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띄우는 편지 2010년 12월 4일자 <르몽드>
모래톱 위에 몸을 숙인 채, 그녀는 흐르는 강물에 손을 맡기다, 이내 물길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고운 모래를 한 줌 쥔다. 이곳은 서울 남동쪽에서 200km 떨어진 낙동강. 유유히 장엄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는 크게 굽이쳐 돈다. 강은 흐르다 오른 편에 수풀이 우거진 구릉을 만나고 그 건너편으로는 희디 흰 모래톱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물살이 약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모래톱 섬이 강줄기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그을린 얼굴, 예스러운 밝은 잿빛의 승복을 입은 자그마하고 가냘픈 체구의 지율 스님은 날마다 사진장비를 메고 낙동강과 주변을 살핀다. 그녀는 강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아 한 장 한 장 정리해 강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보여 준다. 태백산에서 처음 샘솟아 남쪽으로 330km를 흘러 부산 부근의 바다로 흘러드는 한국의 가장 긴 강 낙동강의 생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의 나머지 3대 주요 강들과 마찬가지로, 낙동강도 대규모 정비 공사의 대상이다. 환경주의자들과 시민운동단체, 종교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권은 아랑곳 않는다.
지난 5월, 강의 상류 지보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수 스님은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하였다. 한국 불교 역사상 스님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건 자살이 아니고 뭇 생명들에 대한 연민을 상징하는 소신공양입니다. 스님의 시신을 찾았을 때 보니 스님은 손을 합장한 채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라고 한국의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의 지관 스님은 말한다. 지율 스님은 문수 스님의 희생이 일깨우는 의미를 간직한 눈으로 “저는 그 스님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루해가 지는 적막 속에서 저 멀리 아직도 굴착기와 불도저의 소음이 들려온다. 그들은 6m 깊이로 강바닥을 파헤치고 일부 구간에서는 구불구불한 강줄기를 직선으로 만들려고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고 있다. “정부는 녹색성장을 말하면서,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3년간 배상을 받고 말았습니다. 농촌 사람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지율 스님은 말한다.
스님이 논과 감나무 과수원, 누에치기로 삶을 일궈온 이곳 중동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가냘픈 체구에 50줄에 들어섰지만 조용히 결의에 찬 그녀는 ‘성가신’ 존재였다. 그러나 점차 마을은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님은 아무도 살지 않던 낡아 쓰러질 듯한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저녁이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침이면 지붕 기와에 앉아 쉬며 노래하는 새 소리에 잠이 깹니다.” 새벽부터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으로 향한다. 이렇게 은신처에서 나와 즐기며,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한 아이마냥 경탄한다. 강에서 주운 조개껍질, 모래 위에 남은 생명체의 흔적 등, 스님은 책상다리로 앉은 채 이야기하는 동안 연신 이들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발을 담근 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대화는 계속된다.
지율 스님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받자 고개를 젓는다.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이지요”라고 스님은 말한다. 오랜 동안 스님은 어느 암자에서 은둔했었다. 2001년 어느 날 숲 속을 거닐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계가 나무들을 베고 숲을 파헤치는 것을 목격했다. “마치 전쟁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슬픔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고문을 받고 있는 이 나무들과 이 땅의 살려달라는 외침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그녀는 암자를 떠나고 싸움을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진행한 삼보일배, 농성, 단식, 국가에 대한 소송 등 지율 스님은 실천을 확대해 나갔다. “암자를 떠날 때 나는 너무도 순진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법은 약자를 위하지도 않고 이 땅에서 싸움은 헛되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식은? “단식이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의 모든 힘을 다해 뛰어들었습니다.” 마지막 단식은 생명을 잃을 뻔했고, 뒤이어 스님은 산 속의 외진 은신처에서 3년을 보냈다. “자연과 마주하며 함께 한 이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자연 속에서 모든 감각은 더욱 명민해집니다. 바람 속에 하나가 되고 안개 속에서 자연의 정기를 받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로 돌아왔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죽이고 있습니다. 4대강 공사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다가 올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내 눈을 주고 싶습니다. 이 강은 수백 년을 흘러 바닥을 다지고 지금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를 그려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천 년 이어온 자연의 작품을 단 2년 만에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조급한 공사가 어마어마한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건 굳이 과학이 아니어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난 50년 간 우리가 저질러온 일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성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를 이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물질적 발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아픈 아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부모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때 아이가 살아날지 아닐지는 묻지 않습니다. 아픈 아이를 돕기 위해 옆에 있을 뿐입니다.”
글·필립 퐁스 Philippe Pons <르몽드> 도쿄 특파원
*** 위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실에서 번역해주셨습니다. 원문은 초록의 공명 홈 '물길을 걷다' 에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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