보람도 없이 정묘년 삼월 삼일에 승하하시었다. 이에 온 조종의 신하들과 천하의 백성들이 슬피우니 천지에 사무쳤다. 왕부인과 조웅의 슬픔은 그 누구보다 컸다. 문제가 돌아가시니 세상은 온통 이두병의 마음대로였다. 조정의 뜻 있는 신하들은 하나 둘 사직하고 떠나니 간신들만 우글우글했다. 백성들은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고 속으로 한탄할 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이두병의 죄악을 꾸짖지 못했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가 생각한 이두병은 시월 십삼 일에 드디어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지금 태자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니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불가하다. 나라에는 하루도 주인이 없으면 곧 시드는 법이니 그대들은 어찌하겠는가?" 온통 이두병의 패로 이루어진 신하들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저마다 떠들어 댔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나라가 지금 위태로운데 어찌 여덟 살밖에 안 되는 태자가 즉위할 수 있으리오, 그러니 승상께서 옥쇄를 받으시고 즉위하십시오." 그러자 이두병은 짐짓 세 번 사양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장안이 온통 놀라 버렸다. 그러나 이두병의 군사들이 곳곳에 서서 위세를 떨쳐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두병은 자칭 순제라 일컫고 국법을 제 마음대로 개정하고 동궁을 폐하여 외각관에 감금하니 충성스런 신하들은 남몰래 피눈물을 흘렸다. 이 때 왕부인은 이두병이 드디어 나라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었다. "슬프구나! 나라가 망했는데 옹의 나이 겨우 팔 세이니 어찌할 것인가?" 조웅이 급히 들어와 모친을 애써 위로했다. "어머님께서는 불효자를 근심하지 마옵시고 몸을 보호하소서. 이두병은 아버님을 해친 원수이자 대역적이옵니다. 소자가 비록 나이 어리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찌 역적의 손에 죽겠습니까?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조웅의 눈에서도 분노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한편 이두병은 맏아들 이 관을 동궁으로 삼고 연호를 건무 원년이라 했다. 그리고 외각관에 감금한 송태자는 태사부 계량도로 귀양보냈다. 왕부인과 조웅은 태자가 귀양간다는 소식에 매우 슬퍼하며 또한 분노했다. 그들은 태자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역적들의 눈에 띄면 죽을 것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루는 조웅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모친 모르게 장안 큰 거리로 돌아다니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뜻이 묘했다. "나라가 망했으니 아비 없는 난세로다. 문제가 순제 되고 태평 세월이 어지러운 세상으로 변했구나 그러나 남의 것 빼앗아 사는 자가 그 며칠이나 갈 것인가. 충신의 피눈물이 흐르니 역적은 망하는도다. 사해에 숨어 놀다가 시절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리." 조웅이 듣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어느덧 대궐 경화문에 이르렀다. 인적은 고요하고 달빛은 교교히 흐르는데 저절로 돌아가신 황제의 따뜻한 정이 생각났다. 조웅은 당장이라도 대궐 안으로 들어가 역적 이두병을 죽이고 싶었지만 수많은 군사들이 곳곳에 지키고 있으니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분노가 너무 치밀어 품속에서 붓을 꺼내 이두병의 죄상을 욕하는 글을 써서 몰래 경화문에 붙였다. 이 때 왕부인은 잠을 자다가 한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승상이 생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엄히 이르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어서 일어나시오. 날이 밝으면 큰 변이 생길 것이니 어서 웅을 데리고 도망하시오." 부인이 놀라 급히 물었다. "천지에 역적이 깔리었거늘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대답이 없어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때 황급히 아들을 부르니 간 곳이 없었다. 왕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문 밖을 나와 살피니 조웅이 총총히 걸어오는 것이었다. "얘야, 이렇듯 깊은 밤에 어디를 갔었느냐?" 모친이 묻자 조웅은 사실대로 말했다. "소자는 이두병의 죄악이 너무 크므로 경화문에 가서 역적을 욕하는 글을 써서 붙였사옵니다." 모친이 크게 놀라 엄히 꾸짖었다. "네 어찌 이렇듯 경망스러우냐? 그렇지 않아도 역적이 우리 모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그 글을 보면 만사를 젖혀놓고 우리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다행히 너의 아버님께서 꿈에 나타나 알리셨으니 어서 도망가자." 두 사람은 즉시 간단한 행장을 차린 다음 충렬묘로 달려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단 위의 초상화에 땀이 나서 얼굴에 물기가 축축했다. 모자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엎드려 흐느끼니 그 형상이 가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초상화를 떼어 간수하고 모자는 수십 리를 걸어 어느 강가에 도착했다. 날씨는 험악하여 물결은 거친데 사공 없는 나룻배만이 덩그렇게 매어져 있었다. 모자가 황급히 배에 올라 노를 저었으나 매여있는 배가 어찌 움직이겠는가. 일이 이렇게 되니 왕부인과 조웅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이두병의 군사들이 몰려와 꼼짝없이 잡힐 것만 같아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갑자기 상류 쪽에서 한 조각배가 등불을 밝히고 이쪽으로 쏜살같이 오는 것이 보였다. 왕부인은 크게 기뻐하여 목청껏 외쳤다. "사공께서는 제발 우리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조각배가 모자 곁에 이르더니 늙은 사공이 재촉하는 것이었다. "두 분은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모자가 반겨 배에 오르자 사공은 있는 힘을 다해 배를 저었다. 왕부인은 마음이 약간 진정되자 사공에게 물었다. "사공께선 어인 일로 이 밤중에 배를 몰고 내려왔습니까?" 늙은 사공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듯 깊은 밤중에 누가 배를 몰겠습니까? 다만 꿈에 한 귀인이 나타나셔서 급히 이리로 와서 사람을 구하라고 하시기에 달려왔을 뿐입니다." 사공의 얘기를 듣자 모자는 하늘의 도우심에 깊이 감사드렸다. 이윽고 날이 희미하게 밝을 무렵 조각배는 낯선 강가에 닿았다. 왕부인은 사공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고 아들의 손목을 잡고 정처 없이 걸어갔다.
한편, 이두병의 대궐에서는 큰 야단이 났다. 날이 밝자 경화문을 지키던 포졸이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와 아뢰는 것이었다. "날이 밝았기에 보니 문에 이런 글이 붙어있기에 가져왔나이다." '송화실이 약해지니 역적이 조정에 가득 찼도다. 불행히 황제께서 돌아가시니 소인들이 득세하여 태자를 모반하고 역적 이두병에 붙었도다. 만고 역적 이두병은 듣거라. 너는 성은을 입어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역적이 되었느냐? 네 죄악을 생각하면 천하 만민이 살을 씹고 뼈를 갈아도 부족하리라. 내 어느 때건 너를 잡아 만백성 앞에서 목을 베어 역적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전조 충신 조종인의 유복자 조웅' 이두병은 이 글을 읽자 크게 노하여 하늘이 얕다고 호령했다. "즉시 조웅 모자를 결박하여 잡아들여라." 그러자 때는 이미 늦어 조웅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텅텅 빈 집이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이두병은 군사를 풀어 조웅의 행방을 찾는 한편 충렬묘로 사람을 보내 조종인의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충렬묘의 초상화까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보고가 아닌가. 이두병은 너무 분한 나머지 아무 죄없는 대궐 문지기의 목을 베어 성문에 높이 달아 놓았다. 이에 조웅이 살던 집과 충렬묘를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두병이 화가 풀리지 않아 호통을 치자 뭇 신하들이 좋은 말로 아뢰었다. "조웅의 나이 겨우 여덟이고 그 어미는 늙은 여인이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에 명을 내려 잡으라고 하면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이두병은 천하에 영을 내리기를 만약 조웅 모자를 잡아오는 자가 있으면 천금의 상과 만호후의 벼슬을 주겠다고 했다.
이런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웅 모자는 정처 없이 걷다가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한 깨끗한 고을에 이르렀다. 마을에 들어서 보니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유순하고 깨끗했다. 이에 한 사람을 붙잡고 하룻밤 지내기를 청하니 쾌히 한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나이 많은 할머니가 어린 처녀를 데리고 살거늘 매우 조용했다. 주인 되는 노파가 물었다. "부인은 어디 사시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왕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희 모자는 변을 당해 이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무엇이라 부르는 고을입니까?" "이곳은 계량섬 백자촌이라는 마을입니다." 주인 노파는 대답하고 나서 모자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니 왕부인은 감사해 마지않았다. 노파는 사양하며 자기 신세도 조웅 모자와 비슷하니 이곳에 함께 살자고 했다. 이에 조웅 모자는 그 집에서 머물렀으나 마음은 항상 고향과 빼앗긴 나라에 가 있었다. 이윽고 한 해가 속절없이 가니 부인의 나이는 마흔 살이요, 조웅은 아홉 살이 되었다. 하루는 주인 노파가 왕부인에게 오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아직 마흔 살밖에 안 되었으니 개가토록 하십시오. 내 사촌 남동생이 있는데 젊어서 상처하고 지금 마땅한 곳을 정하지 못해 널리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에게는 재산도 많으니 부인이 개가하면 큰복을 누리리다." 왕부인이 놀라 얼굴빛을 바꾸고 쌀쌀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길거리의 여자로 취급하다니... 나는 남은 생애를 아들을 위해 바칠 것이니 아예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사죄하며 얼른 물러났다. 하지만 몰래 사촌 남동생에 좋은 혼처가 생겼다고 연락했다. 사촌 동생되는 자는 크게 기뻐하여 어떻게 하든지 왕부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호시탐탐 노렸다. 왕부인은 이런 기색을 깨닫고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조웅과 함께 노파가 잠든 사이에 집을 나서 다시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들을 지나 수십 리를 걸으니 어느덧 발도 붓고 가지고 온 식량도 떨어져 굶주림이 심하였다. 모자는 별 수 없어 길가에 앉아 잠시 쉬었다. 이때 그들 곁에 마침 말을 탄 길손이 지나거늘 조웅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 "길을 가다가 피곤에 지쳐 있으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길손은 말에서 내려 대답했다. "가진 것이라곤 마른 음식이 조금 있으니 어서 요기를 하라." 조웅이 인사를 하고 마른 음식을 받아 모친과 함께 요기하니 겨우 살아날 수가 있었다. 다시 며칠을 걸어 한 곳에 이르니 해상현 옥구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리기를, "새 황제가 천하에 이르기를 조웅 모자를 잡아 바치면 천금상과 만호부에 봉한다 하니 우리가 그들을 잡으면 크게 복을 누리리라." 하고, 오가는 행인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조웅 모자는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급히 마을에서 도망쳤다. 너무 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발도 아픈 줄을 몰랐다.
이윽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모자는 신세를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 흘러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도 역적의 손에 잡혀 죽겠구나." 때는 꽃피는 춘삼월이어서 나무마다 새 잎이 돋았는데 모자의 신세는 더욱 처량하기만 했다. 바위를 의지하여 밤을 지내는데 부엉이는 울고 늑대는 사방에서 울부짖어 사람의 마음을 더욱 고달프게 했다. 왕부인은 아들을 끌어안고 연신 눈물만 흘리니 달빛조차 함께 슬퍼하는 듯했다. 밤을 지새며 굶주림을 참자니 몸이 더욱 무거워져 왕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누워 버렸다. 이에 조웅이 꽃을 꺾어다가 모친에게 드리니, "이게 어찌 요기가 되겠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는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피니 오륙 명의 여승들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왕부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여승님께서는 어느 절에 있으며 어느 절로 가나이까?" 여승 중의 하나가 의아스런 어조로 반문했다. "부인은 뉘신데 이렇듯 깊은 산중에 와 있습니까?" 왕부인은 애처로운 얼굴로 사실대로 대답했다. "저의 모자는 길을 잃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승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끌어 음식을 내주었다. 조웅 모자는 절하며 치하했다. "죽을 사람을 구해 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승들은 사양하며 길을 가리켜 주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인가가 있으니 그리로 가십시오." 모자는 그들과 헤어지자 허겁지겁 요기를 했다.
이윽고 기운을 차리자 조웅은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왕부인이 울며 말했다. "얘야,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 마을도 가면 반드시 관리들에게 잡힐 것이다. 역적에게 끌려가 죽느니 차라리 이 산중에서 굶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웅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모친을 위로했다.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하늘이 죽이면 죽을 것이오, 살리면 살 것이옵니다. 어찌 사람이 두려워 이 산중에서 굶어 죽거나 짐승의 밥이 되겠습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마을로 내려가십시오." 왕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얘야, 우리 모자가 이렇게 가면 반드시 행적이 드러나 잡힐 것이다. 이 어미의 생각으로 우리가 행색을 달리하면 좋을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삭발하여 여승이 되고 너는 상좌 - 중의 수업을 닦는 남자아이 - 가 되면 누가 알겠느냐?" "어머님, 목숨을 건지는 것도 중하지만 어찌 머리카락을 없애겠습니까?" "얘야, 머리를 깎는다고 해도 중이 아니니 상관 있느냐? 너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라." 조웅은 모친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소자도 머리를 깎겠습니다." "얘야, 너같이 어린아이가 삭발하면 도리어 의심할 것이다. 이 어미만 깎을테니 너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왕부인은 엄히 이르고 행장에서 가위를 꺼내 머리를 깎으라 하니 조웅이 차마 가위질을 할 수가 없어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모친이 크게 꾸짖었다. "이 어미가 여지껏 산 것은 오로지 너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는 이 어미를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울고만 있으니 어떻게 원수를 갚고 나라를 되찾겠느냐?" 이에 조웅은 억지로 울음을 그치고 가위를 들어 모친의 머리를 깎으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얘야, 울지 말아라. 내 마음도 아프구나." 왕부인이 위로하니 조웅은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어머님, 소자는 오늘을 잊지 않고 반드시 역적을 없애겠습니다." 머리를 다 깎자 왕부인은 행장에서 옷을 꺼내어 장삼을 지어 입고 머리에 여승이 쓰는 고깔을 쓰니 완연히 모습이 달라졌다. 그리곤 조웅을 앞세우고 마을로 내려오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집집마다 들러 밥을 빌어먹고 가다가 하루는 한곳에 장이 섰으므로 깎은 머리카락을 팔았다. 머리 값으로 겨우 돈 닷 냥을 받아 이날 밤은 객점에서 잤다.
그런데 밤이 깊은 후에 갑자기 마을이 떠들썩했다. 조웅 모자가 놀라 나와보니 도적들이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왕부인은 놀라 담을 뛰어 넘어 도망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조웅이 없었다. 부인은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여 마을을 돌아보니 불길이 온통 마을을 휩쓸고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날뛰는 것이었다. 이어 도적이 한사코 뒤를 쫓으니 왕부인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만 도망쳤다. 얼마쯤 도망치다가 보니 한 채의 낡은 묘가 있기에 비석 뒤에 숨었다. 한편 조웅은 북새통에 모친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이때 도적이 달려들어 봇짐을 빼앗으려 하니 붙들고 애걸했다. "봇짐 속에는 돈 몇 푼이 있으니 그것만 가지고 가고 짐은 남겨 주십시오." 그러자 한 늙은 도적이 불쌍히 여겨 짐 속에서 석 냥의 돈과 초상화만 꺼내고 봇짐을 내주었다. 조웅은 이를 보고 애절히 부르짖었다. "나를 죽이고 그 초상화를 가져가시오!" 도적이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초상화냐?" "나는 보다시피 상좌인데 우리 대사께서는 늘 불상을 모시고 다닙니다. 오늘도 대사를 모시고 객점에 들어갔다가 혼란 중에 서로 헤어졌으니 만약 이 불상마저 가져가면 나는 절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가져가도 소용없는 불상은 이리 주십시오." 조웅이 거듭 애원하니 늙은 도적이 여러 도적들에게 권하여 돌려주었다. 조웅은 초상화를 받자 물었다. "어디로 가면 저의 대사님을 만나겠습니까?" "그 여승 말이냐? 저쪽 길로 갔으니 그리로 가 보아라." 조웅은 크게 기뻐하여 도적이 가르킨 길로 달려가면서 모친을 불렀다. 이 때 왕부인은 비석 뒤에서 잠깐 졸고 있는데 꿈에 남편이 나타나 빨리 일어나라고 해서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러자 묘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불렀다. "웅이냐?" 조웅이 듣고 급히 들려와 외쳤다. "어머님, 소자 웅이옵니다." 모자는 다시 만난 기쁨에 서로 붙들고 울고 웃고 했다.
이윽고 날이 새자 비석의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거늘 조웅 모자는 무심코 이를 읽었다.거기에는 금빛 글자로, <만고충신 병부시랑 겸 진부어사 조종인의 불망비라> 씌어 있었고 밑에는 작은 글자로, <황제께서 밝히 살피사 위왕은 죄주시니 모두가 조승상의 공이로다.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모여 성덕을 찬양하니 이 은덕 무엇으로 갚을꼬> 라고 씌어 있었다. 조웅 모자가 이 비문을 보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니 산천 초목이 함께 흐느끼는 듯 빛을 잃었다. 조웅이 겨우 눈물을 삼키고 모친께 여쭈었다. "아버님 비석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나이까?" 모친이 천연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 이 비석을 보니 이곳이 위나라 땅이구나. 네 부친이 병부시랑을 지낼 때에 위왕 두침이 포악한 왕으로 천하 만인이 미워했었다. 백성들이 이에 참을 수가 없어 고향을 등지고 사방으로 떠나니 황제께서는 네 부친을 보내어 위왕을 벌주시고 다시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드셨단다. 이곳 백성들이 이 은공을 잊지 못하고 네 부친의 비를 세웠구나." 이에 붓을 꺼내어 비문을 베낀 다음 하직했다. 그러나 이 천지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더구나 푼돈마저 도적에게 빼앗겼으니 앞길이 아득하기만 했다. 조웅이 모친에게 아뢰었다. "다시 마을로 다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절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부인도 이를 옳게 여겨 길가는 사람에게 절이 있는 곳을 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쭉 가시오." 길손이 가리켜 준 대로 모자는 험한 산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서 허기에 지쳐 산골짜기에 앉아 쉬는 시간이 많았다.
이때 한 늙은 중이 철장을 짚고 다가오더니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매우 시장한 것 같아 보이니 우선 이것으로 요기나 하십시오." 조웅 모자는 염치 불구하고 음식을 받아 요기하고 감사를 드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을 뻔했는데 인자하신 대사님을 만나 살았으니 은혜를 잊을 수 없나이다." 그러자 늙은 중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요기하신 것을 은혜라 하신다면 빈승은 부인에게서 천금을 얻었으니 그 은혜는 어찌하오리까?" 부인이 놀라 물었다. "저는 본래 가난한 여승으로 사방에 다니며 빌어먹는 신세인데 어찌 천금의 재물을 대사님께 주었다고 말씀하나이까?" 늙은 중이 엄숙한 얼굴로 도리어 반문했다. "부인께서는 조충공의 부인이 아니시옵니까? 이렇게 변장 하신들 빈승이 모르시겠습니까?" 조웅 모자는 크게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우리의 본색이 탄로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왕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대사님, 우리 모자를 잡아 관청에 바치면 천금의 상과 만호후의 벼슬을 받겠지만 부귀는 뜬구름 같은 것이니 부디 저희들을 놓아주소서." 늙은 중은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빈승은 부인을 잡아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빈승은 지난달 승상의 화상을 그렸던 중 월경이옵니다. 그때 승상의 화상을 그려 부인께 바쳤더니 천금의 상을 주셨기에 가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인께서는 빈승을 몰라보십니까?" 이 말을 듣고 왕부인은 늙은 중을 자세히 살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없습니다. 대사께서는 저희들을 농락하지 마시고 본심을 얘기하옵소서." 그러자 늙은 중은 엄숙히 말했다. "부인께서는 우선 초상화를 내주소서." 왕부인은 더욱 놀라 완강히 부인했다.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무슨 초상화가 있겠습니까, 대사께서는 사람을 놀리지 마십시오." "부인께서는 어찌 이렇게 의심하십니까? 그때 빈승이 부인을 뵈올 적에 임신하신 지 여러 달 되었기에 앞으로 닥칠 일을 초상화 뒤에 써 넣었으니 어서 꺼내어 살펴보십시오." 늙은 중의 간곡한 말에 왕부인은 이상하게 생각되어 마침내 초상화를 꺼내어 뒤에 붙어 있는 종이를 떼어 살펴보았다. 과연 거기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충신의 부인은 어인 일로 머리를 깎으셨는가? 도둑에게 망한 나라 바닷가에 거북을 만났도다. 주인은 누구인고? 굴원 - 초나라의 충신으로 물에 빠져 죽음 - 의 넋이로다. 뱃속에 있는 아이 충신 열사로다. 아들로 상좌를 삼고 모습을 고치려 해도 어찌 옛일을 잊겠는가. 위나라 강서 출신 월경> 라고 씌어 있었다. 왕부인은 놀랍기도 하고 기쁨에 겨워 울며 말했다. "우리 모자는 나라를 도둑질한 역적을 피하다가 천행으로 이곳에서 대사님을 뵈었으니 이 기쁨을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월경대사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부인께서 고생하신 것을 빈승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존귀하고 비천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늘의 뜻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빈승은 이렇게 만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이다." 라고 말하고는, 조웅 모자를 데리고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냇물이 구불구불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돌다리를 건너 절간에 이르니 많은 중들이 나와 반가이 맞이했다. 조웅 모자는 고생 끝에 이렇게 신선이 사는 듯한 선경에 이르니 마음이 절로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왕부인은 경내에 이르자 거듭 감사를 드렸다. "속세에서 때가 묻은 저희 모자가 극락을 어지럽힌 듯하니 마음이 불안하옵니다." 그러나 모든 중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시니 더욱 영광이옵니다." "저희들은 가난하여 그저 비바람이나 피할 수 있는 암자에 살고 있었는데 월경대사께서 서울에 가셨다가 부인께서 천금을 주신 것을 가지고 오셔서 절을 지었나이다. 저희들이야말로 부인의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작은 것을 시주하고 이렇듯 큰 인자를 받으니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서로 얘기를 나누며 별당에 이르니 왕부인이 앞으로 거처할 곳이었다. 월경대사는 조웅을 데리고 글을 가르치는 한편 신통한 술법도 아낌없이 전해 주었다. 조웅은 본래 영특하고 민첩한지라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깨우쳤다. 이에 왕부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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