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끝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예수는 답을 안 뒤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결단하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었다. 우리는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가 존재의미를 안 뒤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의 아들인 나를 사람들은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과 신 사이에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그러나 베드로는 대답했다. “당신은 메시아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그가 신의 아들이라면, 그래서 모든 것을 아는 신 자체라면 그런 질문이 그에게 굳이 필요했을까? 만약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이 정말로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면, 참으로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신이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인간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확인하며, 회의하고 좌절하며, 또 희망을 찾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다.
예수가 단순히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 질문은 그가 인간조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음을 환히 보여준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겪으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하게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인간조건은 신의 아들인 예수에게 곁들어진 가벼운 액세서리가 아니라, 절박한 실존의 묵직한 조건이었다. 그 조건 속에서 자신이 비록 인간이지만, 동시에 인간들을 위해 처절하게 찢겨져야만 하는 신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때,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신의 아들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이해되는 예수의 질문과 결단은 옛 그리스의 지혜와도 잘 통한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의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이 말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준다. 자기 주제와 분수를 알지 못하고 날뛰는 사람이 세상에 끼치는 폐해를 생각해보면, 이 말에 담긴 지혜의 깊이와 가치를 잘 헤아릴 수 있다.
문제는 이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에서 생긴다. 그래서 이 지혜는 존경의 대상이 되면서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이 치명적인 역설을 잘 보여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뭔가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지혜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샀고, 독배를 마셔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지혜의 시금석을 지당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던져 볼 만한 질문이 있다.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꼭 알아야만 하는가? 진정 그 앎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부은(oidi-) 발(pous)을 가진 사나이 ‘오이디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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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1808년 작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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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는 테바이의 왕이다.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에는 테바이가 아닌 코린토스의 왕자였다. 그런데 왜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그가 테바이에서 왕 노릇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 오이디푸스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온 기막힌 삶에 잇닿게 된다.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술에 취한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코린토스 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부모님을 찾아가 확인을 요구했다. 왕과 왕비는 그것은 헛소리니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이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고, 또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도성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그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을 찾아 갔다. 그는 물었다. “전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 친부모는 누구입니까?” 신탁의 대답은 뜬금없이 끔찍했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죽이고, 너의 어머니와 몸을 섞을 것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인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그가 향한 곳이 하필 테바이였다. 그곳에서 그는 테바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스핑크스를 예지를 발휘하여 물리쳤고, 테바이 사람들의 구원자로 떠올랐다. 때마침 국왕이던 라이오스가 테바이 외곽 지역에서 도적들에게 살해를 당한 뒤라, 왕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라이오스의 미망인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네 자녀가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테바이에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게 몰려와 스핑크스를 물리쳤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테바이를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델포이 신전으로부터 오이디푸스에게 전해진 구원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들어와 테바이를 더럽혔다. 따라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 처형을 하든가 도성에서 쫓아내야 테바이는 깨끗하게 정화되고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명감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나는 이 살인자가 누구이든,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것처럼 싸워나가겠습니다. 살인자를 찾아 모든 곳을 수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살인범을 찾아가는 데에 몰입할수록, 그가 누구인지가 점점 드러났다. 사실 그는 테바이로 들어오기 전에, 한 노인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그 노인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고, 라이오스를 죽이고 도시를 더럽힌 자가 바로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한때 테바이의 구원자였고, 현재 테바이의 왕이지만, 알고 보니 테바이를 더럽히고 역병을 몰고 온, 고통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가 장담한 대로 도시를 정화하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처형하거나 추방해야만 했다. 더 끔찍한 일은 그가 죽인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따라서 지금 그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왕비 이오카스테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신탁은 그렇게 실현되었다.
참혹한 사실을 감지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말렸다. “신들께 맹세코, 그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제발 그것을 추적하지 마세요. 난 충분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 아, 불행한 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하기를!”
이오카스테는 오싹했다. 그녀가 수십 년 전 오이디푸스를 임신했을 때, 그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부부는 태어난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뒤꿈치를 쇠로 뚫고 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음의 순간에서 구해졌고, 코린토스의 왕실에 건네졌다. 그의 발이 부은 이유, 그가 그래서 ‘오이디푸스’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오카스테는 험악한 운명을 피하려고 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나, 그 저주스런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치욕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이디푸스 역시 참혹한 운명을 피하려고 코린토스의 부모를 떠났지만, 결국 제 발로 친아버지를 찾아가 죽이고, 친어머니를 범한 꼴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파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끔찍한 운명을 피하려던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 순간, 파멸의 나락으로 한없이 곤두박질쳤다. “너 자신을 알라”는 지혜는 그들 모자에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희망하며 살아간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우리의 건전한 상식을 도발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진리와 우리의 존재의미를 알게 될 때, 혹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허무와 파멸의 끝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냐고.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