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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묻어주고 평양 부벽루에 선 김시습 …
문소영의 명화로 읽는 고전 가을 달밤의 적막 … 김시습 『금오신화』 중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중앙일보 문소영]
그림 ③ 선녀승란도(仙女乘鸞圖), 5대 10국 시대 주문구(907?~975?) 작, 혹은 송나라 때의 모작, 비단에 채색, 22.7X24.6㎝.
'취유부벽정기'에서 개성 부호의 아들인 미소년 홍생이 장사 겸 유람을 위해 대동강에 온 것은 정축년 한가윗날로 설정돼 있다. 이때는 세조 3년이자 단종이 죽임을 당한 해로, 김시습이 23세 나이에 평양을 포함한 관서지방을 방랑하던 때였다. 김시습은 그때의 감회를 주인공 홍생에게 투영한 것이다.
홍생은 늦은 밤 혼자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정 밑에 이르렀다. 부벽정은 평양의 명소인 부벽루(浮碧樓)를 말하는 것으로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고려의 왕들이 풍류를 즐겼고, '부벽루연회도'(그림 ②)에 나오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신이 내린 직장인' 평안감사가 화려한 잔치를 벌였으며, 일제시대에는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던 곳이다.
홍생이 부벽루에 올라서니 "달빛은 바다처럼 널리 비치고 물결은 흰 비단 같았다." 이렇게 탁 트이고 극도로 청아하고 고요한 경치 속에 있을 때 인간은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인해 벅찬 기쁨을 느끼면서 동시에 묘한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의 '적벽부(赤壁賦)'에서 소동파와 달밤 뱃놀이를 즐기던 객(客)이 말한 것처럼 영원한 시간으로 이어지는 듯한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이 너무나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문득 깨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생도 슬픈 감상에 빠졌다. 그는 특히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이었음을 상기하고 "임금 계시던 궁궐에는 가을 풀만 쓸쓸하고 / 구름 낀 돌층계는 길마저 아득해라" 등 인간의 덧없음에 대한 시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읊었다. 그가 시를 읊는 소리는 "깊은 구렁에 잠긴 용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에 있는 과부를 울릴 만하였다"고 한다. 이 표현은 원래 '적벽부'에서 객의 구슬픈 피리소리를 묘사한 시구로, 이렇게 '취유부벽정기' 여기저기에는 '적벽부'의 영향이 스며 있다.
'적벽부'는 김시습뿐만 아니라 조선의 수많은 문인과 예인들이 매혹된 시였다. 그들은 요즘 같은 초가을 달밤이 되면 앞다투어 배를 띄워 '적벽놀이'를 하며 시를 읊었고 '적벽부'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불세출의 조선 화가 김홍도(金弘道) 의 '적벽야범'(그림 ①)을 보면 전경의 수려한 절벽과 후경의 외로운 둥근 달 사이, 아득한 강물과 하늘이 이어진 여백에서 '적벽부'의 맑고 서늘하고 광막한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난다. 절벽을 막 지나치는 배에서 객은 피리를 불고 있고 소동파는 몸을 일으키며 왜 그렇게 피리소리가 슬프냐고 묻고 있다.
객이 답하길, 적벽대전에서 싸우던 일세의 영웅들도 지금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며 "우리 인생 짧은 것이 슬프고 긴 강의 끝없음이 부럽습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소동파는 이렇게 위로한다. "이 물과 저 달을 아십니까? (물이)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달이)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는 줄지도 늘지도 않았습니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천지도 한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치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무엇을 부러워합니까?" 이 호쾌하고 자연과 일체된 초월적인 생각에 객은 비로소 우울함을 떨쳐 버린다.
'적벽부'에서 객의 피리소리에 소동파가 이렇게 화답했다면 '취유부벽정기'에서 홍생의 시 읊는 소리에 화답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대와는 시를 논할 만하군요"라고 하고 자신도 시를 써서 준다. 그 시의 운치에 반한 홍생이 그녀의 신분을 묻자 그녀는 자신이 옛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녀였다고 말해 준다.
공주가 "나의 선친(기자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께서 필부(匹夫)의 손에 패하여 종묘사직을 잃으셨습니다. 위만(衛滿)이 보위를 훔쳤으므로 우리 조선의 왕업은 끊어지고 말았소"라고 말하는 대목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빗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녀의 말 "나는 그때 절개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김시습의 각오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그때 공주에게 그녀의 조상이자 신선이 된 기자가 나타났다. 그가 불사약을 주어 공주도 선녀가 되었고, 달나라로 날아가 선녀 항아(姮娥)와 벗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변했고, 그녀의 적인 위만의 나라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경(仙境)은 광활한데 티끌로 찬 속세는 세월도 빠르구나"라고 그녀는 시를 읊는다. 이것을 보면, 세조와 정치현실에 대한 김시습의 분노와 슬픔이, 그 또한 덧없는 속세의 일이라는 초연함으로 변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주는 이렇게 홍생과 시를 주고 받다가 날이 새자 홀연히 전설의 새 난조(鸞鳥)를 타고 날아가 버렸다. '선녀승란도'(그림 ③)에서 오색찬란한 난조를 타고 날아가며 휘영청 보름달을 돌아보는 선녀의 여유로운 모습이 그녀와 닮았으리라. 홍생은 공주가 떠난 후 그녀와 선계(仙界)를 동경하는 마음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마침내 꿈속에서 선계로 오라는 초청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 결말은 현실도피적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체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사육신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수습한 것이나 세조의 부름을 계속 거절한 것은 간접적이지만 분명한 저항이었고, 끊임없이 글을 쓰며 자아를 실현했다. 다만 시공간적 무한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 일체가 되는 신선의 꿈은 현실에 지친 그에게 서글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티끌 많은 이 세상에서 가을 달밤에 읽는 '취유부벽정기' 한 줄은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어 주리라.
문소영 기자 < symoonjoongang.co.kr >
천재 소년 → 출가 → 환속 → 결혼과 사별 → 방랑 …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그림)은 5세 때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를 지을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촉망되던 장래를 내던졌다.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승려로 자처하며 10년 가까이 방랑했다. 전국을 방랑한 경험과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섭렵은 그의 사상과 글을 독특하고 생기 있게 만들었다. 30대에 경주 남산 금오산실(金鰲山室)에서 쓴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이런 특징들이 잘 나타난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 새 조정에서 관직에 나아가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40대 후반에 환속해서 아내를 맞았으나 곧 사별하고 조정의 어지러움으로 다시 방랑을 떠났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