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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한때 가야의 '속국'이었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8.19 12:03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가야 건국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MBC 주말드라마 < 김수로 > . 이 드라마 속에서, 김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왕국 건설 움직임에 대해 그 누구보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라가 있다. 바로 신라 왕국이다.
드라마 속 신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제철업 벨트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될 경우에 그 누구보다 자국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드라마 속 신라 공주들이 김해 땅으로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곤 하는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다.
드라마 < 김수로 > 에서 묘사되고 있는 두 지역 간 긴장관계는 실제 역사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서기 42년 가야 건국 이후로 가야와 신라의 관계는 치열한 대립·항쟁으로 일관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속에는, 오랜 기간 지속된 '대립·항쟁'보다는 막판에 일어난 '신라의 최종적 승리'가 보다 더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신라와 대등했던 가야'보다는 '신라에게 망한 가야'가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다.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가 532년에,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가 562년에 신라에 의해 각각 멸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신라 > 가야'의 이미지가 더 강한 게 사실이다.
가야의 존속 기간(42~562년)이 소위 '삼국시대'의 존속 기간(1세기~668년)에 비해 크게 짧지 않는데도 우리가 굳이 가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신라 > 가야'의 이미지가 '신라⊃가야'의 이미지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굳이 가야를 빼고 고구려·백제·신라만의 시대를 구분하려면, '삼국시대'의 개시 시점은 가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서기 562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린 가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를 이야기 하는가
이렇듯,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가야란 나라의 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사에 대한 역사왜곡은 일본·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제까지 서슴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 중심주의 하에서 기록된 < 삼국사기 > 를 꼼꼼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야의 실제 위상이 그처럼 허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신라 > 가야'가 아니라 '신라=가야'가 역사의 참모습이며 나아가 '신라 < 가야'인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 삼국사기 > 권1 '파사이사금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사이사금은 신라 제5대 국왕이고, '본기'는 제왕의 시대를 연도순으로 기록한 역사서를 말한다. 파사이사금 23년(서기 102년) 기사에 따르면, 이 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파사이사금 재위) 23년 가을 8월(음력)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판결을 청구했다. 왕은 난처해하면서 '금관국 김수로가 나이가 들고 지식도 많다'면서 그를 불러 물어보았다. 수로가 심의를 열어 쟁론 중인 땅을 음즙벌국에 소속시켰다. 이에 왕은 육부(六部)에 '김수로를 위해 잔치를 열라'고 명령했다. 5부는 모두 이찬(伊?)을 내보냈으나, 유독 한기부(漢祺部)만이 지위가 낮은 자를 내보냈다. 김수로가 노하여 수하인 탐하리(耽下里)에게 한기부 책임자인 보제(保齊)를 죽이라고 명령한 뒤에 돌아갔다."
신라의 두 소국인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이 신라 국왕이 아닌 가야 국왕에 의해 해결됐으며 이 문제가 해결된 뒤에 가야 국왕이 무례한 신라 한기부 장관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위의 사료를 해설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점들이 있다.
서기 42년에 등극한 김수로가 서기 102년에도 여전히 금관가야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다는 위의 기술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 가락국기 > 를 포함해서 고려시대에 나온 가야사 사료들에는, 42년부터 532년까지 490년간 존속한 금관가야에 단 10명의 국왕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가야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가야 국왕들에 대한 정보가 대거 누락되는 한편, 국왕 두세 명의 역사가 국왕 한 명의 역사로 압축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당시의 금관가야 국왕이 김수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금관국 김수로'라는 표현을 '금관가야 국왕'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한편, 위의 사료에 나타난 신라 정부 시스템을 근거로 이 사건이 서기 102년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주장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숨길 수 없는 화려한 역사를 가진 '가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위의 < 삼국사기 > 에 따르면, 금관가야 국왕은 신라 내부의 소국들 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한 뒤에, 자신의 비위를 건드린 한기부 장관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사이사금 23년 이전과 이후의 기록을 보면, 양국이 오랫동안 상호 대립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나라가 계속 싸웠다는 기사들 속에 위와 같이 금관가야 국왕이 신라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국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면 양국관계는 기본적으로 전쟁관계가 아닌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고 또 평화관계 중에서도 '수직적 평화관계' 혹은 '종속적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적대국인 가야가 신라의 내정에 간섭한 이 사건을 두고, 1980년에 작고한 역사학자 문정창은 < 가야사 > 97쪽에서 "그런 적국의 주(主, 임금)를 모셔다가 이토록 내정간섭적인 권한을 행세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 연대에 신라가 가락국(가야국)의 속국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정창의 주장은, 간략히 말해, 당시의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속국(屬國)은 서양의 종속국(vassal state)과 달리 상국(上國)의 법률을 따르지 않았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칙상으로 자체적인 정치적 자율성을 향유했다. 다만, 국제관계에서 상국과 보조를 맞추고, 상국의 연호를 따르고 책봉을 받으며 일정한 봉건적 예법을 갖추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실질적인 자율성을 향유하되 형식적인 복종만큼은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 건국 이래 확립된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가야가 신라 내부의 분쟁에 개입한 이 사건은 상국-속국 관계 같은 수직적 평화관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사료에는 파사이사금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 있다 하여 적대국 군주를 '일부러' 모셔서 사법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속국 군주인 파사이사금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상국 군주인 금관가야 국왕이 보다 못해 직접 개입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다만,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 삼국사기 > 편찬자들로서는 그런 실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숨길 수도 없으므로, 위와 같이 신라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이치적이다. 이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역사를 가야가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년 사이 가뭄·우박·지진 피해를 받은 신라
그렇다면, 오랫동안 서로 으르렁대던 가야와 신라 사이에 위와 같은 관계가 갑작스레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 가야사 > 의 저자인 문정창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사이사금 23년 이전의 몇 해 동안 신라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살펴보다 보면, 신라가 가야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계속해서 < 삼국사기 > 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파사이사금 재위) 19년 여름 4월(음력),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1년 가을 7월(음력), 우박이 내려, 나는 새들이 죽었다. 겨울 10월(음력), 서울에 지진이 나서 민가를 무너뜨렸으며 사망자가 있었다.
22년 봄 2월(음력),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명명했다. 가을 7월(음력), 왕이 월성으로 이거(移居)했다."
위에 따르면, 금관가야 국왕이 신라 내정에 간섭하기 4년 전부터 신라에 국가적인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 19년 4월에는 서울 즉 서라벌에 가뭄이 들었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가뭄이라면 상당히 충격적인 가뭄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2년 뒤에는 전국적으로 우박 피해가 극심했다. "나는 새들이 죽"을 정도의 피해였다. 19년 4월의 경우에는 자연재해의 발생지역을 "서울"이라고 한정한 데에 비해 21년 7월 기사에는 그런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우박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적인 우박 피해를 겪은 지 3개월 만인 21년 10월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발생해서 가옥이 붕괴되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불과 2년 사이에 가뭄·우박·지진 피해가 번갈아가며 신라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이은 자연재해는 신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치권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라벌에 지진 피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4개월이 지난 파사이사금 22년 2월부터 월성(月城, '반월성'이라고도 함) 건설 작업에 착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2년 2월부터 새로운 도성인 월성을 건설하고 22년 7월에 파사이사금이 그리로 천도했다는 것은, 기존의 수도인 금성(金城)에 기초한 신라 정부의 통치권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야 도움 없인 권위 유지할 수 없었던 신라정부
이 시기에 신라 정부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사실은, 월성으로 천도한 뒤에 발생한 소국들 간의 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파사이사금이 소국들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판결을 당사자들에게 강제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의 신라 정부는 가야의 도움 없이는 권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체였던 것이다.
이처럼 파사이사금 19년부터 21년 사이에 발생한 일련의 대재앙으로 인해 신라 정부가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는 사실은, 종래에 '적 대(對) 적'의 관계였던 가야와 신라가 갑작스레 '상국 대 속국'의 관계로 바뀐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가야는 신라에 발생한 자연재해와 정치적 위기를 활용해 신라를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신라에 세 번째 재앙이 발생한 파사이사금 21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가야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금년 1월 12일 미국 남쪽의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대통령궁을 비롯해서 정부 청사와 주요 건물들이 붕괴되고 20만 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1만 1천 명의 미국 해·공군 병력이 아이티를 접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통제할 수 없는 대규모 자연재해는 주변국의 내정간섭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가야 역시 그런 상황을 놓치지 않고 신라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국 간의 상국-속국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사이사금 27년 8월(음력)에 신라가 가야를 침공함으로써 양국이 다시 전쟁상태에 돌입했다는 < 삼국사기 > 의 기록을 놓고 볼 때, 적어도 파사이사금 27년 8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 같은 관계가 종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던 기간은 최장 6년이라고 볼 수 있다.
가야 재조명, 한국 고대사 올바른 평가에 필수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이 사실은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신라의 일방적 우위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실제로는 가야와 신라가 팽팽하게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가야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은 적도 있으니, '신라 > 가야' 공식은 역사적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양국관계는 '가야=신라'였다고 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어쩌면 '가야?신라'였다 해도 아주 지나친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야와 신라 중에서 누가 강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가야의 위상을 재평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진면목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후반 내내 0-0으로 팽팽하게 전개되다가 종료 몇 분 전에 가야가 두 골(532년·562년 패배)을 먹고 0-2로 패했다 하여 '신라의 압도적 우위 속에 진행된 경기'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료 몇 분 전의 상황만 갖고 가야를 평가한다면 그 이전에 가야가 보여준 기량은 자연히 묻힐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로서는 가야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가야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신라사에 대해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평가하는 데에 꼭 필수적인 일이다. 한국사에 대한 한국인 스스로의 역사왜곡을 극복할 때에만 '남들'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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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신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제철업 벨트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될 경우에 그 누구보다 자국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드라마 속 신라 공주들이 김해 땅으로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곤 하는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다.
드라마 < 김수로 > 에서 묘사되고 있는 두 지역 간 긴장관계는 실제 역사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서기 42년 가야 건국 이후로 가야와 신라의 관계는 치열한 대립·항쟁으로 일관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속에는, 오랜 기간 지속된 '대립·항쟁'보다는 막판에 일어난 '신라의 최종적 승리'가 보다 더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신라와 대등했던 가야'보다는 '신라에게 망한 가야'가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다.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가 532년에,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가 562년에 신라에 의해 각각 멸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신라 > 가야'의 이미지가 더 강한 게 사실이다.
가야의 존속 기간(42~562년)이 소위 '삼국시대'의 존속 기간(1세기~668년)에 비해 크게 짧지 않는데도 우리가 굳이 가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신라 > 가야'의 이미지가 '신라⊃가야'의 이미지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굳이 가야를 빼고 고구려·백제·신라만의 시대를 구분하려면, '삼국시대'의 개시 시점은 가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서기 562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린 가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를 이야기 하는가
이렇듯,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가야란 나라의 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사에 대한 역사왜곡은 일본·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제까지 서슴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 중심주의 하에서 기록된 < 삼국사기 > 를 꼼꼼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야의 실제 위상이 그처럼 허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신라 > 가야'가 아니라 '신라=가야'가 역사의 참모습이며 나아가 '신라 < 가야'인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 삼국사기 > 권1 '파사이사금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사이사금은 신라 제5대 국왕이고, '본기'는 제왕의 시대를 연도순으로 기록한 역사서를 말한다. 파사이사금 23년(서기 102년) 기사에 따르면, 이 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파사이사금 재위) 23년 가을 8월(음력)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판결을 청구했다. 왕은 난처해하면서 '금관국 김수로가 나이가 들고 지식도 많다'면서 그를 불러 물어보았다. 수로가 심의를 열어 쟁론 중인 땅을 음즙벌국에 소속시켰다. 이에 왕은 육부(六部)에 '김수로를 위해 잔치를 열라'고 명령했다. 5부는 모두 이찬(伊?)을 내보냈으나, 유독 한기부(漢祺部)만이 지위가 낮은 자를 내보냈다. 김수로가 노하여 수하인 탐하리(耽下里)에게 한기부 책임자인 보제(保齊)를 죽이라고 명령한 뒤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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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2년에 등극한 김수로가 서기 102년에도 여전히 금관가야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다는 위의 기술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 가락국기 > 를 포함해서 고려시대에 나온 가야사 사료들에는, 42년부터 532년까지 490년간 존속한 금관가야에 단 10명의 국왕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가야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가야 국왕들에 대한 정보가 대거 누락되는 한편, 국왕 두세 명의 역사가 국왕 한 명의 역사로 압축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당시의 금관가야 국왕이 김수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금관국 김수로'라는 표현을 '금관가야 국왕'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한편, 위의 사료에 나타난 신라 정부 시스템을 근거로 이 사건이 서기 102년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주장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숨길 수 없는 화려한 역사를 가진 '가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위의 < 삼국사기 > 에 따르면, 금관가야 국왕은 신라 내부의 소국들 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한 뒤에, 자신의 비위를 건드린 한기부 장관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사이사금 23년 이전과 이후의 기록을 보면, 양국이 오랫동안 상호 대립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나라가 계속 싸웠다는 기사들 속에 위와 같이 금관가야 국왕이 신라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국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면 양국관계는 기본적으로 전쟁관계가 아닌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고 또 평화관계 중에서도 '수직적 평화관계' 혹은 '종속적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적대국인 가야가 신라의 내정에 간섭한 이 사건을 두고, 1980년에 작고한 역사학자 문정창은 < 가야사 > 97쪽에서 "그런 적국의 주(主, 임금)를 모셔다가 이토록 내정간섭적인 권한을 행세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 연대에 신라가 가락국(가야국)의 속국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정창의 주장은, 간략히 말해, 당시의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속국(屬國)은 서양의 종속국(vassal state)과 달리 상국(上國)의 법률을 따르지 않았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칙상으로 자체적인 정치적 자율성을 향유했다. 다만, 국제관계에서 상국과 보조를 맞추고, 상국의 연호를 따르고 책봉을 받으며 일정한 봉건적 예법을 갖추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실질적인 자율성을 향유하되 형식적인 복종만큼은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 건국 이래 확립된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가야가 신라 내부의 분쟁에 개입한 이 사건은 상국-속국 관계 같은 수직적 평화관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사료에는 파사이사금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 있다 하여 적대국 군주를 '일부러' 모셔서 사법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속국 군주인 파사이사금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상국 군주인 금관가야 국왕이 보다 못해 직접 개입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다만,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 삼국사기 > 편찬자들로서는 그런 실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숨길 수도 없으므로, 위와 같이 신라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이치적이다. 이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역사를 가야가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년 사이 가뭄·우박·지진 피해를 받은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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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이사금 재위) 19년 여름 4월(음력),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1년 가을 7월(음력), 우박이 내려, 나는 새들이 죽었다. 겨울 10월(음력), 서울에 지진이 나서 민가를 무너뜨렸으며 사망자가 있었다.
22년 봄 2월(음력),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명명했다. 가을 7월(음력), 왕이 월성으로 이거(移居)했다."
위에 따르면, 금관가야 국왕이 신라 내정에 간섭하기 4년 전부터 신라에 국가적인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 19년 4월에는 서울 즉 서라벌에 가뭄이 들었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가뭄이라면 상당히 충격적인 가뭄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2년 뒤에는 전국적으로 우박 피해가 극심했다. "나는 새들이 죽"을 정도의 피해였다. 19년 4월의 경우에는 자연재해의 발생지역을 "서울"이라고 한정한 데에 비해 21년 7월 기사에는 그런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우박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적인 우박 피해를 겪은 지 3개월 만인 21년 10월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발생해서 가옥이 붕괴되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불과 2년 사이에 가뭄·우박·지진 피해가 번갈아가며 신라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이은 자연재해는 신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치권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라벌에 지진 피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4개월이 지난 파사이사금 22년 2월부터 월성(月城, '반월성'이라고도 함) 건설 작업에 착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2년 2월부터 새로운 도성인 월성을 건설하고 22년 7월에 파사이사금이 그리로 천도했다는 것은, 기존의 수도인 금성(金城)에 기초한 신라 정부의 통치권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야 도움 없인 권위 유지할 수 없었던 신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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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파사이사금 19년부터 21년 사이에 발생한 일련의 대재앙으로 인해 신라 정부가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는 사실은, 종래에 '적 대(對) 적'의 관계였던 가야와 신라가 갑작스레 '상국 대 속국'의 관계로 바뀐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가야는 신라에 발생한 자연재해와 정치적 위기를 활용해 신라를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신라에 세 번째 재앙이 발생한 파사이사금 21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가야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금년 1월 12일 미국 남쪽의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대통령궁을 비롯해서 정부 청사와 주요 건물들이 붕괴되고 20만 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1만 1천 명의 미국 해·공군 병력이 아이티를 접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통제할 수 없는 대규모 자연재해는 주변국의 내정간섭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가야 역시 그런 상황을 놓치지 않고 신라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국 간의 상국-속국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사이사금 27년 8월(음력)에 신라가 가야를 침공함으로써 양국이 다시 전쟁상태에 돌입했다는 < 삼국사기 > 의 기록을 놓고 볼 때, 적어도 파사이사금 27년 8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 같은 관계가 종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던 기간은 최장 6년이라고 볼 수 있다.
가야 재조명, 한국 고대사 올바른 평가에 필수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이 사실은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신라의 일방적 우위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실제로는 가야와 신라가 팽팽하게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가야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은 적도 있으니, '신라 > 가야' 공식은 역사적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양국관계는 '가야=신라'였다고 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어쩌면 '가야?신라'였다 해도 아주 지나친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야와 신라 중에서 누가 강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가야의 위상을 재평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진면목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후반 내내 0-0으로 팽팽하게 전개되다가 종료 몇 분 전에 가야가 두 골(532년·562년 패배)을 먹고 0-2로 패했다 하여 '신라의 압도적 우위 속에 진행된 경기'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료 몇 분 전의 상황만 갖고 가야를 평가한다면 그 이전에 가야가 보여준 기량은 자연히 묻힐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로서는 가야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가야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신라사에 대해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평가하는 데에 꼭 필수적인 일이다. 한국사에 대한 한국인 스스로의 역사왜곡을 극복할 때에만 '남들'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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