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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다?
- 박은봉
늙은 부모를 깊은 산속에 내다버리는 고려장은 고려와 아무 상관이 없다. 몇몇 국어사전에서는 “늙은이를 산 채로 광중壙中에 두었다가 죽으면 그곳에 매장하였다는 고구려 때의 풍속”이라 설명되어 있는데, 고구려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요즘도 시골 마을에 가면 옛날에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어린 장소가 전해오고 있지만, 실은 고려장과는 관계없는 곳이다. 고려 때 고려장이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자료나 유물, 유적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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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서 사실로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 아닌데도 고려장이라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설화가 사실로 혼동되어 굳어진 것이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에 관한 설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도, 중국, 일본, 몽고, 시베리아에도 있으며, 유럽과 중동 지방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다.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고려장 설화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중국의 『효자전』에 실려 있는 원곡 이야기 유형과,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棄老國 설화 유형이 그것이다.
원곡 이야기는 원곡의 아버지가 늙은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속에 버리고 돌아오다가 어린 원곡이 아버지가 늙으면 역시 이 지게로 갖다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뉘우쳤다는 줄거리요, 기로국 설화는 옛날 기로국에서 국법을 어기고 몰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던 대신이 아버지의 지혜를 빌어 까다로운 수수께끼를 풀어서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아버지도 편히 모셨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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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유형의 이야기가 뒤섞이기도 하고, 버리는 대상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기도 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이야기가 된 것이며, ‘노인을 버리는 나라’라는 뜻인 기로국이 고리국 또는 고려국으로, 기로의 장례라는 뜻인 기로장棄老葬이 고려장으로 변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장은 지방에 따라 고리장, 고래장, 고린장, 고림장, 고름장이라고도 한다. 특히 고래장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곡강曲江」의 한 구절이다. 사람이 칠십까지 살기는 예부터 드문 일이니 즐겁게 지내자는 뜻이 담긴 ‘인생칠십고래희’가 노인을 갖다 버리는 ‘인생칠십고래장’으로 변한 건 패러디 중의 패러디가 아닐까 싶다.
기로국 이야기든 원곡 이야기든 혹은 그 둘이 뒤섞인 것이든, 고려장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떠돌았다. 그러면서 살이 붙고 구체화되었다. 이를테면 “산을 파고 그 속에 기름불 하나 켜놓고 밥 한 사발 갖다 놓고 묻는다”거나, “밥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 남겨서 한 달 동안 밥을 갖다주다 기한이 지나면 문을 딱 닫는다”는 구전이 그것이다. 아마도 나병 같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따로 격리시켜 살게 했던 풍습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고려장을 고려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게 된 것은 일제시대부터라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역사책, 지리궼,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서도 노인을 산 채로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는 반면, 일제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일제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일제시대에 고려장 이야기가 널리 보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혹자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도굴을 위해 퍼뜨린 것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더라도, 일제시대를 거치며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진 것만큼은 사실 아닐까. 널리 퍼진 고려장 이야기를 토대로 해방 후 영화까지 만들었으니, 1963년 김기영 감독, 김진규·주증녀 주연의 <고려장>이 그것이다.
고려장 이야기 보급에 앞장선 총독부 발간 동화
그런데 일제시대에 고려장 이야기를 보급하는 데 견인차 노릇을 한 것은 놀랍게도, 동화였다. 1919년, 일찍이 평양고보 교사를 지낸 적 있는 일본인 미와 다마끼三輪環가 『전설의 조선傳說の朝鮮』이란 책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불효식자不孝息子’란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에 남아 있는 최초의 고려장 이야기다.
그보다 40여 년 전인 1882년, 미국인 그리피스의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 ‘고리장’에 대한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긴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고려장 이야기 보급에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동화집』이었다. 『조선동화집』은 비록 일본어로 쓰이긴 했어도 우리나라 최초의 전래동화집으로, 제목은 동화집이지만 전설이나 민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여기에 실린 총 25편의 이야기 중 ‘어머니를 버린 남자親な捨てる男’가 바로 고려장 이야기다.
옛날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마음씨가 고약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늙어서 몸이 약해진 어머니와 참 마음씨가 착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 “집은 이처럼 가난한데 네 할머니는 조금도 일하지 않으니 어딘가 산속에 할머니를 버려두고 오려고 한다. 너는 지게에 할머니를 태워 와라.” … 오 리, 십 리를 가면서 길은 점점 산속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인적이 없는 깊은 곳에 이르렀습니다. 남자는 어머니를 지게에서 내려놓았습니다. 어머니가 땅에 넘어지듯 엎어져 있는 것을 뒤로하고 남자는 그대로 아들과 함께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동화집』은 전래동화집의 원형이요 전범이 되었으며,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다른 동화집에 그대로 혹은 약간 변형된 채 재수록되었다. 『조선동화집』의 내용이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어머니를 버린 남자’ 또한 그 후에 나온 수많은 동화집에 그대로 옮겨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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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편찬한 곳은 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이곳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필요한 학교 교과서 편찬과 각종 교육 관련 발간물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지금으로 치면 교육부 산하 교육개발원이나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곳이다. 당시 편집과장은 오다 쇼고小田省吾. 나중에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편찬을 책임지기도 했던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다. 때문에 『조선동화집』의 편찬 동기와 의도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이나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손진태는 고려장 이야기를 싣되, 제목을 ‘기로전설’이라 하고 있으며, 박영만이 채록한 75편의 전래동화 중에는 고려장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청산되어야 할 일제의 영향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동화집』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이 책은 심의린의 『조선동화대집』(1926),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1940)과 함께 일제시대 3대 동화집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전래동화의 원전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현재 시판되고 있는 전래동화집 중에는 『조선동화집』의 고려장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제목 아래 고려장을 마치 고려 때 실제 있었던 일처럼 써놓은 전래동화집이 버젓이 팔리고 있다. 심지어는 현행 교과서에도 고려장 이야기가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실려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읽기』 교과서의 ‘소년과 어머니’,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실려 있는 어머니를 업고 고려장 하러 가는 아들의 모습을 그린 삽화가 그것이다. 『읽기』 교과서의 해당 단원은 희곡이란 장르를 공부하면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보는 단원인데, 그런 목적이라면 하고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왜 하필 고려장 이야기를 텍스트로 삼았는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하여 꼭 그래야 했다면 고려 때 그런 풍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밝혀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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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이 고려시대의 장례가 아니라면, 고려의 실제 장례 풍습은 무엇이었을까?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로 화장을 했다. 부모가 돌아가면 절에서 스님의 인도 아래 화장하여 유골을 절에 모셔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항아리나 작은 돌관에 담아 땅에 묻기도 하고, 산이나 물에 뿌리기도 했다. 화장 아닌 매장도 했다. 특히 왕들은 매장을 주로 했다.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구덩이를 파고 묻거나, 풀 따위로 덮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