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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발명품이다? - 박은봉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사람이지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는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나누었던 교토 대학의 교수다.
기하라 히토시가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것은 1943년 무렵이요, 그 내용을 「3배체를 이용한 무종자 수박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1947년이며, 우장춘이 한국에 씨 없는 수박을 널리 알린 것은 우장춘이 일본에서 귀국한 뒤인 1953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 하면 우장춘을 떠올릴 만큼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걸까?
우장춘 신화의 탄생
우장춘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1950년 3월, 그의 나이 53세에 한국에 정착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유전학의 한 분야인 육종학育種學이었다. 요즘이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로 유전학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55년 전인 그때만 해도 육종학이란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은 한국인들에게 육종학이 지닌 위력과 실용적 가치를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예로서 기하라 히토시의 씨 없는 수박을 얘기했던 것이다. 1953년에는 우장춘이 직접 씨 없는 수박을 시범재배해 보여주기도 했다.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새로운 채소 종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던 채소 종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의 채소 종자 개발과 보급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때 우장춘은 몇몇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그가 개발한 새 종자는 우장춘의 이름만큼이나 농민들에겐 생소하고 미덥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의 이름은 물론 새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널리 알릴 계기가 필요했다. 씨 없는 수박만큼 그에 적절한 것은 없었다.
1955년 7월 30일자 《영남일보》에는 “육종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우장춘 박사를 환영하고 과학농업의 발전상을 널리 소개하고자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하오니 다수 참석을 앙망하나이다. 지방 독농가의 참석 특히 환영”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우장춘이 속해 있던 연구소의 산하 기관인 한국농업과학협회 주도로 ‘우장춘 박사 환영회 겸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열린 것이다.
시식회의 본래 목적은 연구소에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보급하는 데 있었지만, 씨 없는 수박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연상시키게 하는 데 시식회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은 ‘육종학의 마술사’라는 제목으로 씨 없는 수박과 우장춘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전쟁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우장춘의 씨 없는 수박은 자부심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한 줄기 단비와 같았다. 사람들은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렸다. 우장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며 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가 정정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장춘의 업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대상은 유채, 배추, 무 같은 십자화과 작물이었지 수박이 아니었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하는 콜히친이라는 화학물질은 우장춘의 연구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우장춘은 “수박은 검은 씨앗 한두 개를 깨물며 먹는 쪽이 훨씬 맛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우장춘은 1936년 「아부라나Aburana 속屬에 있어서의 게놈 분석-나푸스Napus의 합성과 특수 수정현상」이란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채를 비롯한 배추과 작물의 게놈 분석에 관한 이 논문은 자연의 새로운 종을 교잡실험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세계 최초로 ‘종의 합성’ 이론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미 나팔꽃 연구와 겹꽃 피튜니아 연구로 일본 육종학계에 이름을 알렸던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따지고 보면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과 아무 관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은 씨 없는 수박의 기초 원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겹꽃 피튜니아 연구는 종자를 대준 사카타坂田 종묘種苗 회사를 돈방석 위에 앉혀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튜니아는 겹꽃끼리 교잡해도 홑꽃이 섞여나오곤 했다. 우장춘은 수많은 실험 끝에 어떤 것과 교잡시켜도 전부 겹꽃만 만들어내는 절대 우성형질을 지닌 완전 겹꽃 피튜니아를 발견했다. 사카타 종묘회사는 우장춘의 피튜니아에 ‘사카다 매직’이란 이름을 붙여 시장에 내놓았고, 세계 피튜니아 시장을 독점했다. 사카다 매직의 값은 보통 피튜니아의 10배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에 대한 신화는 씨 없는 수박 말고 또 있다. 그의 생애를 둘러싼 신화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군인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다. 조선인 훈련대가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명성황후에 의해 해산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훈련대에게 시해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일본 측 음모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설, 적극 가담한 것이라는 설 등등. 게다가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뿌린 당사자로까지 알려져 있다.
아무튼, 사건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에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그리고 기타노 이치헤이北野一平라는 일본 이름으로 도쿄에서 살다가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와 결혼했다. 그때 우범선의 나이는 39세, 사카이는 24세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첫 아이 우장춘을 비롯해 2남 4녀가 태어났다. 그러나 우장춘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우범선은 피살당했다. 살해자는 황국협회 부회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한 고영근과 그 하수인 노윤명이었다. 그 후 고영근은 귀국하여 ‘역적 우범선을 살해한 공적’으로 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을 지내다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사카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글도 읽을 줄 몰랐지만 성심껏 아이들 을 키웠다. 우장춘 형제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았다. 우장춘의 둘째딸 마사코昌子의 증언에 따르면,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주선해준 사람은 우범선과 친분이 있던 박영효였다고 한다.
히로시마 현립 구레吳 중학교를 졸업한 우장춘은 학비를 지원해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대학교육보다는 실업교육을 권장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방침이었으며, 우장춘이 입학한 농학실과 역시 대학 학부가 아닌 전문학교 과정이었다.
우장춘은 1919년 농학실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농림성 소속 농사시험장에 취직해 일하는 한편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에게 박사학위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차별과 농학실과 출신이라는 학력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가 농사시험장에서 받은 월급은 25엔. 당시 일본인 대졸 은행원 초봉이 40엔에서 50엔이었으니 절반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마침내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를 둘러싼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승진도, 원했던 중국 근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국으로 돌아오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걸까? 우장춘을 주인공으로 한 위인전에서 묘사하듯,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로 귀국을 결심한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씻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한 걸까? 우장춘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에 관해서는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우장춘은 8?15 해방 후 한 달이 채 안된 9월 초, 근무하던 다키이龍井 종묘회사 농장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1950년 초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지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우장춘은 귀국을 망설였다. 일본에는 가족이 있었고, 해방 후 복잡한 한국 상황을 볼 때 자신이 발붙일 자리가 있을지 미덥지도 않았다. 아버지 우범선이 한국에서 ‘국적國賊’으로 낙인찍혀 있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때문에 귀국해서도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받은 적이 있다.
우장춘의 귀국은 그의 역량과 재능을 알아본 몇몇 인사들의 제안과 설득의 결과였다. 우장춘과 함께 다키이 종묘회사에서 일했고 《원예와 육종》이라는 농학잡지 편집장을 지냈으며 우장춘이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이 되자 부소장을 맡았던 김종金鍾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성금을 모으는 한편, 부산 동래에 국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우장춘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장춘은 일본에 아내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2남 4녀를 남겨둔 채 홀몸으로 귀국했다. 해방된 지 5년만인 1950년 3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의 일이다.
그런데 실은 우장춘은 이때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에도 몇 차례 이복누이, 그러니까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남겨둔 딸 우희명禹姬命의 집을 다녀갔다고 우희명의 아들 강우창은 증언하고 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우희명과 자주 만났고, 우장춘의 아내 고하루가 우범선이 망명할 때 두고 온 첫 번째 부인을 ‘당신의 한국인 어머님’이라고 깍듯이 부른 것으로 보아, 우장춘은 해방 전부터 이미 한국의 가족들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장춘의 한국 시절, 그에게는 아내 말고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교육받고 일본어를 잘했던 그녀는 우장춘이 세상을 뜰 때까지 부산 동래에서 함께 살았다. 우장춘의 전기를 쓴 쓰노다 후사코에 따르면, 그녀는 우장춘이 죽은 뒤 그의 무덤이 자리한 수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육종사업과 후진양성 두 가지에 몰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농림부장관 자리를 제안했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평소 그는 제자들에게 관찰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말하곤 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한다’는 말이 있지. 식물을 관찰할 때도 ‘안광이 엽배葉背를 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우장춘의 연구와 활동은 당시 한국에 절실히 필요했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과학자로서 좀더 수준 높은 연구에 몰두하고픈 내밀한 소망은 조용히 묻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들을 자체 개발하고 재배하게 되어 ‘씨앗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의 재래종 채소들은 우장춘의 손을 거쳐 한층 맛좋고 질 좋은 품종으로 재탄생되어 한국인들의 밥상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 무, 강원도 감자, 제주 감귤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 새벽 3시 10분, 십이지장궤양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한국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상을 받은 우장춘을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발명품이다? - 박은봉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사람이지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는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나누었던 교토 대학의 교수다.
기하라 히토시가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것은 1943년 무렵이요, 그 내용을 「3배체를 이용한 무종자 수박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1947년이며, 우장춘이 한국에 씨 없는 수박을 널리 알린 것은 우장춘이 일본에서 귀국한 뒤인 1953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 하면 우장춘을 떠올릴 만큼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걸까?
우장춘 신화의 탄생
우장춘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1950년 3월, 그의 나이 53세에 한국에 정착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유전학의 한 분야인 육종학育種學이었다. 요즘이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로 유전학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55년 전인 그때만 해도 육종학이란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은 한국인들에게 육종학이 지닌 위력과 실용적 가치를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예로서 기하라 히토시의 씨 없는 수박을 얘기했던 것이다. 1953년에는 우장춘이 직접 씨 없는 수박을 시범재배해 보여주기도 했다.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새로운 채소 종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던 채소 종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의 채소 종자 개발과 보급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때 우장춘은 몇몇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그가 개발한 새 종자는 우장춘의 이름만큼이나 농민들에겐 생소하고 미덥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의 이름은 물론 새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널리 알릴 계기가 필요했다. 씨 없는 수박만큼 그에 적절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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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30일자 《영남일보》에는 “육종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우장춘 박사를 환영하고 과학농업의 발전상을 널리 소개하고자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하오니 다수 참석을 앙망하나이다. 지방 독농가의 참석 특히 환영”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우장춘이 속해 있던 연구소의 산하 기관인 한국농업과학협회 주도로 ‘우장춘 박사 환영회 겸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열린 것이다.
시식회의 본래 목적은 연구소에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보급하는 데 있었지만, 씨 없는 수박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연상시키게 하는 데 시식회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은 ‘육종학의 마술사’라는 제목으로 씨 없는 수박과 우장춘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전쟁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우장춘의 씨 없는 수박은 자부심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한 줄기 단비와 같았다. 사람들은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렸다. 우장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며 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가 정정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장춘의 업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대상은 유채, 배추, 무 같은 십자화과 작물이었지 수박이 아니었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하는 콜히친이라는 화학물질은 우장춘의 연구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우장춘은 “수박은 검은 씨앗 한두 개를 깨물며 먹는 쪽이 훨씬 맛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우장춘은 1936년 「아부라나Aburana 속屬에 있어서의 게놈 분석-나푸스Napus의 합성과 특수 수정현상」이란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채를 비롯한 배추과 작물의 게놈 분석에 관한 이 논문은 자연의 새로운 종을 교잡실험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세계 최초로 ‘종의 합성’ 이론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미 나팔꽃 연구와 겹꽃 피튜니아 연구로 일본 육종학계에 이름을 알렸던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따지고 보면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과 아무 관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은 씨 없는 수박의 기초 원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겹꽃 피튜니아 연구는 종자를 대준 사카타坂田 종묘種苗 회사를 돈방석 위에 앉혀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튜니아는 겹꽃끼리 교잡해도 홑꽃이 섞여나오곤 했다. 우장춘은 수많은 실험 끝에 어떤 것과 교잡시켜도 전부 겹꽃만 만들어내는 절대 우성형질을 지닌 완전 겹꽃 피튜니아를 발견했다. 사카타 종묘회사는 우장춘의 피튜니아에 ‘사카다 매직’이란 이름을 붙여 시장에 내놓았고, 세계 피튜니아 시장을 독점했다. 사카다 매직의 값은 보통 피튜니아의 10배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에 대한 신화는 씨 없는 수박 말고 또 있다. 그의 생애를 둘러싼 신화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군인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다. 조선인 훈련대가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명성황후에 의해 해산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훈련대에게 시해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일본 측 음모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설, 적극 가담한 것이라는 설 등등. 게다가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뿌린 당사자로까지 알려져 있다.
아무튼, 사건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에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그리고 기타노 이치헤이北野一平라는 일본 이름으로 도쿄에서 살다가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와 결혼했다. 그때 우범선의 나이는 39세, 사카이는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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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서는 첫 아이 우장춘을 비롯해 2남 4녀가 태어났다. 그러나 우장춘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우범선은 피살당했다. 살해자는 황국협회 부회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한 고영근과 그 하수인 노윤명이었다. 그 후 고영근은 귀국하여 ‘역적 우범선을 살해한 공적’으로 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을 지내다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사카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글도 읽을 줄 몰랐지만 성심껏 아이들 을 키웠다. 우장춘 형제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았다. 우장춘의 둘째딸 마사코昌子의 증언에 따르면,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주선해준 사람은 우범선과 친분이 있던 박영효였다고 한다.
히로시마 현립 구레吳 중학교를 졸업한 우장춘은 학비를 지원해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대학교육보다는 실업교육을 권장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방침이었으며, 우장춘이 입학한 농학실과 역시 대학 학부가 아닌 전문학교 과정이었다.
우장춘은 1919년 농학실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농림성 소속 농사시험장에 취직해 일하는 한편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에게 박사학위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차별과 농학실과 출신이라는 학력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가 농사시험장에서 받은 월급은 25엔. 당시 일본인 대졸 은행원 초봉이 40엔에서 50엔이었으니 절반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마침내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를 둘러싼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승진도, 원했던 중국 근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국으로 돌아오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걸까? 우장춘을 주인공으로 한 위인전에서 묘사하듯,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로 귀국을 결심한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씻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한 걸까? 우장춘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에 관해서는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우장춘은 8?15 해방 후 한 달이 채 안된 9월 초, 근무하던 다키이龍井 종묘회사 농장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1950년 초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지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우장춘은 귀국을 망설였다. 일본에는 가족이 있었고, 해방 후 복잡한 한국 상황을 볼 때 자신이 발붙일 자리가 있을지 미덥지도 않았다. 아버지 우범선이 한국에서 ‘국적國賊’으로 낙인찍혀 있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때문에 귀국해서도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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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귀국은 그의 역량과 재능을 알아본 몇몇 인사들의 제안과 설득의 결과였다. 우장춘과 함께 다키이 종묘회사에서 일했고 《원예와 육종》이라는 농학잡지 편집장을 지냈으며 우장춘이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이 되자 부소장을 맡았던 김종金鍾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성금을 모으는 한편, 부산 동래에 국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우장춘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장춘은 일본에 아내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2남 4녀를 남겨둔 채 홀몸으로 귀국했다. 해방된 지 5년만인 1950년 3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의 일이다.
그런데 실은 우장춘은 이때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에도 몇 차례 이복누이, 그러니까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남겨둔 딸 우희명禹姬命의 집을 다녀갔다고 우희명의 아들 강우창은 증언하고 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우희명과 자주 만났고, 우장춘의 아내 고하루가 우범선이 망명할 때 두고 온 첫 번째 부인을 ‘당신의 한국인 어머님’이라고 깍듯이 부른 것으로 보아, 우장춘은 해방 전부터 이미 한국의 가족들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장춘의 한국 시절, 그에게는 아내 말고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교육받고 일본어를 잘했던 그녀는 우장춘이 세상을 뜰 때까지 부산 동래에서 함께 살았다. 우장춘의 전기를 쓴 쓰노다 후사코에 따르면, 그녀는 우장춘이 죽은 뒤 그의 무덤이 자리한 수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육종사업과 후진양성 두 가지에 몰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농림부장관 자리를 제안했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평소 그는 제자들에게 관찰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말하곤 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한다’는 말이 있지. 식물을 관찰할 때도 ‘안광이 엽배葉背를 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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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우장춘의 연구와 활동은 당시 한국에 절실히 필요했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과학자로서 좀더 수준 높은 연구에 몰두하고픈 내밀한 소망은 조용히 묻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들을 자체 개발하고 재배하게 되어 ‘씨앗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의 재래종 채소들은 우장춘의 손을 거쳐 한층 맛좋고 질 좋은 품종으로 재탄생되어 한국인들의 밥상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 무, 강원도 감자, 제주 감귤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 새벽 3시 10분, 십이지장궤양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한국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상을 받은 우장춘을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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